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힘든 건 부모 노릇이다. 만약 지수에게 아이가 없었다면 지수는 벌써 이혼을 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아마 결혼기간 5년을 못 넘기지 않았을까. 내가 뭐가 아쉬워서 너랑 사니. 번듯한 부모님과 형제가 있고 온라인 게임이 있는데 라면서. 그런데 지금은 아이가 있다. 사실 지수에게 지금 온라인 게임이 없는 것도 별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 남편들이 착각하는 게 있는데 그건 돈 벌어오는 본인 없이는 와이프는 못 살 거라는 것이다. 번듯한 온라인 게임이 없어도 돈은 벌 수 있다. 다만 그게 딱 아이들 챙겨야 되는 시간과 겹쳐서 못하는 것뿐이다. 아이가 스스로 옷을 입고 자기 손으로 밥을 먹고 학교를 갈 수 있다고 해서 부모의 역할이 축소되는 것은 아니다. 지수는 아이가 성인이 될 때까지는 따뜻한 밥을 차려주고,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들어주고 공감해 주는 시간만은 지키고 싶다. 경제적인 희생이 있더라도 그것만은 꼭 아이들에게 해주고 싶은 일이다. 그래서 남편에게 돈 못 버는 아내라는 핀잔을 들어도 참는다.
허 부장의 막말 사건 이후로 지수는 그의 얼굴을 마주하고 싶지도, 말을 섞고 싶지 않다. 그런데 집에 아이들이 있으니 일상을 유지해야 한다. 식탁에 앉아 밥을 먹는 엄마 아빠가 서로 말을 하지 않으니 아이들도 부모의 이상한 기류를 감지한다. 지수는 아이들에게 부모의 불편한 감정을 들키고 싶진 않지만 이 정도는 어쩔 수가 없다. 그래도 지수의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아이들 앞에서 허 부장이 큰 소리 내며 난리 치는 꼴은 막았으니. 지수는 허 부장의 출근길을 라이드 해주며 차 안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도 조용하다. 지수는 허 부장이 빨리 본인의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기를 바라고 있다. 그런데 그는 그럴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그가 사과할 때까지 지수는 절대 눈길을 주지 않겠다는 다짐을 한다. 그렇게 일주일이 지났다.
'뭐지? 이 인간 도대체 사람 맞아? 그런 잔인한 언어 폭행을 하고도 사과를 안 한다고?'
세상 모든 온라인 게임인들은 가슴속에 사표를 품고 살고 세상 모든 와이프들은 가슴속에 이혼을 품고 산다. 그런데 부부 인연은 참 요상하다. 그 관계는 절대 합리적이고 이성적일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야만 그 연이 유지가 된다. 함께한 겹겹의 시간이, 그 시간 동안 쌓아 온 무언가가 그 둘을 꼭 묶어 놓은 것 같다. 구글 포토는 지수에게 매일 아침 '그때 그 시절'의 사진을 보내주며 허 부장과 헤어질 자신이 있는지를 물어본다. 같이 산 세월이 10년이 훌쩍 넘으니 허 부장의 잘못은 괘씸하지만 그에게 연민 또한 느껴지는 것이 사실이다.
약간의 후덥 한 공기가 남아있는 선선한 저녁에 허 부장과 지수가 산바카라을 나간다. 일주일 간 말을 하지 않았더니 좀 어색하다.
"당신, 왜 나한테 사과 안 하는 거야?"
"사과는 무슨. 내가 밖에서 힘들게 돈 벌어 오는데 그런 일로 굳이 사과를 해야 돼?"
"그게 밖에서 돈을 벌고 안 벌고 와 무슨 상관인 건데? 잘못을 했으면 사과를 해야 하는 거야. 그 말 한마디가 그렇게 힘들어?"
"...."
"당신이 내키지 않는데 내가 사과를 계속 요구할 수는 없지. 그런데 다음부터는 꼭 사과를 해줬으면 좋겠어. 나는 당신의 막말에 정말 힘들어."
허 부장은 아무 말하지 않았지만 지수는 그가 알아듣었기를 바란다. 그리고 지금처럼 보폭이 맞지 않아 서로에게 짜증이 나고 화가 날 때가 있지만 이 시간을 잘 통과하기를 바란다.
애미 노릇, 와이프 노릇 참 힘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