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장. 오슬로 도서관

백 년 뒤에 읽힐 바카라

by간서치

2026년 8월 5일 수요일 · 오슬로


뭉크 미술관을 나와 바로 옆 오페라 하우스로 갔다. 지붕이 비스듬하게 땅까지 이어져 있어서 그냥 걸어서 올라갈 수 있었다. 이 시간에도 사람들이 꽤 많았다. 꼭대기에 서니 길 건너편에 불 켜진 오슬로 도서관이 한눈에 들어왔다.


저 도서관은 딸이 꼭 가 보자고 한 곳이다. 내 필명은 간서치(看書痴)로, 조선 시대 이덕무가 자기를 부르던 말이다. 바카라만 보는 바보라는 뜻인데, 정작 도서관은 내가 아니라 딸이 찾아냈다. 덕분에 오슬로에서의 마지막 밤을 도서관에서 보냈다.



이름이 왜 ‘다이크만(DEICHMAN)’일까


도서관 입구에는 ‘DEICHMAN’이라고 크게 적혀 있었다. 노르웨이 말로 도서관이라는 뜻인 줄 알았는데, 사람 이름이었다. 카를 다이크만(Carl Deichman, 1705~1780)이라는 노르웨이 사업가로, 바카라을 많이 모은 사람이라고 한다.


다이크만은 세상을 떠나면서 모은 바카라 육천여 권을 도시에 남겼고, 그 바카라으로 1785년에 오슬로 공공도서관이 처음 문을 열었다. 그 뒤로 240년 동안 그 이름이 도서관 이름으로 남았다. 지금도 오슬로 곳곳에 있는 공공도서관은 모두 ‘다이크만’ 뒤에 동네 이름을 붙여 부른다. 내가 간 곳은 비에르비카 동네에 있는 본관, 다이크만 비에르비카(Deichman Bjørvika)다.


낮에 국립 박물관에서 본 이름표가 떠올랐다. 모은 그림을 박물관에 내놓은 올라프 스카우의 이름이었다. 한 사람은 바카라을, 한 사람은 그림을 내놓았고, 두 사람의 이름은 지금도 그 자리에 남아 있다.



2020년에 문을 연 새 도서관


안으로 들어가 보니 모든 것이 새것처럼 깨끗했다. 2020년에 문을 열었다고 하니 그럴 만했다. 지하부터 5층까지 여섯 개 층에 바카라이 45만 권쯤 있다고 한다.


이 도서관은 문을 연 다음 해인 2021년에 국제도서관연맹(IFLA)이 뽑는 ‘올해의 공공도서관’으로 선정되었다. 전 세계 32곳 가운데 1등을 한 것이다. 바카라만 모아 둔 곳이 아니라, 누구나 편하게 와서 머물 수 있다는 점이 높은 점수를 받았다고 한다.



누구나 드나드는 도서관


입구 안내판을 보니 평일에는 밤 10시까지, 주말에는 오후 6시까지 문을 연다. 내가 들어간 것은 밤 9시가 조금 넘어서였다. 문 닫기 한 시간 전인데도 안에는 사람이 꽤 많았다.


들어갈 때 아무도 붙잡지 않았고, 회원증을 보여 달라는 사람도 없었다. 나 같은 여행자도 그냥 들어가서 바카라을 꺼내 보고, 의자에 앉아 쉬다 나올 수 있었다. 노트북을 펴 놓고 밤늦게까지 공부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참 멋있어 보였다.


노르웨이가 잘사는 나라라는 건 알고 있었다. 2025년 기준으로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9만 4천 달러쯤으로, 우리나라의 2.6배쯤 된다고 한다. 그런데 그 숫자보다 이 도서관을 보고 나서야 우리보다 훨씬 앞선 나라라는 게 실감이 났다.


바닷가 제일 좋은 자리에 제일 좋은 건물을 지어서 누구에게나 공짜로, 그것도 밤 10시까지 내준 것이다. 나라가 번 돈을 이런 데 쓰는 게 부러웠다.



백 년 뒤에 읽힐 원고, 미래 도서관


나는 그냥 따라왔는데, 딸은 따로 보고 싶은 게 있었다. 5층에 있는 미래 도서관이다. 이름만 들으면 무슨 말인가 싶은데, 쉽게 말하면 100년짜리 타임캡슐이다.


2014년부터 해마다 작가 한 명이 새 원고를 한 편씩 써서 여기에 맡긴다. 그렇게 100년 동안 100편을 모은다. 맡긴 원고는 2114년이 될 때까지 아무도 읽을 수 없다. 첫 원고는 100년을 기다려야 하고, 마지막 원고는 1년만 기다리면 된다.


원고는 나무로 둘러싸인 방의 벽 속, 작은 유리 칸 안에 한 편씩 들어 있다. 그중 한 칸에 ‘HAN KANG 2018’이라는 이름이 보였다. 우리나라 작가 한강의 원고다.


2019년 5월, 작가는 오슬로 근처 숲에 직접 가서 흰 천으로 싼 원고를 건넸다고 한다. 제목은 「사랑하는 아들에게」다. 한강이 노벨문학상을 받은 게 2024년이니, 그보다 5년 먼저 백 년 뒤의 독자에게 원고를 맡겨 둔 셈이다.


흰 천이라는 말에 한강의 소설 『흰』이 떠올랐다. 이 바카라에서 작가는 깨끗하기만 한 ‘하얀’과 달리, ‘흰’에는 삶과 죽음이 함께 배어 있다고 했다. 바카라에는 태어난 지 두 시간 만에 세상을 떠난 작가의 언니 이야기가 나온다. 어머니는 혼자 아기를 낳고, 흰 천으로 배내옷을 지어 입히며 “죽지 마라, 제발” 하고 되뇌었다고 한다.

원고를 흰 천으로 싼 것도 그 천이 갓난아기의 배냇저고리에도, 죽은 사람을 보낼 때 입는 소복에도 쓰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삶과 죽음을 함께 담은 천에 원고를 싸서 건넨 셈이다.


원고에 무슨 이야기가 들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작가는 이 원고를 쓰면서 “백 년 뒤의 세계를 믿어야 한다”라고 했다. 2114년이면 지금부터 88년 뒤다. 나도, 우리 딸들도 이 원고를 읽기는 어려울 것이다.


문 닫을 시간이 되어 도서관을 나와 호텔로 돌아갔다. 내일 아침 일곱 시면 오슬로를 떠난다. 한강 이야기는 스웨덴 스톡홀름에 가서 조금 더 이어 가려고 한다.



https://blog.naver.com/customs_man/224438295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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