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 빌런의 사정

Behind the Villain

byHazel


감정의 온도가 식고 나니, 자연스럽게 나를 망친 악당의 입장을 생각해 보게 되었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짓을 벌였을까?


나는 늘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면 안 된다는 신념에 동의해 왔다.


십 수년 전 극악무도한 범죄로 이슈가 된 김길태라는 사람이 있었다.

길에서 태어난 아이라서 이름이 길태가 되었다는 당시의 루머가 있었다. (※팩트 체크는 되지 않았다)

사람을 죽인 것은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이지만, 길에서 태어난 사람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살아가는 삶의 무게는 감히 상상할 수도 없었다.

그가 안정적인 양육 환경에서 올바르게 키워졌다면, 여전히 이와 같은 범죄를 저질렀을지 알 수 없는 일이다.

반대로 내가 그와 같은 환경 속에 자랐다면, 그처럼 행동하지 않았을 거라고 장담할 수도 없는 일이다.


이 이야기를 꺼내는 요지는, 가장 극악무도한 범죄자에게도 이렇다 할 사정은 있다는 것이다.


히스 레저 조커도 좋지만, 호아킨 피닉스의 조커를 좀 더 좋아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완성된 조커의 화려한 테러 라이프가 아니라 평범하던, 오히려 약자에 속하던 아서 플랙이 빌런이 될 수밖에 없었던 과거 서사가 더 흥미로웠다.

그는 어머니의 망상 속에서 정신적으로 학대받으며 자랐고, 그로 인해 감정과 상관없이 웃음을 참을 수 없는 발작적 웃음장애를 얻어 늘 폭력과 조롱의 대상이 되었다.

코미디언을 꿈꾸지만 아무도 그의 괴상한 유머코드에 웃어주지 않았고, 동료의 배신으로 그나마 생계 수단이었던 광대 일에서도 해고당한다.

같은 상황에 놓인 나라면, 뭐 대단히 성인군자가 되었을까?

누구든 그냥 다 죽이고 싶은 마음 상태가 되는 게 당연하지 않을까?


나를 잔인하게 해고한 팀장은 사실 김길태도, 조커도, 뭣도 아니다.

소소하게 사람 인생 하나 망쳐놓는, 이름 없는 잔챙이 악당일 뿐이다.

그런 그녀의 서사를 이해하는 일은 김길태나 조커의 서사를 이해하는 것보다는 가벼운 일이었다.


외국계인 전 회사는 주관적인 이유로 사람을 쉽게 자르는 곳이었다.

팀장이 나를 왜 해고하는지 두 가지 구체적인 사유를 들었었는데, 다시 봐도 기도 안 차는 내용이다.

해고 사유 1) 팀장이 팀원들의 아이디어를 취합해 달라 요청해서 취합을 해왔다. 근데 취합만 해왔기 때문에 해고를 결심했단다. 팀장은 취합 + 내용을 토대로 전략까지 짜오기를 기대했다고 한다. 처음부터 나에게 정확한 요청을 했으면 될 일인데, 제대로 디렉션도 안 해놓고 일방적으로 나에게 혼자 실망했단다.
해고 사유 2) 새로운 형태의 프로젝트에 들어가는데, 나는 B 프로세스가 맞다고 생각했지만 팀장은 A 프로세스를 고수하자고 했다. 팀장 말에 따라 A 프로세스로 진행하고 보니 B 프로세스로 하는 것이 더 적합한 케이스였다. 리뷰 미팅에서 팀장은 자기가 실수를 한 것 같다며 사과했고 그렇게 잘 마무리된 줄 알았다. 하지만 그녀는 그 당시 프로세스를 결정할 때 내가 끝까지 B로 가자고 자기를 설득했었어야 한다면서, 내가 경력에 비해 리더십 설득 능력이 떨어진다며 해고를 결심했단다.


요약하자면 이렇게 두 줄이다.

취합해 오라고 해서 취합만 해와서 잘림.

내 생각과 다르지만 팀장 의견에 따른 대가로 잘림.


세상에 이렇게 잘리는 사람이 있나? 바로 여기 있다!

그렇다면 반대로 이야기하면, 팀장 역시 언제든지 이런 억까로 해고당할 수 있는 입장이라는 것이다.

그녀 위로 리더십 레벨이 한 네다섯 개는 더 있으니까 그녀 역시 그냥 개미 목숨이다.


그런 전쟁터에서 자신의 오른팔을 자처하는 팀원 M은 팀장에게 큰 힘이었을 것이다.

조직 개편으로 그녀가 인력 감축 대상이 된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어떻게 해서든 M을 지키고 싶었을 것이다.

그리고 짧은 기간 동안 M을 지키기 위해 취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그녀가 할 수 있을 만한 직무를 하고 있는 다른 팀원들 중 한 명을 미리 내보내는 일이었을 것이다.

이로 인해 팀 분위기는 불신과 불안으로 가득 찼지만, 그만큼 밑에 M을 데리고 있는 것이 중요했을 것이다. 심지어 그녀가 곧 1년간 출산 휴가로 자리를 비운다고 해도 말이다.


누구든 머리가 날아갈 수 있는 전쟁통에서, 가장 아끼는 병사 한 명을 지키기 위해 덜 아끼는 병사를 고기 방패로 쓴 것은 그리 놀라운 결정은 아니다.

내 입장에서는 청천벽력 같아도 이해 못 할 행동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본인 역시 언제 날아오는 총알에 심장이 관통당할지 모르는 상황.

아무래도 내 결혼식 따윈 안중에 없었을 것이다.


그녀의 입장을 곱씹어 보니 어떤 면에서 안 됐다는 생각이 든다.

살고 싶어서 남을 죽이는 사람의 속이 뭐 마냥 편했을 리만은 없다.

모든 것을 잊고 남은 사람들끼리 하하호호하는 건 그저 내 상상이었을 뿐, 실제로 팀장과 남은 사람들의 회사 생활이 그다지 녹록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전해 듣기로는, 나로 인해 남은 팀원들 사이에 자기도 언제든지 저렇게 버려질 수 있다는 분위기가 번져서 예전 같은 동료애나 팀워크는 많이 사라졌다고 한다.

대신 모두가 내가 더 잘해요, 내가 더 아이디어 많아요 하면서 개인 대 개인의 생존 경쟁을 벌이고 있다고.


그런 소모적인 경쟁 한복판에 내가 놓이지 않았다는 사실마저도 한편으로는 감사한 일이다.

좀비 바이러스가 걷잡을 수 없이 퍼지는 세계관에서 마지막 생존자가 되어 버티는 것보다 먼저 좀비에 물려버리는 게 속 편한 것처럼, 아등바등 생명을 부지하기보다는 씬에서 먼저 퇴장하는 편이 나을 수도 있다.


이렇게 나의 빌런의 사정을 이해하고 나니, 그녀의 죄와 그녀라는 사람이 구분되기 시작했다.

불편한 분위기 속에 남은 생존자 그룹을 이끌어야 하는 팀장에게 약간의 비웃음을 섞어 파이팅!이라고 외쳐주고 싶어졌다.

그리고 이 모든 리스크를 감수한 팀장과 M이 제발 잘 먹고 잘 살았으면 하는 마음도 들었다.

나를 방패로 연명한 목숨, 못 버티면 의미가 없으니까 말이다.


오를 엄두도 못 내던 높은 산이었는데, 이제 슬슬 정상이 보이기 시작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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