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 저주의 글쓰기

Volcano

byHazel


스스로가 불쌍한 게 아니라 대단하다는 걸 인정해 준 다음은?

자기 연민의 늪에서는 한 발짝 나왔지만, 그 정도로 아직 그 인간들이 사랑스럽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여전히 그가 떠오르면 입에서 욕지거리가 삐져나온다.


뜨거운 용암 위로 연기와 화산재가 치솟는 건 당연한 일이다.

용암을 식히고 싶다면 연기를 내뿜어 온도를 낮춰야 한다.


욕이라는 건 어쩌면 내 안의 용암에서 나오는 연기가 아닐까 생각한다.

분을 삭히고 싶다면 이 연기를 막을 게 아니라, 더 열심히 뿜어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참지 말고 마구 욕을 내뱉을 수 있는 상황은 거의 없다.

누군가를 만나 제3자 욕을 해봤자, 부정적 에너지를 서로에게 전가할 뿐이다.

나를 아끼는 이라면 그 고통을 자신의 아픔처럼 느낄 것이고,

그저 그런 관계라면 자신이 감정 쓰레기통이 되었다고 느낄지 모른다.


그렇다고 듣는 이도 없이 혼자 욕을 하는 것도 쉽지 않다.

혼자서 중얼중얼해 보니 스스로가 정신병이 있는 것처럼 느껴져서 그 또한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음성이 아니더라도, 연기를 내보낼 좋은 방법이 있다.

바로 글이다!


나에게는 기억에 남는 날이나, 강렬하게 소망하는 것만 적는 다이어리가 있다.

좋은 것만 엄선해 적는 공간이었지만,

이 일만큼 강렬한 기억이라면 여기에 기록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되었다.


다이어리를 펼쳐서 내가 지금 (전)팀장을 향해 느끼는 날 것의 마음을 마구 써 내려갔다.

내가 쓰고도 다시 읽기 싫을 만큼 끔찍한 글이었다.

내가 페이지 위로 뿜어낸 화산재들은 그녀의 잘못과 나의 억울함 같은 내용이 아니라 그녀에 대한 저주와 인신공격이었다.

그녀의 신체적 단점을 비웃고, 알지 못하는 그녀의 개인사를 지어내 비난하고, 그리고 삶의 끝에 아무도 지켜보지 않는 곳에서 혼자 쓸쓸히 고독사해야 한다고 저주했다.


상식적인 슬롯인이 이런 수준으로까지 욕하기는 힘들다.

아무래도 체면도 있고 체통도 있으니까.

그래서 아무도 안 보는 나만의 비밀글은 속에 든 것 무엇이든 거침없이 뿜을 수 있는 안전한 분화구가 된다.


드라마 안나에서 그랬다.

사람들은 혼자 보는 일기장에도 거짓말을 한다고.

이 저주의 글을 쓰기 전까지는 나 역시 그랬다.

혼자 보는 다이어리에 좋은 것만 남기려고, 있었던 일을 솎아내고 선택적인 글을 썼다.

아무도 안 보는 곳에서 조차 혼자서 내 슬롯적인 입지를 어쩌고 하며 눈치를 본 것이다.


화를 가라앉히고자 하는 목적이라면 그런 눈치는 잠깐 내려놓자.

200%의 마음을 그냥 양껏 쏟아내자.

이러이러해서 저러저러하다는 논리 구조도, 근거도, 설명도 일절 필요 없다.

그냥 다 죽어버려. 우주가 폭발해서 전부 다 멸망해 버려.

이렇게 믿도 끝도 없이 나를 불행하게 만든 모든 것을 저주하자.


그렇게 활자 속에 쏟아붓고 나니 펑펑 울고 난 후 느껴질 법한 후련함과 함께 잠깐 꺼두었던 인지 능력이 돌아왔다.

그리고 쓴 글을 다시 읽으며 깜짝 놀라고 말았다.

엥? 왜 이렇게 오버했지? 그 정도 잘못은 아니지 않나?

나는 내 분노가 실제로 일어난 일에 비해 지나치게 크다는 걸 알아차렸다.


신기하게도 그와 동시에 곧 폭발할 듯 뜨거웠던 감정이 적당한 사이즈를 찾아 줄어들기 시작했다.

마그마에서 연기가 빠져나가듯 머리끝까지 가득 차있었던 분노가 적절한 온도로 식어갔다.


1) 스스로에게 감사하고, 2) 속에 든 감정을 분출한 후의 마음 상태는 이러했다.


그래 맞아. 정말 말도 안 되는 억울한 일을 겼었어.
그건 아무도 부정할 수 없어.
그런 일을 겪고도 이 자리까지 살아낸 내가 너무 대단해.
나에게 이런 짓을 벌인 그 여자는 쓰레기야.
평생 업보를 갚으며 외롭고 불행하게 살아가게 될 거야.
하지만 그녀는 더 이상 나에게 해를 끼칠 수 없어.
나는 이제 그녀로부터, 그 지독한 상황으로부터 안전해.


구멍이 숭숭 뚫린 현무암 덩어리가 여전히 마음 한 중간에 떡하니 남아 있지만, 더 이상 예전처럼 뜨겁지는 않다.

그날을 떠올리면 여전히 아프지만, 이제는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 흐르지는 않는다.


여기서 조금만 더 가면 정말 괜찮아질 것도 같다.

조금만. 조금만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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