프롤로그
창으로 흘러드는 햇살마저 천천히 움직이는 주말 아침, 우리 부부는 직접 내린 커피를 홀짝이며 곁에서 놀고 있던 둘째 아이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아이는 제 몸만큼이나 커다란 강아지 인형을 꼭 끌어안고 무어라 말했는데 잘 들어보니 본인은 엄마 역할을 맡고 강아지 인형에겐 아기 역할을 맡긴 것 같았습니다. 그 모습이 너무나도 사랑스러워 저는 남편에게로 고개를 돌리며 말했습니다.
"너무 귀엽지 않아? 사람이 아니라 인형 같아."
남편이 정말이지 홀딱 반했다는 말투로 맞장구를 쳤습니다.
"응. 진짜 인형처럼 귀엽다!"
또 어떤 날은 첫째 아이가 정성 들여 쓴 글씨를 보며 칭찬하기도 했어요.
"와, 거 봐. 하니까 되잖아. 이거 완전 컴퓨터로 쓴 것처럼 잘 썼다!"
언젠가 읽은 짧은 글이 떠오릅니다. 사람들은 맛있는 식당에서 밥을 먹으면서는 마치 집밥 같다는 찬사를 보내고 집에서 맛있는 요리를 먹을 땐 밖에서 파는 것처럼 맛있다는 말로 칭찬을 한다, 정말 아이러니하지 않냐는 게 요지였습니다.
그러게, 정말 그렇네. 당시엔 그냥 짧게 웃어넘겼지만 웬일인지 그 이야기가 두고두고 마음에 남았습니다.
왜 우리는 밖에 나가 집에서 지은 것 같은 밥을 찾고 집밥으로부터는 밖에서 파는 맛을 기대할까. 왜 아이를 인형처럼 귀엽다는 말로 칭찬하면서 인형에게선 인간이 지닌 사랑스러움을 찾아 헤맬까. 손글씨를 보고 기계가 쓴 것처럼 잘 썼다 칭찬하는 이 세상은 사람이 직접 펜을 잡고 서툴게 쓴 것 같은 서체에 왜 열광하는 것일까.
짧게는 한 시간 남짓으로 비행시간이 길지 않고 이제는 비용의 부담까지 적은 일본은 우리 가족이 가장 자주 방문하는 나라입니다. 만으로 두 살인 둘째 아이도 다섯 차례나 다녀왔고 엄마인 저는 정확히 세어 보지는 않았지만 적게 잡아도 스무 번은 다녀왔으니 우리 가족의 일본여행력, 결코 짧지는 않지요. 우리는 북쪽의 홋카이도부터 남쪽의 큐슈와 오키나와까지, 도쿄, 오사카 같은 대도시부터 마츠야마나 와카야마 같은 소도시와 시골 마을까지를 두루 여행하며 이 나라의 수많은 얼굴과 만났습니다. 그러는 동안 루틴이라고 부를 만한 것들도 하나, 둘 생겨났습니다. 갈 때마다 들르는 마트, 언제나 사 마시는 음료, 잠들기 전 함께 나누는 대화 같은 것들 말입니다. 뒤돌아 생각해 보니 특별한 기억을 만들기 위해 떠난 여행지에서 행복이라는 감정을 선사해 준 시간들은 지극히 평범했습니다.
그렇다면 한국에서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일들을 우리는 왜 굳이 일본에까지 날아가서 하는 것일까요.
아이러니하게도 우리 가족이 원하는 여행의 모습은 유난스러운 이벤트가 아닌, 낯선 공기 속에서 지극히 평범한 하루를 살아보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반복되는 일상이라도 낯선 풍경 속으로 옮겨 놓으면 조금은 특별하게 느껴집니다. 익숙해져 버린 존재와 손에 익은 일들을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며 우리는 그것들이 숨겨두고 있던 매력을 발견합니다. 어쩌면 일상에 파묻혀 잊고 살았던 것들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을 되찾을 수도 있을 테고요.
2024년은 아주 특별한 해였습니다. 첫째 아이와 열 살 터울이 나는 둘째가 태어났으니까요. 셋에서 넷이 된 우리는 그해 가을에도 일본행 비행기에 올랐습니다. 첫 숙소는 후지산에서 멀지 않은 마을에 자리한 2층짜리 고택이었습니다. 내내 아파트에서 살아온 첫째는 삐걱삐걱 정다운 소리를 내는 계단을 오르락내리락하며 즐거워했고 태어난 지 6개월 차 아가였던 둘째는 다다미가 깔린 방이 신기한지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구경을 했습니다. 저녁이 되면 근처 편의점에서 사 온 음식들을 한 상 가득 펼쳐 놓고 우리만의 파티를 열었습니다. 장을 보고 오자 마자 냉장고 깊숙이 넣어 두었던 맥주를 꺼내 남편과 함께 짠! 신나게 건배를 하고 한 모금 두 모금 넘기는 맛은 그렇게 달고 시원할 수가 없었습니다.
호텔이 아닌 고택에 머물다 보면 불편함도 따라옵니다. 숙소가 계단을 한참 올라야 닿는 곳에 있으면 직접 가방을 이고 지고 올라가야 했습니다. 음식을 먹고 나서도 당연히 스스로 치워야 했고요. 가구나 집기들은 호텔에서 보던 제품들에 비해 덜 고급스럽고 손때가 묻은 것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지산을 지척에 둔 고택에서의 며칠 후, 우리는 일본의 옛집에 머무는 여행을 시작했습니다.
우리 가족이 꿈꾸는 여행의 모습은, 그리고 삶의 모습은 우리가 머물렀던 일본의 오래된 집들과 닮은 부분이 많다는 생각을 합니다. 시간이 갈수록 더 깊어지는 것, 익숙하지만 여전히 사랑받는 것. 잠시나마 보금자리가 되어주었던 일본의 옛집들과 그 공간들에 머물며 조금씩 성장하는 가족의 이야기가 여러분들에게도 가 닿기를, 그리하여 여러분의 마음도 조금이나마 포근해지기를 희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