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한 밤의 비누 대첩

by무 지 개

허 부장을 말할 것 같으면 그는 자기 멋에 사는 사람이다. 보통의 남자들이 '나 정도면 괜찮지'와 같은 내적 자신감이 있다면, 허 부장은 그것을 넘어선 '나야 나, 나 몰라?'와 같은 자아도취급 이랄까. 그는 본인만의 미의 기준이 있는 사람이다. 그의 심미안과 예술적 감각은 그를 다른 누구도 아닌 허 부장으로 정의하게 한다. 영포티와 같은 동년배와는 다른 부류인 것이다. 남들이 보면 매우 멋잇는 사람이지만 같이 살기엔 매우 피곤한 사람이다. 예를 들면, 그는 집 안의 가전 제품의 선이 보이는 꼴을 못 보는 사람이다. 티비든, 청소기든, 냉장고든 콘센트에 연결하는 선이 보여지기 마련인데 그 선이 집안의 컬러와 '맞지' 않는다거나, 지저분해 보인다는 이유로 선을 감추는 사람이다. 허 부장이 모든 공간을 본인의 미적 기준에 맞춰 정리하고 꾸미다보니 지수는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집에서 가장 오랜 시간을 보내는 사람도 지수이고 살림을 하는 사람도 지수인데 집 안의 모든 것이 허 부장 맞춤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지수는 공간의 전체적 컨셉이나 가구 디자인에 대한 그녀의 취향은 포기할 수 있었지만, 물건을 놓는 위치와 공간 정리에 대해서는 포기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집 안 살림은 그녀의 역할이니까. 허 부장의 심미안은 화장실의 모든 소품에까지도 적용되었다. 수건은 물론이거니와 휴지통, 변기 솔까지도 그의 엄격한 미적 기준을 통과해야 했다. 다이소와 같은 곳에서 사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녀 마음대로 샀다간 어떤 날벼락이 떨어질지 모르는 일이다.


어느 날, 지수는 생필품을 사다가 문득 화장실에 비누가 필요하다는 것이 생각났다. 마트에서 물건을 고르다 곧바로 비누 섹션으로 갔다. 보기만해도 향기로운 비누들을 구경하다가 '아이 깨끗해'의 베이비 파우더 향이 눈에 띄었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 자주 사용했던 거품형 비누였다. 그 비누만 보면 지수는 아이들이 아가였을 때 화장실에서 손을 씼는 장면이 생각났다. 키가 작아서 유아용 계단을 가져다 놓고 그 위에 까치발로 서서 비누 통을 누르던 그 조그맣고 귀여운 손. 부드러운 거품이 손에 닿으면 아기 손을 만지는 것 처럼 기분이 몽글몽글했다. 향도 얼마나 아가스러웠던지! 지수는 아이 깨끗해 비누를 장바구니에 넣었다. 남편의 반응이 걱정되었지만 이 정도는 그녀 마음대로 해도 되지 않나 싶었다. 집에 돌아 온 지수는 아이 깨끗해 비누를 화장실 세면대에 올려 놓았다. 비누통을 누를 때마다 나오는 새하얀 거품이 지수를 기분 좋게 했다. 다행히 허 부장도 별 말 하지 않는 눈치였다.


며칠 후, 지수는 세면대의 비누 통이 바뀌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세련된 비누의 정석인 Aesop 비누 통이 올려져 있었다. 비누 펌프를 눌러보니 비눗 물이 '찍'하고 날아왔다.

"아아악!!"

비눗 물이 지수의 옷에 달려들자 지수는 성질이 확 났다. 허 부장이 '아이 깨끗해' 비누 통에서 비눗물만 Aesop 통으로 옮겨 담은 것이었다. 거품형 비누와 액상형 비누는 텍스쳐가 달라서 각각에 맞는 통에 넣어야 하거늘, 허 부장은 그걸 몰랐던 것이다. 지수는 당장 허 부장에게 전화해서 따지고 싶은 심정이었으나 이사 후 스트레스로 모두 예민한 상태였기 때문에 결과가 좋지 않을 것을 예상하고 참기로 했다. 그러나 화장실에서 손을 씼을 때마다 '찍찍찍' 발사 되는 비눗물이 지수에게 싸울 것이냐, 참을 것이냐를 끊임없이 물어보았다.


그러던 한밤 중, 일이 터지고야 말았다. 자다가 볼일을 보러 화장실에 간 지수는 물을 내리고 어김없이 세면대에서 손을 씻기 위해 비누 펌프를 눌렀다. 그러자 비눗 물이 또 '찍'하고 날아왔다. 지수의 잠옷에 총알을 발사한 비누 통을 지수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지수는 화장실을 나와 자고있던 허 부장을 흔들어 깨웠다.

"자기야, 좀 일어나봐"

"으으으응...? 왜?"

"당신 비누통 왜 바꾼거야?"

"으으으음..뭐라는거야..."

자고 있던 허 부장은 뜬금없는 지수의 비누통 이야기에 이게 현실인지 꿈인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아니, 나는 원래 거품형 비누를 좋아한다고! 거.품.형. 비누!! 그래서 내가 일부러 아이 깨끗해 비누를 사다 놓은건데 그걸 왜 바꿔놔? 비누가 자꾸 찍찍찍 나와서 옷에 묻잖아!"

그러자 허 부장은 눈도 못 뜬 상태에서 어눌하게 한 마디를 날렸다.

"으으응...그러면 비누를 흔들어서 써. 그럼 거품 나오잖아...."

"......???"

이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인지. 지수는 어이가 없어서 빵 하고 터졌다. 웃음이 터진게 어이가 없는데 이상하게 계속 웃음이 나왔다. 지수는 본인이 그간의 스트레스로 정신이 살짝 이상해진건 아닌지 의심이 되었으나 그래도 어쩌랴. 황당한 상황에서 웃음 꽃이 피었으니. 그리고 며칠 후, 세면대 비누통은 다시 '아이 깨끗해'로 돌아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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