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장. 뭉크 미술관

그림을 통해 일생을 보다

by간서치

2026년 8월 5일 수요일 · 오슬로


노르웨이 국립 박물관을 나와 뭉크 미술관까지 걸어갔다. 건너편에서 보니 오페라 하우스와 나란히 바닷가에 있었고, 그 앞에서는 대관람차가 돌고 있었다. 2021년에 문을 연 13층 건물로, 뭉크가 오슬로시에 남긴 그림을 모아 둔 곳이다.


이 미술관 하면 나는 도둑맞은 그림 이야기부터 떠오른다. 2004년 8월, 총을 든 강도들이 대낮에 관람객이 보는 앞에서 「절규」와 「마돈나」를 벽에서 떼어 갔다고 한다. 두 그림은 2년이 지나서야 돌아왔는데 그마저 상해 있었다. 그 뒤로 열 달 동안 문을 닫고 보안을 새로 갖추었다.


그 두 그림 가운데 「마돈나」는 이날 보았는데, 「절규」는 보지 못했다. 앞 장에서 적었듯이 세 점을 번갈아 거는데, 내가 간 시간에는 크레용 그림과 판화가 차례로 나왔다. 도둑맞았던 것은 두꺼운 종이에 템페라와 유화 물감으로 1910년에 그린 것인데, 하필 그 그림만 차례가 오지 않았다.


그런 일이 있었으니 보안이 꽤 까다로울 줄 알았다. 그런데 큰 가방만 맡기라고 할 뿐, 몸수색이라고 할 만한 것은 없었다. 다른 미술관이나 박물관에 들어갈 때와 다르지 않았다.


하나 더 예상과 달랐던 것이 있다. 야간 개장은 무료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로비에 붙은 요금표를 보니 저녁 여섯 시부터는 어른 한 사람에 200 크로네였다. 낮에는 280 크로네라고 하니 우리 돈으로 만 이천 원쯤 저렴한 셈이다.


층별 안내를 보니 전시실만 4층부터 11층까지 여덟 개 층이었다. 그 가운데 내가 주로 머문 곳은 4층, 'MUNCH UENDELIG' 우리말로 '끝없는 뭉크'라는 이름이 붙은 층이다.



톱으로 자른 그림


뭉크 미술관에서 내가 가장 오래 서 있었던 곳은 「절규」도 「마돈나」도 아닌, 처음 보는 그림 앞이었다.


한 액자 안에 남자와 여자의 얼굴이 따로따로 들어 있었다. 왼쪽은 뭉크였고, 오른쪽 붉은 머리의 여인은 연인이었던 툴라 라르센이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두 얼굴 사이에 틈이 나 있었다. 액자는 하나인데 설명판도 왼쪽과 오른쪽에 하나씩 따로 붙어 있었다.


이 여인은 앞 장의 「마돈나」 속 다그니 율과는 다른 사람이다. 뭉크가 서른네 살이던 1898년에 만났다. 결혼하자며 따라다닌 쪽은 툴라였고, 뭉크는 자꾸 달아났다고 한다.


그러다 1902년 여름, 둘이 다투던 자리에서 총이 발사되는 바람에 뭉크는 왼손 손가락 한 마디를 잃었다. 두 사람은 그것으로 끝이 났고, 툴라는 그다음 해에 다른 화가와 결혼했다.


이 그림은 총기 사고가 있고 3년 뒤인 1905년, 뭉크가 마흔한 살 때 그린 것이다. 헤어지고 나서 지난 일을 떠올린 셈이다. 그러고는 톱으로 둘로 잘라 버렸다. 두 얼굴 사이의 틈이 바로 그 자국이다.


잘린 뒤로는 두 쪽이 서로 다른 그림이 되어서 제목도 따로다. 뭉크가 있는 왼쪽은 「녹색 배경의 자화상」(Selvportrett mot grønn bakgrunn)이고, 툴라가 있는 오른쪽은 「툴라 라르센의 풍자적 초상」(Karikert portrett av Tulla Larsen)이다.

왼쪽: 에드바르 뭉크, 「녹색 배경의 자화상」, 1905년, 뭉크 미술관 / 오른쪽: 에드바르 뭉크, 「툴라 라르센의 풍자적 초상」, 1905년, 뭉크 미술관


제목을 알고 다시 보니 툴라의 얼굴을 좀 우스꽝스럽게 그려 놓은 것 같다. 뭉크 뒤에 서 있는 초록빛 얼굴의 남자는 툴라의 남편 아르네 카블리라고 한다. 그 결혼도 오래가지는 못했다.


헤어진 연인의 편지를 찢어 본 사람은 많을 것이다. 그런데 뭉크는 연인의 얼굴이 담긴 그림을 톱으로 잘라 버렸다. 그만큼 미웠던 모양이다. 지금은 값을 매기기도 어려울 그림이라 보는 내가 다 아까웠다.


돌아와서 다시 생각해 보니 엉뚱한 짐작도 든다. 잘린 자리가 자로 잰 듯 가지런했다. 그냥 두었다면 평범했을 그림에 일부러 톱을 대어 이야기를 하나 만들어 낸 것은 아닐까. 당연히 아니겠지.



「절규」와 닮은 그림


「절규」 이야기는 앞 장에서 했으니 여기서는 딸의 사진 한 장으로 대신한다. 뒤에 걸린 것은 판화로 찍은 「절규」다. 그림 속 인물을 따라 한 표정이 제법 그럴듯하다. 이 그림 앞에서는 어느 나라 사람이든 다들 이런 표정으로 사진을 찍고 있었다.

「절규」 석판화(1895년) 앞에서, 뭉크 미술관


전시실을 둘러보다가 「절규」와 닮아 보이는 그림 두 점이 눈에 들어왔다. 하나는 1894년 작품 「불안」으로, 앞 장에서 본 1893년의 「절규」 바로 다음 해에 그린 것이다. 붉은 하늘과 물결치는 바다가 「절규」 그대로다.


「절규」에서 다리 뒤쪽을 걸어오던 두 사람이 여기서는 앞으로 나와, 여럿이 되어 이쪽으로 몰려오는 것 같다. 다들 소리를 지르지도 않고 눈만 크게 뜨고 있다. 정작 귀를 막고 서 있던 그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 나는 「절규」보다 이 그림이 더 무섭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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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에드바르 뭉크, 「절규」, 1893년, 노르웨이 국립 박물관 / 오른쪽: 에드바르 뭉크, 「불안」, 1894년, 뭉크 미술관


몰려오는 이 사람들은 오슬로 한복판의 칼 요한스 거리를 걷던 이들이라고 한다. 젊은 뭉크는 그 거리에서 마주 오는 얼굴들이 두려웠던 모양이다. 사람은 이렇게 많은데 나만 혼자인 것 같은, 그런 마음이 담긴 그림으로 보인다.



다른 하나는 「붉은 담쟁이덩굴」이다. 1898년에서 1900년 사이에 그렸으니 「절규」보다 대여섯 해 뒤다. 이번에는 하늘이 아니라 집이 붉다.


담쟁이덩굴이 벽을 뒤덮었는데, 잎이라기보다 붉은 물감이 흘러내리는 것 같다. 맨 앞에서는 한 남자가 눈을 크게 뜨고 이쪽을 보고 있다. 앞쪽의 얼굴과 뒤로 비스듬히 뻗은 길, 거기에 이 빛깔까지 더해져 「절규」와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에드바르 뭉크, 「붉은 담쟁이덩굴」, 1898~1900년, 뭉크 미술관



자화상으로 본 일생


자화상만 모아 둔 방에는 열여덟 살 얼굴부터 여든 가까운 얼굴까지 걸려 있었다. 이 방을 보고 싶었던 이유가 있었다. 유성혜 작가의 『뭉크』에 나란히 실린 서른한 살의 「담배를 든 자화상」과 말년의 「시계와 침대 사이의 자화상」을 보고 나니, 그 사이의 얼굴들이 궁금했기 때문이다.


이 방의 벽에서 읽은 문구가 기억에 남는다. 자화상은 자기를 그리는 것인데도 남에게 보이고 싶은 모습으로 그린다는 말이었다. 뭉크도 젊을 때는 자신을 꾸며서 그렸지만, 나이가 들수록 꾸밈없이 있는 그대로를 그렸던 것 같다. 여기서 본 그림으로 그의 일생을 따라가 본다.


가장 먼저 본 것은 1882년에 그린 「자화상」이다. 열여덟 살 때다. 열일곱에 화가가 되기로 마음먹고, 이듬해 크로그에게 그림을 배우던 무렵에 그린 것이라고 한다. 뭉크의 키가 180cm가 넘었다고 하니, 가슴 윗부분만 그렸음에도 훤칠한 청년의 모습이 보이는 것 같다. 오늘 칼 요한스 거리에서 본 잘생긴 노르웨이 젊은이의 얼굴 그대로다. 오른쪽으로 노려보는 눈에서는 당당함이 느껴진다.

에드바르 뭉크, 「자화상」, 1882년, 뭉크 미술관




「여인의 가면 아래 자화상」은 1893년, 스물아홉 살의 그림이다. 「절규」를 그린 바로 그해다. 11년 전과 비교하면 머리숱이 많이 빠지고 조금 여위어 보인다.


그런데 자화상에 왜 여인의 가면을 그렸을까. 앞 장에서 적었듯이 뭉크가 베를린에서 지내며 다그니 율을 좋아하던 때가 이 무렵이다. 다그니가 뭉크의 친구와 결혼한 것도 그해였고, 「마돈나」는 그 이듬해에 나왔다. 좋아하던 사람을 떠나보내고도 그 얼굴 아래를 벗어나지 못하는 마음을 이렇게 그린 것은 아닐까. 그래서 그럴까, 열여덟 살 때 당당하던 그 눈이 여기서는 조금 우울해 보인다.

에드바르 뭉크, 「여인의 가면 아래 자화상」, 1893년, 뭉크 미술관




서른한 살과 마흔 살의 얼굴을 나란히 놓아 본다. 1895년의 「담배를 든 자화상」과 1904년의 「붓을 든 자화상」이다. 앞의 것은 이 미술관이 아니라 낮에 국립 박물관에서 보았다. 젊은 날의 뭉크가 멋있어서 한 번 더 싣는다. 둘 다 열여덟 살 「자화상」보다 얼굴은 작고 몸매가 좋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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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에드바르 뭉크, 「담배를 든 자화상」, 1895년, 노르웨이 국립 박물관 / 오른쪽: 에드바르 뭉크, 「붓을 든 자화상」, 1904년, 뭉크 미술관


왼쪽이 「담배를 든 자화상」이다. 서른을 갓 넘긴 나이에 벌써 중후한 신사 같다. 그렇게 보이고 싶어서 조금은 꾸며서 그린 듯하다.


오른쪽이 「붓을 든 자화상」이다. 화가로서의 모습을 당당히 내세우고 싶은 듯 붓 다발을 쥐고 서 있다. 툴라와의 총기 사고가 있고 2년 뒤인데도 그림에서는 그런 기색이 보이지 않는다. 다만 다친 왼손만은 포개어 보이지 않게 그린 것 같다. 마흔이지만 9년 전 왼쪽 그림과 또래 같다.




「포도주 병이 있는 자화상」에서는 분위기가 달라진다. 1906년, 마흔두 살 때 그린 그림이다. 붓을 쥐고 서 있던 2년 전과 달리 어깨가 축 처졌고, 걱정이 있는 듯도 하고 우울해 보이기도 하는 얼굴이다. 나는 왠지 그림 속 식당이 낮에 지나쳤던 그랜드 카페처럼 보였다. 저렇게 혼자 앉아 있으면 입센이 다가와 같이 한잔하자고 할 것만 같다.

에드바르 뭉크, 「포도주 병이 있는 자화상」, 1906년, 뭉크 미술관




그 뒤로는 30년을 훌쩍 건너뛰어 노인이 된 뭉크가 나온다. 1938년 무렵, 일흔네 살에 그린 「병들이 있는 자화상」이다. 병이 늘어선 탁자 뒤에 서 있는데, 얼굴은 붉고 눈은 푹 꺼졌다. 젊은 날의 자화상처럼 멋을 부린 데가 없고, 늙은 얼굴을 감추려고도 하지 않았다.

에드바르 뭉크, 「병들이 있는 자화상」, 1938년경, 뭉크 미술관




마지막은 「시계와 침대 사이의 자화상」이다. 1940년에서 1943년 사이, 일흔여섯에서 일흔아홉 살 때 그렸다. 뭉크가 세상을 떠난 것이 1944년 1월이니, 거의 마지막 얼굴이다.


큰 괘종시계와 침대 사이에 노인이 두 팔을 늘어뜨린 채 서 있다. 머리는 빠지고 다리에도 힘이 없어 보인다. 자신을 이렇게 솔직하게 그려도 되나 싶을 정도다. 가만히 보니 시계에는 바늘이 없다.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는 뜻일까.

에드바르 뭉크, 「시계와 침대 사이의 자화상」, 1940~1943년, 뭉크 미술관


지금까지 일곱 점의 자화상으로 뭉크의 일생을 들여다보았다. 열여덟 살의 당당함과 서른과 마흔의 멋스러움을 지나 일흔이 넘은 노인의 얼굴까지 보면서, 인생의 덧없음을 새삼 느꼈다. 자화상은 남에게 보이고 싶은 모습으로 그린다던 그 문구가 다시 떠올랐다. 뭉크는 나이가 들수록 보이고 싶은 것이 줄어든 모양이다.



죽음의 그림자


벽을 붉게 칠한 방에는 죽음을 그린 그림이 모여 있었다. 앞 장에서 적었듯이 뭉크는 어려서 어머니와 누나 소피에를 차례로 잃었다. 그 두 번의 죽음을 그는 평생 그렸다.


1893년, 스물아홉 살 때 그린 것이 「병실에서의 죽음」이다. 누나가 세상을 떠나던 날의 방인데, 정작 누나는 보이지 않는다. 등을 돌린 의자에 앉아 있어서 의자 등받이만 보인다. 가족은 한 방에 모여 있으면서도 서로 바라보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 누나가 떠난 것은 뭉크가 열세 살 때인데, 그림 속 형제들은 모두 어른의 모습이다. 누나는 그날에 멈춰 있는데, 남은 사람들은 그대로 나이를 먹은 것이다.

에드바르 뭉크, 「병실에서의 죽음」, 1893년, 뭉크 미술관




1897년에서 1899년 사이에는 「죽은 어머니와 아이」를 그렸다. 이번에는 누나가 아니라 어머니를 잃은 날이다. 어른들은 침대 뒤에서 저마다 고개를 돌리고 있고, 빨간 옷의 여자아이만 이쪽을 보고 서 있다. 누나 소피에라고 하는데, 「절규」 속 사람처럼 두 손으로 귀를 막고 눈을 크게 뜨고 있다. 이 그림을 그릴 때 뭉크는 서른 중반이었다. 30년이 지나도록 그날을 잊지 못한 것이다.

에드바르 뭉크, 「죽은 어머니와 아이」, 1897~1899년, 뭉크 미술관




1915년, 쉰한 살에 그린 「임종의 고통」 앞에서는 얼마 전에 읽은 민음사판 『페스트』의 표지가 떠올랐다. 표지 그림은 1895년, 서른한 살 때 그린 「임종의 자리에서」로 베르겐의 코데 미술관에 있다. 둘 다 누나 소피에의 마지막을 그린 그림이라고 한다. 아래 왼쪽이 1895년 것, 오른쪽이 1915년 것이다. 20년을 사이에 두고 그렸는데도 구도가 거의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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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에드바르 뭉크, 「임종의 자리에서」, 1895년, 베르겐 코데 미술관 / 오른쪽: 에드바르 뭉크, 「임종의 고통」, 1915년, 뭉크 미술관


침대에 누운 소녀는 두 그림 모두 머리만 보일 뿐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달라진 것은 벽과 눈이다. 「임종의 자리에서」에서는 붉기만 하던 벽이 20년 뒤 「임종의 고통」에 와서 한결 밝아지고, 군데군데 점이 찍혔다. 맨 오른쪽 여인도 앞 그림에서는 눈을 감고 있었는데, 뒤 그림에서는 눈을 떴다. 초점 없는 눈으로 어딘가를 멍하니 쳐다보는 듯하다.




마지막은 「아픈 아이」다. 스물한 살에 그렸던 그 그림을 뭉크는 예순세 살이던 1927년에 다시 그렸다. 아래 왼쪽이 낮에 국립 박물관에서 본 1885년에서 1886년 사이의 첫 그림, 오른쪽이 여기 뭉크 미술관의 1927년 그림이다. 나란히 놓고 보면 구도는 그대로다. 베개에 기댄 소녀는 창 쪽을 보고 있고, 곁에 앉은 여인은 고개를 푹 숙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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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에드바르 뭉크, 「아픈 아이」, 1885~1886년, 노르웨이 국립 박물관 / 오른쪽: 에드바르 뭉크, 「아픈 아이」, 1927년, 뭉크 미술관


왼쪽은 소녀의 얼굴 외에는 모든 것이 흐릿하다. 오른쪽은 머리카락이 주황색이고 밝은 빛이 들어오는 분위기다. 앞서 본 임종 그림도 그랬듯이 다시 그린 쪽이 두 번 다 환해졌다. 40년이 지나 같은 장면을 그렸는데, 흐릿하던 기억이 오히려 더 선명해진 듯하다.


왜 어머니와 누나의 죽음을 이렇게 오랫동안 그렸을까. 뭉크 자신도 마음의 병을 앓던 사람이다. 죽음의 그림을 되풀이해 그리면서 혼자 그리움을 달랜 것은 아닐까 싶다. 그 마음이 어땠을까 하고 보니 그림이 더 애처로웠다. 물론 내가 다 알 수야 없겠지만, 그 아픔을 함께 느끼며 그림을 보았다.


오슬로에 오기 전부터 뭉크에 대해 읽고 많이 준비해 온 것이 여기서 마무리되었다. 그의 일생을 아는 만큼 보았고, 때로는 나 혼자 이야기를 지어 가며 보기도 했다. 여기 다시 오기 어려울 것 같아 폐장 시간을 알릴 때까지 발걸음을 쉽게 떼지 못했다.


밤이 늦었지만 노르웨이의 마지막 일정이 남았다. 미술관 옆 오페라 하우스를 지나 다이크만 비에르비카 도서관으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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