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양왕, 김병연, 이양무, 엄흥도 그리고 단종을 만나다
“키클롭스여, 내 유명한 이름을 물으니 그대에게 말해주리다. 그러니 약속한 대로 내게 선물을 주시오, 내 이름은 우티스요.” *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에서 오디세우스가 식인 거인 폴리페모스를 속이기 위해 자신의 이름을 우티스, 즉 ‘Nobody(아무것도 아닌 자)‘라 칭하는 장면이다. 이후 오디세우스는 지략을 발휘하여 폴리페모스의 눈을 멀게 하고 양들 사이로 숨어서 탈출에 성공한다. 이에 고무된 오디세우스는 많은 부하들의 조언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이름을 말하는 도발을 한다. 이 장면은 오디세우스의 모험 중 가장 극적인 에피소드이자, 그가 귀향길에 기나긴 시련을 겪게 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유난히 더웠던 올해의 여름 막바지 폭염은 강원도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내리쬐는 햇빛과 높은 습도는 답사객의 발걸음을 무겁게 했다. 이번 답사는 강원 일원의 문화유산을 둘러보는 여정이지만, 실상은 '이름을 잃은 자'가 '이름을 되찾은 자'를 찾아가는 시간이었다. 이름을 잃은 자, 그리고 이름을 되찾은 자. 이름이란 단순히 사람을 부르기 위해 칭하는 것은 아니다. 그 속에는 견뎌낸 삶의 무게와 역사가 담겨 있다.
1박 2일 동안 우리 답사팀은 고려의 마지막 왕, 공양왕(삼척 공양왕릉), 방랑시인 김삿갓, 김병연(김삿갓의 묘), 충신 엄흥도(엄흥도의 묘), 비운의 어린 임금 단종(장릉), 그리고 조선 왕조의 정통성 확립의 근본이 되는 이양무(준경묘)를 방문하였다.
고려의 수도는 개경(개성)인데 고려왕릉이 왜 강원도에 있을까? 고려의 마지막 왕(제34대), 공양왕. 그는 조선의 개국 세력(신진사대부)에 의해 억지로 왕위에 올랐다가 폐위된 후 삼척 등지에서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하였다. 그와 그의 두 아들의 시신은 삼척 주민들에 의해 수습되어 묻은 곳이 현재의 삼척 공양왕릉이다. 왕으로서의 위상과 이름이 철저히 지워진 채 단지 ‘공양군(恭讓君)’이라는 비운의 존재로 남겨졌다. 이후 조선의 정치적 정통성 확립하고자 한 태종에 이르러 고려 왕조의 마지막 정통성을 지닌 왕으로 복권되며 역사 속에 자신의 이름을 다시 새길 수 있었다. 그리고 그의 시신을 경기도 고양으로 이장하여 왕릉의 격식으로 조성하게 되었고, 그곳이 현재의 고양 공양왕릉이다.
두 곳의 공양왕릉은 고려에서 조선으로 넘어가던 격변기에 마지막 왕이 겪어야 했던 비극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조선에 의해 정비된 고려왕릉(고양)과 민간에 의해 수습되고 기억되고 있는 고려왕릉(삼척). 어느 곳이 그의 진짜 안식처였을까?
언덕 위 양지바른 곳에 자리한 공양왕릉은 왕릉이라 하기엔 다소 빈약하나 왕릉이 위치한 언덕 아래 펼쳐진 너른 평야와 맞은편 기세 좋은 산의 풍광이 한 눈이 들어와 보기에도 좋은 기운을 가진 터라는 것이 느껴졌다. 4기의 봉분, 가장 큰 남쪽 봉분이 공양왕릉, 나머지 2기는 왕자(왕석, 왕우)의 묘, 그리고 나머지 1기는 시녀나 왕이 타던 말의 무덤(마총)으로 알려져 있다.
죽은 자의 마지막 안식처인 무덤이 있는 곳은 산자의 공간에서는 느낄 수 없는 호젓함과 시간이 멈춘 자리가 만드는 여백이 있다. 한여름의 열기와 강렬한 햇빛 아래 능 주변의 배롱나무 꽃은 더욱 붉다. 망국의 왕으로서 그가 겪었던 일은 어쩌면 당연하고 피할 수 없는 수난이었을 수 있다. 하지만, 신생국 조선에 의해 숨겨지고 잊힌 존재였지만 자신의 죽음으로 몰고 간 조선에 의해 다시 이름을 다시 찾은 것은 역사적 아이러니다.
준경묘(濬慶墓)까지 가는 길은 이번 답사 최대의 난코스였다. 주차장에서부터 준경묘까지 오르는 동안 한여름의 열기와 습도는 답사객의 몸과 마음을 지치게 하였다. 마침내 오르막의 숲길을 지나자 더없이 넓은 노지와 함께 멀리 홍살문이 보이고 준경묘가 있는 곳을 둘러싼 원시림의 울창한 아름드리 금강소나무 숲의 모습은 장관이었다. 그동안의 피로가 한순간에 사라지게 할 만큼 아름다운 숲이었다.
준경묘는 태조 이성계의 5대조이자 조선 왕실의 실질적 뿌리인 목조(穆祖) 이안사의 아버지, 이양무의 묘소이다. 이안사는 전주에서 관아와의 갈등으로 삼척으로 망명하여 터를 잡았다. 이때 부친인 이양무가 세상을 떠나자 미로면 활기리에 묘를 썼는데 이곳이 백두대간의 정기가 집결한 ‘백우금관(百牛金棺)’의 천하명당이었다고 한다. 이양무 사후 이안사 일가는 다시 함경도 동북면 의주로 터전을 옮기고 이 묘소는 수백 년간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 묘소의 위치조차 알 수 없었던 곳이었다고 한다. 대한제국 성립기인 광무 3년(1899)에 이르러 고종 황제에 의해 공식적으로 봉환되고 '준경묘(濬慶墓)'라는 묘호를 받게 되었다. 비로소 조선 왕실 500년 역사의 근원지이자 거룩한 공간으로 이름을 되찾게 되었다.
충효가 나라의 근본이었던 시대, 과거 시제(詩題)로 나온 역적 김익순을 비판하는 시를 써 장원급제한 뒤, 집으로 돌아와 어머니로부터 그 김익순이 자신의 친조부라는 사실을 전해 들었을 때 청년 김병연이 느꼈을 죄바카라감과 자괴감이 어떠했을까? 이후 그는 평생을 삿갓을 쓴 채 전국을 방랑했다. 그가 가졌던 슬롯적 신분과 본명을 버리고 스스로 ‘아무것도 아닌 자’가 되어 삿갓 속에 얼굴을 숨겼다. 하지만, 기존의 틀에서 벗어난 해학적이고 촌철살인 같은 민중시는 문학사에 있어 독보적인 방랑시인 ‘김삿갓(somebody)’라는 이름으로 기억되고 있다.
아아! 하늘과 땅 사이의 남아 가운데
나의 한평생을 알아줄 자 누가 있을까?
삼천리를 부평처럼 물에 떠 흘러 다닌 자취,
사십년을 함께 한 거문고와 글은 빈말일 뿐...
힘으로 이루기 어려운 청운은 소원 아니었고
오직 공평한 이치인 백발은 슬프지가 않구나.
귀향의 꿈에서 놀라 깨어 일어나 앉았더니
삼경에 월나라 새가 남쪽 가지에서 우는구나.
- 김삿갓 김병연의 <자탄(自歎)>
전국을 떠돌고 유랑하며 정형적인 한시의 틀을 깨고 한자의 음과 뜻을 이용해 때론 기득권(양반, 벼슬아치, 부자들)을 비꼬기도 하고, 자연을 벗 삼은 유랑자의 고독, 인생의 무상함, 세파의 서글픔을 많은 시로 남겼다. 그렇게 세상을 유랑하던 그는 1863년 전남 화순에서 숨을 거뒀다. 그의 둘째 아들 익균이 유해를 거둬 영월 마대산 자락으로 이장하여 현재의 위치에 조성하였다.
내리쬐는 햇빛 아래 잡풀은 더욱 푸르고 투박해 보이는 상석이 놓여 있었다. 묘비엔 다듬지 않은 자연석에 정갈하게 ‘詩仙 蘭皐 金炳淵之墓(시선 난고 김병연지묘)’라고 새겨져 있었다. 전국을 유랑하며 객지에서 생을 달리했기에 묘가 있을까 싶었는데 소박하나마 묘가 조성되고 인근에 <난고 김삿갓 문학관>이 있어 김병연의 문학세계와 삶을 만나볼 수 있었다.
2026년 올 한 해는 그의 이름으로 시작되었다. 1,600여만 명이라는 기록적인 관객을 동원했던 ‘왕과 사는 남자’ 영화로 영월, 단종 그리고 그의 이름은 ‘아무것도 아닌’에서 ‘누군가’로 세상 사람들에게 각인되었다. 충신 엄흥도. 단종이 삼촌인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영월에서 죽임을 당했을 때, “시신을 거두는 자는 삼족을 멸한다”는 서슬 퍼런 어명에도 불구하고 시신을 수습하고 장례를 치른 영월의 호장이었다. 그로 인해 그는 가족과 함께 세상에서 사라졌다. 후대 숙종, 영조대에 이르러 그의 의로운 행동이 재조명되면서 사육신과 비견되는 의인이자 충신으로 역사에 찬란하게 등장하였고 온 국민이 모두 기억하고 부르는 이름이 되었다.
충신 엄흥도를 만나는 길은 100여 개가 넘는 가파른 계단과 시작되었다. 땡볕아래 지치고 숨이 턱밑까지 차오를 즈음 충신 엄흥도의 묘를 참배할 수 있었다. 왕릉처럼 꾸며진 그의 묘를 바라보는 마음이 복잡했다. 최근 엄흥도의 묘를 둘러싸고 여러 이야기들이 있다. 엄홍도의 후손들은 영월, 군위, 울산 등 서로 다른 장소에 진짜 묘가 있다고 주장한다. 이에 학회에서도 관련 학술논문을 통해 논란에 가세하는 형국이다. 이러한 논쟁에 앞서 엄흥도를 떠올리면 생각나는 인물. 단종이다. 숙부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영월로 유배되어 17세의 어린 나이에 사사되었다. 이후 오랜 세월 잊힌 자, 지워진 자로 존재 자체가 부정되었다.
유학의 나라 조선에 있어 국왕은 단순한 국가의 최고 통치자를 넘어 하늘의 뜻(천명)을 받은 존재일 뿐 아니라 성리학적 도덕과 학문의 스승으로서 만백성을 가르치고 보살피는 어버이였다. 그러니 왕의 말 한마디는 곧 법(교서)이 되었으며 모든 제례와 국가 행사의 중심이자 근간이었다. 사후에도 그 영향력은 사라지지 않고 묘호와 시호를 올리고 종묘 배향을 통해 왕조의 신성함을 유지한다. 그러한 왕으로서의 지위를 물리적, 공간적으로 증명하고 연속케 하는 상징체는 바로 ‘능(陵)’이다.
단종의 복위와 더불어 그 상징인 ‘능’을 찾고 조성하는 일은 국가의 선결과제였다. 관리하지 않으면 몇 년만 지나도 흔적을 찾기 어려운 것이 무덤이다. 하물며 발각을 피하고자 봉분조차 제대로 만들지 못한 채 서둘러 매장된 무덤을, 사후 241년이 지난 시점에서 과연 어떻게 찾아낼 수 있었을까?
결국 엄흥도의 후손과 주민들의 전언을 바탕으로 묘소를 찾아내고 숙종 대에 노산군을 단종으로 복권하고 묘호를 올리고, 무덤의 지위 역시 노산군묘에서 장릉(莊陵)으로 승격되었다. 능이 완성되고 정통성이 확립하는 과정에서 사서에서 사라졌던 엄흥도의 충절이 재조명되고 그의 묘 역시 함께 정비, 복원되었다. 결국 단종이 있었기에 엄흥도가 있었고, 엄흥도가 있었기에 단종이 있었다.
장릉을 방문했을 때 우리 일행을 담당한 문화해설사로부터 단종, 엄흥도, 장릉, 그리고 또 한 명의 잊힌 이름, 단종의 왕비 정순왕후 송씨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남편을 잃고 홀로 긴 세월을 버터낸 비운의 인물로 그녀 역시 죽은 뒤 약 170년이 지나 단종 복위시 '정순(定順)'이라는 시호와 함께 복위되었다. 문화해설가가 해박한 역사지식을 바탕으로 완급조절을 하며 이야기를 풀어내는 것을 들으면서 바카라이나 글에서 접하는 산문과는 달리 사람으로 하여금 집중하게 하고 복잡한 관계를 재미있게 풀어나가는 구술 서사의 힘과 이야기를 전달하는 사람의 존재에 대해 경이로움을 느꼈다. 문화해설사의 ‘단종애사’에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져 푸르다 못해 시린 영월의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름이란 내가 누구인지에 대한 슬롯적 선언이다. 그 속엔 내가 지켜내야 할 명예와 바카라무, 그리고 삶의 시련을 겪으며 스스로 증명해 내는 정체성이다. 이번 답사는 '이름을 잃은 자'가 '이름을 되찾은 자'를 찾아가는 여정을 따라가는 것이었다. 공양왕, 김병연, 이양무, 단종, 그리고 엄흥도. 이들은 역사의 뒤안길에서 잊히고 때론 부인당했다가, 비로소 자기의 이름을 되찾은 존재들이다.
“키클롭스여, 필멸의 인간들 중 누군가 네 눈이 왜 흉측하게 멀었는지 묻거든, 네 눈을 완전히 멀게 한 이는 이타케에 집이 있는 라에르테스의 아들, 도시를 함락시키는 자 오디세우스라고 말해라.”*
오디세우스는 '스스로 이름을 밝히는 도발'을 감행했고 그로 인해 긴 세월 시련을 겪었다. 답사를 통해 만난 인물들은 '타의로' 이름을 잃었다가 '역사에 의해' 되찾았다. 역사에 새겨진 이름은 영원하다. 때론 영광스럽고 명예로운 일이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분명하다. 역사에 대한 바카라임이 어디까지인지는 저마다 의견이 다를 수 있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하다. 역사에 새겨진 이름은 지워지지 않는다. 영광이든 오욕이든, 이름이 기록되는 순간 그는 더이상 nobody일 수 없다. 역사를 통해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은 역사는 과거의 기록임과 동시에 현재 진행형이고 미래를 보는 거울이라는 사실이다.
나는 어떤 사람으로 기억될까? 기억되기는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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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메로스, <오디세이아> 박문제 옮김. 현대지성 20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