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종 정치와 임꺽정 ㅡ궁궐에서는 권력을 다투고 백성들은 도적을 도왔다
초롱초롱 박철홍의 조선사도 흐른다! 54
ㅡ 명종 정치와 임꺽정 ㅡ
(궁궐에서는 권력을 다투고 백성들은 도적을 도왔다)
앞 편에서는 '문정왕후' 여인천하, 을사사화, 그리고 '윤원형'과 '정난정' 이야기를 살펴보았다.
그렇다면 이 시기 조선국왕이었던 '명종'은 무엇을 했을까?
명종은 조선 역사에서 존재감이 약한 왕 가운데 한 사람이다.
어머니 문정왕후의 권력이 너무 막강했기 때문이다.
1545년 '인종'이 갑자기 죽자 열두 살 경원대군이 왕위에 올랐다. 그가 바로 명종이다. 어린 명종을 대신해 어머니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시작했다. 문정왕후는 동생 윤원형을 중심으로 한 '소윤' 세력에게 권력을 맡겼고, '을사사화'와 '정미사화'를 거치면서 반대 세력을 대거 숙청했다.
명종은 이런 모습을 지켜보면서 성장했다. 그렇다고 명종이 어머니 말만 듣는 순하기만 한 왕이었을까?
실록을 살펴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다.
명종은 1553년부터 직접 정치를 시작했다. 그리고 자신 외삼촌 윤원형 권력이 지나치게 커지자 이를 견제하려고 했다.
명종이 선택한 인물이 '이량'이었다. 이량은 명종 왕비인 '인순왕후'와 인척 관계에 있는 인물이었다. 명종은 이량을 등용해 윤원형 권력을 견제하고 자신의 정치적 기반을 마련하려 했다. 그러나 결과는 좋지 않았다.
이량 역시 권력을 잡자 자신의 세력을 형성하고 반대파를 탄압하기 시작했다. 결국 윤원형을 견제하려고 새로운 인물을 등용했다가 또 다른 외척 권력을 키워준 셈이 되었다.
당시에는 윤원형, 이량, 심통원을 가리켜 삼흉이라고 부를 정도로 외척 전횡이 심했다.
명종으로서는 참 답답했을 것이다. 어머니 문정왕후는 수렴청정을 끝낸 뒤에도 정치에 영향력을 행사했고, 외삼촌 윤원형은 조정의 막강한 실권자였다. 명종이 독자적으로 정치를 하려면 이들의 권력을 약화시켜야 했다. 그러나 그렇게 하기도 쉽지 않았다. 왕권을 강화하려다 오히려 새로운 외척을 키우는 악순환이 반복되었다. 그렇다고 명종이 아무런 정치적 의지도 없는 왕이었다고 평가해서는 안 될 것이다.
명종은 '사가독서제'를 통해 학문을 장려하고 '사액서원'을 제도화해 사림의 학문 활동을 지원하기도 했다.
'사가독서제'(賜暇讀書制)란
나라에서 젊고 유능한 관리에게 휴가를 주어 학문과 독서에 전념하도록 한 제도이다. 세종 때 처음 실시되었다.
'사액서원'은 왕이 서원에 이름을 지어 현판을 내려주고 국가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한 서원을 말한다. 명종 1550년 경북 영주 '백운동서원'이 '소수서원'이라는 사액을 받았다.
이처럼 왕권을 강화하고 인재를 등용하려는 노력도 있었다.
다만 그 성과가 외척권력 전횡을 극복할 만큼 크지는 못했다.
여기서 나는 한 가지 생각을 하게 된다.
'명종은 정치적 능력이 부족했던 왕이었을까? 아니면 너무 강력한 어머니와 외척세력을 만났던 불운한 왕이었을까?'
아마 두 가지 측면을 모두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명종 시대에는 궁궐 내부의 권력투쟁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나라 밖에서도 심각한 위기가 발생했다.
바로 1555년 '을묘왜변'이다.
을묘왜변은 임진왜란에 비해 많이 알려지지 않은 사건이다. 그러나 전라도 해안 지역에서는 상당한 피해가 발생했다. 이 사건을 이해하려면 당시 조선과 일본의 관계부터 살펴봐야 한다.
조선은 건국 이후 일본과 교역을 허용하면서도 왜구 약탈을 막기 위해 여러 제한을 두었다. 특히 부산포, 제포, 염포 등 삼포를 통해 제한적인 무역을 허용했다.
그러나 1510년 '삼포왜란'이 일어나면서 조선과 일본 관계는 크게 악화되었다. 이후 조선은 일본인 왕래와 교역을 더욱 엄격하게 통제했다. 그런데 이러한 조치에 불만을 품은 왜구들이 다시 대규모로 침입한 것이다.
1555년 5월, 왜구들이 수십 척 배를 이끌고 전라도 해안에 나타났다. 이들은 해남과 영암 일대로 침입해 '달량성'을 함락시키고 진도와 장흥 등지로 세력을 확대했다. 당시 조선의 해안 방어체계는 허술한 점이 많았다.
왜구들은 이를 틈타 여러 지역을 공격하고 백성들의 재물을 약탈했다. 달량성이 함락되자 조정은 큰 충격을 받았다.
왜구가 단순히 해안 마을 몇 곳을 약탈하는 수준을 넘어 조선의 군사적 방어체계를 위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정에서는 '이준경' 등을 보내 대응하게 했다. 조선군은 영암 등지에서 반격에 나섰고 결국 왜구를 물리쳤다. 이 과정에서 지방군사들이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던 문제와 지휘체계 허점도 드러났다. 을묘왜변은 이후 조선의 국방정바카라에도 영향을 미쳤다.
특히 군사문제를 논의하던 '비변사' 기능이 강화되고 상설 기구로 자리 잡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비변사는 임진왜란 이후 조선의 정치까지 좌우하는 막강한 기구로 성장한다. 그러나 을묘왜변 당시에는 국방상 위기에 대응하기 위한 기구라는 성격이 강했다.
이처럼 명종 시대에는 외부침략과 내부의 정치적 혼란이 겹쳤다.
그런데 더욱 심각했던 것은 백성들 삶이었다. 잦은 흉년과 관리들 수탈, 외척세력 권력남용으로 민심이 크게 악화되었다.
그리고 바로 이 무렵 조선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도적 가운데 한 사람이 등장한다.
'임꺽정'이다.
임꺽정은 실제 역사에 등장하는 인물이다. 홍길동이나 전우치처럼 소설과 민간전승을 통해 널리 알려졌지만, 임꺽정은 '명종실록'에도 그 활동이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실록에 등장하는 임꺽정과 소설 속 임꺽정은 상당히 다르다.
중국의 '삼국지연의'처럼 소설 속 인물이 실제 역사적 인물 모습을 대신해 우리 기억에 자리 잡은 대표적인 경우이다.
오늘날 우리가 기억하는 임꺽정도 대부분 일제강점기 홍명희가 쓴 대하소설 '임꺽정' 속 모습이다.
그렇다고 홍명희가 아무런 근거 없이 만들어낸 이야기는 아니다. 임꺽정에 관한 민간전승과 야사, 역사적 기록을 바탕으로 작가의 상상력이 더해진 작품이다.
오랜 세월 민간에 전해오는 과정에서 이야기가 많이 부풀려졌을 수는 있지만, 그 속에도 어느 정도 역사적 사실이 담겨 있을 것이다. 다만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부터가 소설적 상상인지는 구분하기 어렵다. 실제 '명종실록'에 등장하는 임꺽정은 우리가 알고 있는 의적과는 거리가 멀다.
관리를 살해하고 민가를 약탈했으며, 자신을 고발하거나 관군에 협조한 백성들에게는 잔인하게 보복하기도 했다. 마지막에는 관군의 추격을 받다가 붙잡혀 처형되었다. 그런 기록만 놓고 보면 임꺽정을 '민중의 영웅'이라고 부르기는 어렵다.
물론 실록은 왕조 공식기록이다. 조선 지배질서에 도전한 임꺽정을 조정에서는 흉악한 도적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실록에 기록된 임꺽정 잔혹한 행위까지 모두 지배층 왜곡이라고 치부할 수는 없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명종실록에는 임꺽정 출현을 전혀 다른 시각에서 바라본 사관의 평가가 남아 있다.
그 사관은 재상들 탐욕과 수령들 가혹한 수탈 때문에 백성들이 살아갈 길을 잃었다고 지적하면서 이렇게 기록했다.
'그들이 도둑이 된 것은 왕정의 잘못이지 그들의 죄가 아니다.'
참으로 의미심장한 기록이다.
임꺽정이 저지른 범죄는 범죄대로 평가해야 한다. 그러나 그처럼 큰 도적 무리가 나타나고 수많은 백성이 그들에게 가담하게 된 까닭은 따로 살펴봐야 한다.
임꺽정 한 사람만 처벌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후에도 장길산 등 여러 의적들이 나타났다.
그런 임꺽정을 만들어낸 조선슬롯 자체에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주의 깊게 봐야 할 대목이다.
내가 쓴 역사소설 <홍길동을 찾아서>에서도 임꺽정이 잠깐 등장한다. 백정 출신 '임강쇠'의 아들로 태어나는데, '전우치'가 아무 걱정 없는 세상을 살아가라는 뜻에서 장난스럽게 지어준 이름이다. 내 소설 속 창작이다.
홍길동도 '연산군일기'에 등장하는 실존인물이다.
'전우치' 역시 실존 인물로 알려져 있지만, 실록이 아닌 '어우야담'과 '지봉유설' 등 여러 문헌과 민간전승을 통해 그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처럼 홍길동은 연산군 시대, 전우치는 중종 시대 인물로 임꺽정보다 한두 세대 앞서 활동했다.
이들 세 사람은 조선슬롯 살아간 실존인물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홍길동은 얼자출신으로 알려져 있고, 임꺽정은 백정출신이었다. 내 소설 속 전우치는 담양출신 얼자로 태어나 같은 얼자출신으로 이름을 남긴 '유자광'과 '홍길동' 흔적을 찾아 나서고, 유자광 길은 포기하고 홍길동처럼 본인도 의적이 되어가는 과정을 그렸다.
이들은 각기 다른 삶을 살았지만, 후대 민간전승과 소설 속에서는 부패한 관리와 부조리한 세상에 맞서는 '민중의 영웅'으로 거듭났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이 실제 역사 기록은 다르다. 홍길동과 임꺽정은 조정에서 반드시 잡아야 할 도적으로 기록되었고, 전우치 역시 백성을 현혹하는 술사로 묘사되었다.
나도 역사소설을 쓰고 있지만 소설과 실제 역사는 구분해야 한다. 앞서 말한 중국 '삼국지연의'가 대표적이다. 천 년이 넘어 지금도 우리는 '삼국지연의' 속 유비 조조 관우 장비 제갈공명 이미지를 실제인물처럼 받아들이고 있다.
하지만 소설은 창작이지만 실제기록의 빈틈을 본다.
임꺽정이 실제 실록에 나온 기록처럼 단순한 도적이었다면 그렇게 오랫동안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며 관군을 피할 수 있었을까?
나는 이 점을 주목하고 싶다.
임꺽정 활동 뒤에는 당시 조선슬롯 심각한 모순이 있었다.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궁궐에서 서로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고 다투고 있었지만 백성들 가운데 상당수는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조차 힘들었다.
임꺽정은 바로 그런 시대에 등장한 인물이었다.
나는 요즘 역사소설을 쓰면서 홍길동, 전우치, 임꺽정 같은 인물들에게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그들이 살았던 시대는 서로 다르지만 공통점이 있다.
신분차별과 불합리한 슬롯제도에 부딪혔다는 점이다. 홍길동은 서얼차별의 상징적인 인물이 되었고, 전우치는 신출귀몰한 인물로 묘사되었다. 임꺽정은 백정출신으로 실제 관군과 맞서 싸웠던 인물이다.
내가 쓰고 있는 역사소설에서도 이런 인물들을 통해 당시 조선슬롯 모순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그러나 한 가지 고민이 있다.
홍길동이나 임꺽정 같은 의적이 아무리 부자들의 재물을 빼앗아 가난한 백성들에게 나누어준다고 해도 그것으로 세상이 바뀔 수 있을까?
당장 굶주린 백성 몇 사람은 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신분차별과 불합리한 조세제도, 권력을 가진 사람들 횡포가 그대로 남아 있다면 또 다른 피해자가 생겨날 수밖에 없다. 결국 몇몇 의적 활약만으로는 슬롯를 근본적으로 바꾸기 어렵다는 것이다.
내가 역사소설을 통해 말하고 싶은 주제도 바로 여기에 있다.
임꺽정 역시 조선슬롯 모순에 맞섰지만 그 모순을 해결하지는 못했다.
명종은 임꺽정을 체포하기 위해 대대적인 토벌에 나섰다.
결국 임꺽정은 1562년 관군에 붙잡혀 처형되었다.
임꺽정은 죽었다. 그러나 그가 등장할 수밖에 없었던 슬롯적 모순은 그대로 남았다.
오히려 이후 조선슬롯에서는 신분 차별과 부패, 수탈을 둘러싼 갈등은 더 증폭되어 계속되었다.
여기서 나는 명종시대를 다시 생각해 본다.
명종은 개인적으로 그리 나쁜 왕은 아니었던 것 같다. 학문을 장려하고 왕권을 강화하려 했으며, 외척들의 권력을 견제하려는 노력도 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의 시대에 조선 정치는 크게 혼란스러웠다.
을사사화와 정미사화로 수많은 사림이 희생되었고, 을묘왜변으로 전라도 백성들이 큰 피해를 입었다. 또 임꺽정 같은 인물이 등장할 정도로 슬롯적 불만이 커졌다.
물론 이 모든 바카라임을 명종 혼자에게 돌릴 수는 없다.
문정왕후와 윤원형 등 외척세력의 바카라임이 더 컸다. 그렇다고 한 나라 최고지도자인 국왕 바카라임까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명종은 결국 어머니와 외척의 권력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그런 명종에게도 개인적인 비극이 있었다.
하나뿐인 아들 순회세자가 1563년 열세 살의 어린 나이로 세상을 떠난 것이다.
명종은 아들을 먼저 잃었다.
그리고 4년 뒤인 1567년 자신도 세상을 떠났다.
당시 나이 서른네 살이었다.
명종에게는 왕위를 물려줄 아들이 없었다. 이제 조선 왕실은 새로운 왕을 찾아야 했다.
그런데 여기서 조선 역사상 처음으로 왕의 직계가 아닌 방계 혈통에서 새로운 국왕이 등장한다. '방계'란 아버지가 국왕이 아니었는데 왕이 된 경우를 말한다.
바로 '선조'다.
선조는 '중종' 서자인 '덕흥군'의 셋째 아들 '하성군'이었다.
태어날 때만 해도 자신이 조선의 국왕이 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명종이 후사 없이 죽으면서 하성군에게 왕위가 돌아갔다.
그가 바로 조선 제14대 왕 선조가 된 것이다.
선조의 즉위로 조선 정치는 새로운 국면에 들어섰다.
문정왕후와 윤원형을 중심으로 한 외척세력이 몰락하고 사림이 정치의 중심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권력을 잡은 사림은 오래지 않아 다시 동인과 서인으로 갈라졌다. 그리고 그 뒤에는 조선 역사상 가장 큰 전쟁 가운데 하나인 '임진왜란'이 기다리고 있었다.
선조는 즉위 초기에는 상당히 훌륭한 국왕의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임진왜란이라는 국가적 위기를 맞으면서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다.
나는 조선의 왕들 가운데 선조를 평가하기가 가장 어려운 인물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그 이유를 다음 편부터 자세히 살펴보겠다.
다음 편은 조선 제14대 왕 선조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ㅡ 초롱박철홍 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