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기나누기

부추

by서람


“그게 그 속으로 다 들어가요?”


벌려진 오이 속으로 양념한 소를 넣는 모습을 보며 내가 한 말이다. 어린 시절 막내였던 나는 어머니가 김치 담그는 장면을 옆에 쪼그리고 앉아 지켜보곤 했다. 그중 가장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던 김치가 바로 오이소박이였다.

오이소박이는 각종 재료를 버무리는 다른 김치 담그기와는 결이 달랐다. 절인 오이를 토막 내어 십자형 칼집을 내고 그 사이로 부추 양념을 꾹꾹 채워 넣는 독특한 풍경이었다. 잘 익은 오이소박이는 오이의 시원함과 부추의 알싸한 향이 조화롭게 어우러졌다. 아이의 까칠한 입맛조차 사로잡은 최고의 반찬이었다. 지금도 부추가 빠진 오이소박이는 상상하기 어렵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내가 놀랐던 것은 들어간 양념의 양이 아니었다. 어떻게 가느다란 풀떼기 같은 채소가 김치의 맛을 제대로 완성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세월이 흐른 뒤 부추가 지닌 진짜 가치를 알기 전까진 그랬다. 부추는 화려하진 않지만, 사람들은 이 소박한 채소가 원기를 북돋는다고 남다르게 여겼다. 특히 봄 부추는 향이 짙고 부드러워 ‘인삼·녹용과도 바꾸지 않는다’라는 옛말이 있을 만큼 귀하게 여겨졌다.

부추에는 유난히 별칭도 많다. 대표적인 것이 정구지(精久持)다. '부부의 정을 오래 지켜준다'라는 뜻이다. 양기를 북돋우는 기운을 그대로 드러낸 기양초(起陽草)라는 이름도 함께 전해진다.


사람들이 부추를 특별하게 여긴 이유는 단지 맛이나 효능 때문만은 아니다. 부추의 생존 자체도 놀랍기 때문이다. 부추는 잎을 잘라내도 뿌리만 살아 있으면 며칠 뒤 다시 푸른 잎을 밀어 올린다. 봄부터 가을까지 여러 차례 수확해도 끈질기게 새순을 내놓는다. 이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뿌리의 힘이다.

겨울 동안 뿌리에 저장해 둔 양분을 오롯이 쏟아부어 올린 첫물 부추는 그 생명력의 결정체다. 그리고 가을까지 잘리고 또 잘리면서도 다시 자기 잎을 내어준다. 그 사이 땅속에서는 눈에 보이지 않는 뿌리가 더욱 굵어지고 단단해진다.

뿌리가 자라면서 부추의 포기도 점차 커지고, 대체로 3년 차 전후에 생육이 가장 왕성하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 포기가 지나치게 빽빽해져 예전의 기운을 잃는다. 이때 포기를 캐내고 나누어 옮겨 심으면, 부추는 다시 새 기운을 되찾아 새 삶을 시작한다.


다시 일어나는 부추의 삶을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문득 지나온 내 삶의 궤적을 돌아보았다. 살다 보면 세상이라는 가위에 사정없이 밑동을 잘리는 듯한 순간을 만난다. 실패와 좌절, 혹은 이별이라는 가위질 앞에서 나는 다시는 푸른 잎을 틔우지 못할 것처럼 절망하곤 했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 텃밭의 부추를 바라보니, 나와는 달랐다. 잘림은 끝이 아니라, 뿌리에 남아 있던 힘을 드러내는 일이었다. 상처 입은 자리가 아물기도 전에 새순을 밀어 올리는 부추의 끈질김은, 어쩌면 내 안에 숨겨진 회복력의 다른 이름이었을지도 모른다.

더 중요한 지혜는 그다음에 있다. 부추가 그저 버티고 견디는 것만으로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어느 순간이 되면 부추는 더 자라려 애쓰기보다 나누고 자리를 옮긴다. 그것이 생존의 방식이다. 살기 위해 뿌리를 깊게 내리는 일만큼, 때로는 그 뿌리를 뽑아 포기를 나누는 결단도 필요하다는 사실을 일러주는 듯했다. 익숙함에 빠져 자신을 잃어가는 정체의 순간을 감지하고, 터전을 바꾸는 결단. 내가 부추에게 배운 포기나누기의 가르침이다.


그 옛날 좁은 오이 틈에 그 많던 부추 소를 꾹꾹 채워 넣으시던 어머니의 모습이 비로소 온전히 이해된다. 어머니는 이미 알고 계셨다. 자칫 밋밋할 수 있는 오이는 잘게 다진 부추로 채워질 때 비로소 깊은 맛을 낸다는 것을.

텃밭의 부추가 지금 자라고 있다. 겨울을 견디고, 잘림을 이겨내며, 결국 자신을 나누어 옮겨 심는 순환 속에서 얻은 그 힘이 느껴진다. 인생의 어느 시기에는 다시 일어나는 힘보다 더 필요한 것이 있다. 익숙한 자리를 떠나 자신을 새롭게 심는 용기다. 내 텃밭의 부추처럼.


부추는 마늘, 양파, 파, 달래와 같은 수선화과(科)이다. 공통 성분인 황화합물이 풍부하여 특유의 향으로 요리의 풍미를 올리고 기운을 북돋는다. 또한 부추 향은 농약을 대신할 만큼 강력하지는 않지만, 일부 해충의 접근을 방해하여 다른 작물과 함께 심는 동반식물로 활용하기도 한다.

한번 심으면 5~10년가량 수확할 수 있으며 늦여름에 흰 별 모양의 꽃이 핀다. 별미 요리로 부추전이 있고, 탕 요리에 올려 먹는 생부추도 구수함과 싱그러운 맛을 더해주는데, 오래 끓이면 향이 줄고 물러지므로 불 끄기 직전 잔열로 익힐 때 아삭하고 향긋하다.

목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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