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캐지 않은 것들

도라지

by서람


어린 시절 밥상에서 내 눈길을 유독 피하게 만들었던 나물 반찬이 있었다. 뽀얀 자태에 속아 집어 들었다가, 이내 입안 가득 퍼지는 강렬한 쓴맛에 온몸을 부르르 떨며 몰래 뱉어냈던 채소였다. 단 한 번의 경험만으로도 잊히지 않을 이름, 도라지다.


“몸에 좋은 것은 쓰단다. 건강해지려면 많이 먹어야지.”


어른들은 왜 그리 쓴 것을 억지로 먹으라고 하면서 이 말을 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씹혀서 터져 나온 도라지의 쓴 즙이 목구멍을 넘어갈 때의 그 거부감은 작은 시련이었다. 이를 잠재우려 물을 연거푸 들이켜게 했던 도라지. 지금도 또렷한 유년의 기억이다.


“도라지는 왜 이렇게 쓸까?”


어른이 된 지금도 장터에 수북이 쌓여있는 도라지를 볼 때면 이 질문이 입안에 맴돌곤 한다. 물론 하얗게 벗겨낸 뿌리를 소금으로 문질러 헹궈내면 거품과 함께 쓴맛이 조금은 빠져나온다. 그러나 뿌리 깊숙한 곳에 박힌 고유의 쓴맛까지는 끝내 지워지지 않는다.

도라지 특유의 지독한 쓴맛의 정체는 인삼의 쌉싸름한 맛과 마찬가지로 사포닌(Saponin)이라는 물질에서 나온다. 도라지가 외부의 공격으로 상처를 입으면, 몸속에 있던 사포닌이 방어물질로 그곳에 작용한다. 그렇게 생겨난 강한 쓴맛은 살아남기 위해 온몸으로 밀어낸 방어의 흔적이었다.

흥미로운 건 사포닌이 사람의 몸속으로 들어오면 전혀 다른 역할을 한다는 점이다. 기관지를 적시고 면역력을 높여주는 최고의 약(藥)으로 탈바꿈한다. 가장 처절했던 한 식물의 방어기제가 인간에게는 치유의 선물이 되는 자연의 묘한 역설이다.


나 역시 살아가는 동안 수많은 상처를 받았다. 다른 사람이 무심히 던진 말에 마음이 긁히기도 했고, 배신을 당하거나 예상치 못한 실패로 삶이 흔들리기도 했다. 그때 나도 도라지처럼 마음 깊은 곳에서 스스로 지키려 했다. 눈물도 흘렸고, 밤잠을 설치며 고민하고, 다짐을 담아 마음의 벽을 단단히 쌓아 올렸다. 그 과정은 지독하게 쓰고 아팠다. ‘왜 나에게만 이런 시련이 올까’라는 원망이 머릿속을 맴돌며 일상을 씁쓸하게 만들곤 했다.

세월이 흐른 지금, 그때의 나를 다시 돌아본다. 그리고 도라지를 떠올린다. 그 지독한 쓴맛을 품고 살아가는 도라지는, 내가 미처 보지 못한 또 다른 삶의 방식이 담겨 있었다. 도라지의 진짜 힘은 상처를 막아내는 사포닌에만 있지 않다. 그 쓴맛을 길러내는 뿌리의 시간 속에 더 깊은 생존의 지혜가 숨어 있다.

본래 도라지는 겨울이 되면 줄기와 잎을 모두 버리고 뿌리로 겨울을 나는 여러해살이풀이다. 추위를 견디기 위해 여름과 가을 동안 잎에서 만들어낸 양분을 뿌리에 저장한다. 그렇게 땅속에서 차곡차곡 응축된 3년, 5년, 10년의 세월이 때로는 도라지의 값어치가 된다.

나도 그럴까. 도라지가 오랜 세월을 견딜수록 값어치가 오르듯, 나도 견딘 시간만큼 깊어지는 걸까. 어릴 적에는 견디기조차 힘들었던 그 쓴맛을, 이제는 그 뒤에 숨은 깊고 은은한 향까지 음미하게 되었다. 변한 것은 도라지가 아니라, 그 맛을 받아들이는 나였는지도 모른다.

살아갈수록 단맛보다 쓴맛이 더 오래 마음에 남는다. 나를 깊게 만든 것은 달콤했던 날보다 끝내 견뎌낸 쓰디쓴 날들이었다. 지금 당장 나를 괴롭히는 삶의 쓴맛도 언젠가 내 삶의 깊이가 되어 있을 것이다.


가장 아팠던 자리에서 흘러나온 눈물이, 나를 가장 먼저 위로한다. 겨울마다 잎을 버리고 뿌리로만 남는 도라지처럼, 나도 올해 몇 번은 지나간 것들을 내려놓고 마음에서 지워냈다. 삶의 쓴맛에 몸서리치던 그 시간 동안, 내 안의 도라지 뿌리도 아래로 깊어지고 있었을까. 그 자리에서 지금 무엇이 자라고 있는지는 아직 캐보지 않아서 알 수가 없다.


도라지는 초롱꽃과(科), 도라지속(屬)에 속하며 세계적으로 단 한 종만 인정된다. 식탁에서는 반찬으로, 한의학에서는 ’길경‘이라는 약재로 기침과 가래를 완화하는데 널리 쓰이며(용각산의 주성분), 폐의 열을 다스린다.

오랜 세월 자란 야생 산도라지는 예로부터 산삼에 견줄 만큼 귀한 약초로 대접받았으나 서양에서는 관상용 화초로 알려졌다. 보라색 꽃이 피기 전 봉오리가 풍선처럼 부풀어 풍선꽃이라 불린다. 구전민요인 '도라지타령'이 널리 불린 것으로 보아, 도라지는 오랫동안 한국인의 맑고 순박한 정서를 담아낸 친숙한 채소였음을 알 수 있다.

목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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