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 서악지구를 중심으로
1년에도 몇 번씩 방문하는 도시, 경주. 그럼에도 나는 경주를 제대로 알고 있나? 이미 천년의 세월을 하나의 국가로 번성하였고 신라 멸망 이후 다시 천년을 이어온 곳, 경주 어디든 소홀히 할 곳이 어디 있을까? 발을 딛고 있는 곳, 보는 것, 듣는 것, 느끼는 모든 것들이 천년의 신라, 다시 고려와 조선으로 이어온 천년의 문화를 고스란히 품고 있다.
매달 4주 차 토요일이면 몸이 먼저 반응한다. 오늘은 경주로 답사 가는 날! 우선 가까워서 마음이 편안하다. 그동안의 답사지가 부산과 거리가 있어 버스를 장시간 타는 불편함이 있었는데 그런 부담도 없고 답사 후 귀가시간도 여유가 있어 더욱 좋다. 이번 답사는 오전엔 서악지구 선도산을 중심으로 일대의 고분군, 성모사와 마애여래삼존입상, 그리고 선도산 등정이 예정되어 있다. 오후엔 천도교의 성지 용담정과 최제우 생가터, 도리마을, 정혜사지 13층석탑, 그리고 오늘 답사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는 독락당과 옥산서원이다. 특히, 서악지구의 경우 한 번도 제대로 둘러본 적이 없어 늘 방문리스트에 올려두고 있어서 이번 답사에 대한 기대가 컸다. 더구나 하반기 답사 선착순 신청에서 간발의 차이로 떨어졌는데 다행스럽게 결원이 생겨서 참석할 수 있어 더욱 기다렸었다.
45인승 버스를 꽉 채운 답사팀은 정시(7:00)에 출발했고 잠깐 잠이 든 것 같았는데 어느덧 태종무열왕릉 주차장에 도착했다. 이른 아침부터 열성적으로 답사 안내와 강의를 해주시는 소장님께는 죄송하지만 출발 후 1시간 동안은 몰려오는 졸음을 막을 수 없었다. 태종무열왕릉은 정말 오랜만에 왔다. 어릴 때 부모님과 함께 왔을 때 덩그러니 거대한 무덤 하나 있는 이곳을 왜 왔나 하는 생각이 들었었다. 그래서 몰래 무덤 위로 올라가 미끄럼 타고 내려오다 어른들께 혼났던 기억이 있다. 그때는 정말 무덤이 크고 웅장했는데 어른이 되어 보니 예전에 비해서는 조금 낮아진 느낌이다. 먼발치에서 보아도 잘 관리되고 있고 마침 벌초를 했는지 더욱 반듯하고 깨끗한 모습을 보였다.
태종무열왕릉을 뒤로하고 선도산 자락에 위치한 서악마을 초입에 들어서니 서악서원이 눈에 들어오고 그 뒤쪽으로 나지막한 한옥들이 골목을 따라 예쁘게 조성되어 있었다. 경주의 대표적인 거리로 알려진 향리단길의 관광지 분위기와는 다른 고즈넉한 분위기에 아직까지는 손을 덜 탄 숨겨진 마을 같았다. 서악서원에서 마을의 골목길을 거쳐 도봉서당에 도착하니 신라의 대형 고분군이 펼쳐져 있었는데 조선을 넘어 신라까지 시간여행을 하는 기분이 들었다. 옛날 조선 선비들에게 이 광경은 어떤 느낌으로 다가왔을지 궁금했다.
이곳 마을에서는 한옥체험도 가능한데 숙박지 이름이 이채롭다. 월암재, 서악서원, 도봉서당, 선도산 가는 길, 서악 가는 길, 왕릉 가는 길, 구절초 가는 길, 만송정 등 이름만 들어도 하룻밤 묵으며 신라와 조선의 향기를 마음껏 느껴보고 싶은 생각이 든다. 현재 우리나라에 여러 곳에 있는 한옥마을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이다. 전주 한옥마을이나 안동하회마을의 경우 주로 조선시대의 가옥, 문중 문화 중심이라면 서악마을은 조선 시대의 서원과 서당(서악서원과 도봉서당)과 신라시대의 고분군, 석탑(서악동 삼층석탑)이 한 울타리처럼 이어져 있었다.
법흥왕, 진흥왕, 진지왕, 문흥대왕 등의 능으로 추정되는 크고 작은 능이 선도산 자락 이곳저곳 구릉을 따라 둘러 싸여 있고, 아름드리 소나무들 사이에서 숨겨진 듯 드러나 신비롭고 아름다웠다. 신라의 왕릉이 현재 대릉원이 있는 평지에서 산지구릉으로 이동하는 단계를 보여주는 듯했다. 진흥왕릉을 뒤로하고 산길을 따라 선도산 정상으로 향했다. 390여 미터의 낮은 산임에도 제법 경사가 있어 아침 등산이 만만하지는 않았다.
숨이 차오를 무렵 성모사에 도착하니 거대한 마애여래삼존입상이 반갑게 우리를 맞이한다. 자연 암벽에 돋을새김으로 되어 있고 오랜 세월 풍화작용 등으로 손상이 꽤 진행되어 있으나 신라 대불의 웅장한 기상은 여전히 살아있었다. 본존불 양옆에는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이 모셔져 있었는데 본존불과는 달리 독립된 돌에 조각하여 배치되어 있고 온화한 미소와 입체감이 잘 드러나 있었다. 아침부터 지친 몸과 마음을 추스르고 마애여래삼존입상 앞에서 신라인의 마음으로 기도를 올리고, 관음보살의 온화한 미소를 한참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삼존불의 자애로운 시선을 따라 맞은편을 바라보니 회색빛 하늘아래 둘러싼 산아래 이제 막 가을의 문턱에 들어선 경주평야의 푸른빛이 옅어진 황금물결이 풍요롭고 평화로웠다.
선도산은 신라의 건국과 호국 신앙이 밀접하게 연관된 선도산 성모에 관한 여러 신화와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이는 선도산이 신라사람들에게 토함산과 더불어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경주 선도산의 성모설화는 신라 건국 신화와 관련된 사소가 중국 황제의 딸이라는 점에서 신라가 단순히 변방의 작은 나라가 아니라 중국과 연관된 중심국가라는 점을 드러낸 듯하여 이채롭다.
본래 중국 황실의 공주였던 사소는 신선술을 배워 바다를 건너 신라 땅에 정착을 했다. 그녀의 아버지가 솔개 발에 편지를 매어 날려 보내며 '솔개가 머무는 곳에 집을 짓고 살라'고 했는데 솔개가 멈춘 곳이 바로 경주의 선도산이라고 한다. 선도산에 정착한 성모는 신성한 아들을 낳았고 그 아이가 바로 신라의 첫 임금인 박혁거세라고 전해져 오고 있다. 신라 진평왕 시절엔 안흥사라는 절에 머물던 지혜라는 여승이 불전을 새로 수리하려 했으나 돈이 모자라 애를 태웠다. 어느 날 밤, 선도산의 신모가 꿈에 나타나 금을 시주하여 불전을 무사히 중창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져 온다. 또한, 신라 경명왕과 관련된 전설도 있는데 매사냥을 좋아했던 왕이 선도산 성모사당에 찾아가 매를 찾게 해 준다면 성모에게 작위를 봉해드리겠다고 기도했다. 기도가 끝나자마자 잃어버린 매가 날아왔다고 한다.
선도성모는 신라인에게 있어 나라를 지켜주는 신령스러운 수호신이자 지상에 내려온 신선(地仙)이었고 선도산을 최고의 명산으로 받들며 제사를 지냈다. 이렇듯 선도산과 이를 둘러싼 여러 유적(마애여래삼존입상 등)은 신라왕경을 수호하고 중생을 극락으로 인도하는 상징적 의미가 담고 있으며 신라 고유 신앙과 불교가 자연스럽게 융합된 의미 있는 유적이라 하겠다.
다시 발길을 돌려 선도산 정상으로 향했다. 마지막 오르막을 넘어 마침내 도착한 산 정상, '국립공원 선도산'의 정상 표지석이 우리를 반긴다. 산 정상이라고는 하나 주변 나무들이 빽빽하게 둘러 서 있어 산아래 풍광을 보기는 어려웠다. 그래도 아침 일찍 나선 답사객들은 다들 산 정상에 올랐다는 마음에 들떠 모두들 즐겁게 사진을 담는다. 이제 하산길, 그런데 오를 때와는 다른 풍경이고 곳곳의 모습이 생경하였다. 아마 오르는데 집중해서 그런지 주변을 둘러볼 여유가 없었던 탓인듯하다.
한참을 걸어 내려오니 출발지 고분군에 이르렀다. 고분군, 삼층석탑 그리고 도봉서당과 마을 아래 풍경이 아침에 산을 오를 때와는 달랐다. 신라, 통일신라, 조선의 시간여행을 하듯 발아래 펼쳐진 풍경은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아름답다. 가을 알리는 꽃무릇의 붉은빛이 더욱 붉었다. 긴 줄기 끝에 꽃만 달린 모습이 조화 같았다. 꽃말을 찾아보니 나라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는데 긍정적 의미뿐만 아니라 죽음과 연관 짓는 부정적인 의미도 많아 의외였다. 그중에서 '다시 만날 날을 기다림'이라는 뜻이 마음에 오래 남았다. 도봉서당의 굴뚝에서 피어오르는 연기와 함께 시골의 은은한 냄새가 고분군과 마을을 더욱 고즈넉하게 만들었다.
폐사지에 외롭게 서 있는 많은 탑들과는 달리 서악동 삼층석탑은 신라의 고분군과 조선의 서당 등 마을 사이에 자리하여 답사객의 마음을 여유롭고 안정감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주는 듯했다. 통일신라시대 모전탑 계열에 속하는 탑이라고는 하지만 분황사의 석탑과도 다르고 지난 답사 때 정암사에서 보았던 수마노탑과도 또 다른 느낌이다. 기단(基壇)은 직육면체의 커다란 돌덩이 8개를 2단으로 쌓은 독특한 형태로 이루어져 있었고, 그 위에 탑신부는 아래 기단에 비해 작고 날렵하였다. 또한, 각 층의 몸돌에 비하여 지붕돌이 커서 균형이 맞지 않고 둔중한 느낌을 주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래 기단이 크고 커다란 돌덩이로 기단을 쌓아서 그런지 전체적으로는 오히려 어울려서 독특한 매력을 지닌 탑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탑 주변엔 구절초가 심어져 있어 10월 중순쯤에 꽃으로 가득한 아름다운 풍경을 선사할 것으로 생각되었다.
버스에 탑승하기 전에 서악서원에 들렀다. 서악서원은 주로 공자 등과 같은 유학자를 모시는 다른 서원과는 달리 신라 삼국통일의 중심인물인 김유신 장군과 신라 학자인 최치원, 설총을 모신 서원이다. 조선 명종 때 문신인 이정(1512∼1571)이 경주부윤으로 부임했을 때 지방 유림과 뜻을 같이하여 명종 18년(1563)에 세웠다고 한다. 선도산 아래에 ‘서악정사’로 세운 것은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고 1602년 묘우, 1610년 강당과 동·서재를 새로 지었는데, 인조 원년(1623)에 국가가 인정한 사액서원으로 ‘서악’이라는 이름을 받았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에도 폐쇄되지 않고 살아남은 47개 서원 중 하나인데 아마 경주의 대표적인 위인을 모신 서원이라는 점이 반영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서악서원은 내부까지 둘러볼 계획은 없었는데 막상 둘러보니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문을 들어서니 영귀루가 위풍당당하게 서 있었고, 누각의 기둥 사이로 멀리 선도산도 보이고 강당인 시습당도 보였다. 영귀루를 지나 안쪽으로 들어서니 정면 강당을 중심으로 동재와 서재가 서로 마주 보는 전형적인 서원의 건축 배치가 나왔다. 한적한 분위기에 방문객을 편안하게 맞이하는 아름다운 서원이었다. ‘서악서원’이라는 현판은 흰색 바탕에 검은색 글씨로, 당시 명필인 원진해(元振海)가 쓴 것이라 한다. 마침 관계자가 계셔서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서원을 둘러본 뒤 오전 일정을 마쳤다.
점심식사를 위해 차량으로 이동하는 중에 서악서원의 강당 현판 '시습(時習)'의 의미를 생각해 보았다. ‘배우고 때때로 익힌다'는 뜻의 시습(時習)이라는 이름은 《논어(論語)》 〈학이편(學而篇)〉의 "학이시습지 불역열호(學而時習之 不亦說乎)"에서 유래한 것이다. 다른 곳에서도 본 기억이 났다. 도산서원에서였다. ‘시습재(時習齋)', ‘당(堂)'이 아닌 '재(齋)'자를 사용하였는데 시습재(時習齋) 현판은 퇴계 이황 선생의 친필 편액으로, 제자들이 머물며 학문에 정진하던 도산서당 동쪽 방에 걸려 있다. 잠을 잘 때도 깨어 있을 때에도 배움의 중요성을 잊지 않기를 바라는 옛 선인의 마음이 느껴졌다.
살면서 맞닥뜨리는 여러 문제들은 때론 많은 시련과 좌절을 주었다. 그래도 잘 극복하며 살아올 수 있었던 것은 독서와 경험, 그리고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나름 터득한 지혜 덕분이었다. 결국 '배움'의 결과였다. 배움의 길은 끝이 없다. 우리 답사팀의 최고령 회원은 여든을 훌쩍 넘었다. 그럼에도 만만하지 않은 답사길을 마다하지 않고 늘 몸과 마음을 정갈히 하며 배움의 가치를 실천하고 계시다. 사유의 외주화와 경험의 가치가 점점 줄어드는 시대에 여전히 시간과 비용을 들여 발품을 파는 답사의 길은 그래서 더욱 의미 있는 순례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