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수는 어렸을 때부터 대도시의 커리어 우먼의 이미지를 동경하고 또 그렇게 살아왔다. 섹스 앤 더 시티에 나오는 주인공들처럼 살고 싶었다. 빽빽한 빌딩 숲에서 늘씬한 몸에 명품을 휘감으며 테이크 아웃 커피를 한 손에 들고 출근하는 모습. 그것이 지수의 로망이었다. 뉴욕까진 진출을 못했지만 지수는 나름대로 20대를 서울에서 비슷한 그림으로 살았다. 그리고 그 삶을 더 넓은 곳으로 확장시키려다 그만 고꾸라졌다.
언제부터인가 서울은 지수에게 불편한 곳이 되었다. 빌딩 숲은 숨이 막히고 아파트는 층간 소음에 항상 예민해져 있다. 내가 피해를 봐서도 안되지만 내가 누군가에게 피해를 줄까 봐 늘 신경이 쓰인다. 온라인 게임을 다닐 때에는 온라인 게임 동료가 이웃이자 친구였는데, 온라인 게임을 그만두니 이웃도 없고 친구도 없어졌다. 아파트에 수십 년을 살아도 이웃과 마주치면 목례만 하고, 반가운 안부인사 조차 하지 않는다. 커피숍에서도 상점에서도 짜인 매뉴얼대로 교육받은 아르바이트생들의 로봇 같은 음성을 들어야 한다. 이사 온 동네에서도 사람을 사귀기가 참 어렵다. 몇 세대 안 되는 곳임에도 서로 마주치면 못 본 척 땅만 보고 다닌다. 지수의 밑에 층에 사는 세대는 주차장에서 마주치면 엘리베이터를 같이 타기 뭐 한 지, 주차를 하고 나서도 차에 내리지 않는다. 그래서 이사 온 지 반년이 되었어도 한 번도 인사를 해 본 적이 없다. 또 1층의 어느 세대는 지수가 이사 온 지 한 달쯤 되었을까 일요일 오전에 초인종을 눌렀다. 혹시나 인사하러 오셨나 하는 반가운 마음이 들 찰날에,
"최근에 이사 오셨죠? 그쪽이 이사 오고 나서부터 재활용 수거가 제대로 안 되는 것 같아서 올라왔어요. 지금도 제가 재활용장 갔다 오는 길인데 음식물 쓰레기가 흐른 자국이 보여서 제가 닦았거든요. 재활용 제대로 하고 계신 거 맞나요?"
지수는 기가 막혔지만 이웃 주민과의 첫 만남이니 최대한 감정을 조절한다.
"저희는 박스에 테이프는 모두 제거하고 접어서 배출하고 있고요, 플라스틱은 오염된 것이 없는 것만 내놓고 있어요. 라벨도 제거하고요. 제가 성격 상 지저분하거나 냄새나는 건 잘 못 참아서 신경 써서 배출하고 있습니다. 의심되시면 들어오셔서 저희 집 재활용 통 확인해 보셔도 돼요."
이웃은 그 말에 좀 누그러졌는지, 재활용에 대한 다른 세대의 험담을 늘어놓는다. 사람들이 참 사는 게 가지각색이라며 쓰레기 버리는 걸 보면 그 사람의 인간성이 보인다는 둥. 지수는 아직 얼굴도 제대로 못 본 이웃들에 대한 험담을 들으니 기분이 좋지 않다. 서울에 사람은 미어터지는데 정작 사람의 온기가 없어진 느낌이다. 모두들 손해 보지 않으려고 눈에 불을 켜고 산다. 매년 최고가를 경신하는 아파트를 사기 위해 앞만 보고 뛰어가고, 대화 대신 법부터 운운하며 자기 것을 지키려 애쓴다. 그런데 40년 넘게 살다 보니 내가 손해 안 보고 살 수 없고 또 운 좋게 좋은 일을 만나는 날도 있다. 지수는 이 대도시에서 사람들의 마음이 과연 따뜻해질 수 있을까 싶다. 그러면 힘들어도 좀 더 사는 맛이 날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