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롱초롱 박철홍의 조선사도 흐른다! 56

선조 2 ㅡ 조선 붕당사 총정리

초롱초롱 박철홍의 조선사도 흐른다! 56

ㅡ 선조 2 ㅡ

(조선 붕당사 총정리)


선조 때부터 '사림'이 중앙조정을 본격적으로 장악한다. 그러나 조정 주도권을 잡은 사림은 곧 '동인'과 '서인'으로 갈라진다. 본격적인 '붕당정치'가 시작된 것이다.


이후 붕당은 거듭 갈라지고 서로 맞서면서 조선정치사를 이끌어간다. 그 과정에서 정치 운영도 달라져 '환국'과 '탕평정치'를 거쳐 '세도정치'로 이어진다. 오늘날 '정당정치'와는 시대도 제도도 다르지만, 갈라지고 다시 뭉치며 권력을 다투는 모습은 지금 정치에서도 낯설지 않다.


선조 시대로 본격적으로 들어가기 전에, 앞서 올렸던 붕당정치 흐름을 보완해 다시 한번 정리하려 한다. 이 흐름을 알아두어야 앞으로 이어질 '조선사'를 훨씬 쉽게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오늘 글은 길고도 복잡하다. 하지만 두세 번 정독해 머릿속에 새겨두면, 조금 과장해서 조선사 절반은 먹고 들어갈 것이다. 조선시대를 다룬 드라마나 영화, 소설도 훨씬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어디 가서 붕당 이야기가 나와도 조금 아는 체하며 한마디 거들 수도 있을 것이다.^^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이 있다. 앞으로 이 연재에서는 정치 흐름 전반을 설명할 때 ‘당쟁’보다 ‘붕당정치’라는 말을 쓰려한다. 나부터 앞선 글 제목에 ‘조선당쟁사’라는 표현을 써왔다. 그러나 당쟁은 당파 사이의 다툼을 뜻하고, 붕당정치는 각 정치세력의 형성과 활동, 협력과 대립까지 아우른다.


특히 일제식민사학은 조선이 당파싸움만 하다가 망한 것처럼 설명하며 그 폐해를 부각했다. 붕당정치에도 분명 잘못과 폐단이 있었다. 그렇다고 수백 년 조선정치를 자리다툼 하나로만 설명할 수는 없다. 무엇을 두고 다투었고, 그 다툼이 나라와 백성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함께 살펴봐야 한다.


오늘 ‘조선 붕당사 총정리’는 복잡해 보이는 조선정치사를 한눈에 이해할 수 있도록 가능한 쉽고 재미있게 풀어본 글이다. 읽다 보면 지금 현실정치와 겹쳐 보이는 대목도 적지 않을 것이다.


상당한 시간과 공을 들였다. 제 자랑 같지만, 어디서도 이렇게 쉽고 명쾌하면서 재미있게 듣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내용이 조금 길더라도 ‘역사 보약 한 사발 마신다’ 생각하시고 끝까지 읽어보시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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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 선 오백 년 붕당과 정치사 강의안>


1. 붕당은 왜 생겼고, 왜 갈라졌으며, 결국 어디로 갔는가?


'붕당은 조선을 망친 싸움뿐이었을까?'


정치 이야기를 하다 보면 늘 나오는 말이 있다.


요즈음 우리 정치를 보면 여당이든 야당이든 내부에서 서로 싸우고 갈라지는 모습을 자주 보게 된다. 특히 선거나 공천 같은 중요한 정치일정이 다가오면 같은 당 안에서도 생각과 이해관계가 달라지면서 갈등이 더 심해지곤 한다.


그래서 정치권에서 오래전부터 이런 말도 한다.


“진보는 분열로 망하고, 보수는 부패로 망한다.”


물론 이것을 어느 한쪽에 그대로 적용할 수 있는 절대적인 법칙은 아니다. 진보도 부패할 수 있고 보수도 얼마든지 분열한다.


다만 정치세력이 왜 갈라지고, 한번 갈라진 세력은 왜 다시 또 갈라지는지를 생각하게 만드는 말이기는 하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참 이상하다.


정치라는 것은 원래 서로 다른 생각과 이해관계를 조정하고 슬롯를 하나로 통합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인데, 현실정치에서는 오히려 정치 때문에 사람들이 갈라지는 모습을 더 자주 보게 된다.


도대체 왜 그럴까?


왜 같은 목표를 가지고 출발했던 사람들마저 권력을 잡고 나면 서로 싸우고, 같은 당에 있던 사람들이 또 갈라져 새로운 세력을 만들게 되는 것일까?


그런데 이것은 오늘날 정치에서만 볼 수 있는 모습이 아니다.


우리 역사에서 이런 정치적 분열과 결합, 다시 분열하는 과정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시대가 있었다.


바로 조선시대이다.

그것도 선조시대부터이다.


조 선 오백 년 정치사를 들여다보면 '훈구'와 '사림'에서 시작해 동인과 서인, 남인과 북인, 노론과 소론으로 끊임없이 갈라진다.


처음에는 사람과 인사문제로 갈라졌던 세력이 시간이 지나면서 학문과 철학, 지역과 가문, 왕권과 신권 문제까지 얽히면서 거대한 정치세력으로 발전한다.


우리가 학창 시절 그렇게 어렵게 외웠던 바로 그 ‘조선붕당사’이다.


이해하지 않고 외우려고만 하니까 학창 시절 붕당사가 죽어라고 재미없었던 것이다.


오늘은 외우지 마시라.


왜 갈라졌고, 무엇을 놓고 싸웠으며, 그 싸움이 어떻게 조선정치 흐름을 바꾸었는지를 사람 이야기하듯 하나씩 따라가 보겠다.


그 흐름만 따라 오시라!


그 흐름만 잡고 나면 복잡하게만 보였던 조 선 오백 년 붕당사가 의외로 아주 쉽게 정리될 것이다.


조선붕당은 사람과 권력만의 싸움도 아니었고, 철학과 이념만 싸움도 아니었다.


사람과 권력, 제도와 학문, 왕권과 신권, 가문과 지역이 서로 얽히면서 만들어진 정치였다.


그리고 한 가지 더 기억해야 한다.


조선시대 붕당은 오늘날 정당과 똑같은 조직이 아니다. 당사도 없고 당대표도 없고 당원 명부도 없었다. 학맥과 혼맥, 지역적 기반, 정치적 이해와 사상적 입장이 결합된 정치집단에 가까웠다.


그러나 조선 붕당은 오늘날 현실정치와 아주 동떨어진 이야기도 아니었다. 오늘 글을 잘 읽어두시면 요즘 현실정치도 조금은 다른 시각에서 새롭게 바라보실 수 있을 것이다.


과거에는 조선이 당쟁 때문에 망했다는 식의 설명이 매우 강했다.


실제 붕당정치가 후기로 갈수록 극심한 정쟁과 보복으로 변질된 것은 사실이지만, 모든 붕당정치를 무조건 망국적 붕당으로만 보는 시각 역시 경계해야 한다. 일제강점기에는 조선인의 이른바 ‘당파성’을 강조해 식민지배를 정당화하려는 논리도 나타났다.


오늘날에는 붕당정치를 상호 견제와 공론정치 측면에서도 함께 살펴보려 한다.


그러니까 오늘 강의에서는 붕당을 처음부터 나쁜 것으로 보지도 않고, 그렇다고 아름다운 정치라고 미화하지도 않겠다.


왜 생겼는가?

처음에는 어떤 기능을 했는가?

왜 점점 격렬해졌는가?


이 세 가지를 따라가 보겠다.


2. 훈구와 사림 ― 당쟁 이전 정치


조선초기 정치세력을 이해하려면 먼저 '훈구'와 '사림'을 알아야 한다.


훈구라고 하면 흔히 '한명회', '신숙주' 같은 사람들을 떠올린다. 정확하게 말하면 조선건국 이후 여러 공신집단이 있었고, 특히 세조 집권을 거치면서 공신과 고위관료를 중심으로 막강한 정치세력이 형성된다. 후대 역사학에서는 이들을 대체로 '훈구세력'이라고 부른다.


조금 더 멀리 거슬러 올라가면 고려 말 신진사대부들부터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조선건국에 앞장섰던 '정도전'과 '조준' 등은 훗날 훈구세력으로 이어지는 계통의 선조 격이라고 볼 수 있다. 반면 조선건국에 반대했던 '정몽주'를 비롯한 인물들과 그 학통을 이은 선비들 가운데 상당수는 지방으로 내려가 학문과 후진 양성에 힘썼다.

이러한 흐름이 조선전기 지방 '사림세력' 성장 한 뿌리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성리학을 공부하고 향촌에서 제자를 기르며 도덕과 명분을 중시했던 '김종직'과 그 제자들이 대표적이다.


김종직은 세조 때부터 관직생활을 했지만 사림세력이 본격적으로 중앙정치 한 축으로 성장한 것은 '성종' 때이다.


성종은 기존 훈구세력을 견제하면서 김종직 계열 신진사림을 등용했고, 이들은 주로 '삼사'와 '홍문관'이란 언론기관을 중심으로 기존 권력층을 비판하기 시작한다.


문제는 여기서 시작된다.


기존 권력자가 볼 때 사림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맨날 임금 앞에서


“그것은 아니되옵니다.”


“대신의 처사가 옳지 않사옵니다.”


하면서 시비를 거는 사람들처럼 보였을 것이다.


반대로 사림 입장에서는 훈구가 어떻게 보였을까?


공신이라는 이름으로 권력과 경제력을 독점하는 부정부패와 비리로 가득 찬 기득권으로 보였을 것이다.


결국 두 세력은 충돌한다.

우리가 배웠던 네 차례 사화가 여기서 발생하게 됩니다.


1498년 무오사화,

1504년 갑자사화,

1519년 기묘사화,

1545년 을사사화.


오늘은 붕당이야기이니 사화이야기는 간략하게 정리한다.


'무오사화'는 연산군 시절 김종직 조의제문 사건으로 일방적으로 사림이 피해를 봤다.


'갑자사화'는 연산군이 폐모 된 윤씨에 대한 복수극이었다.

이때는 훈구파도 같이 피해를 본다. 대표적 훈구파 한명회가 부관참시당한다.


'기묘사화'는 중종시절 조광조 개혁에 훈구파들 반격 성격이 짙다. 중종의 조광조 사랑에 대한 변심도 한몫했다.


'을사사화'는 대윤과 소윤이 인종 왕위 문제로 싸운다. 인종이 너무 일찍 죽어 1545년 명종이 즉위하자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했다. 문정왕후 동생 윤원형을 중심으로 한 소윤이 인종의 외삼촌 윤임 중심의 대윤을 제거했고, 이 과정에서 많은 사림까지 희생된 사건이다


결과적으로 사림은 여러 차례 큰 피해를 입는다. 그런데 이상하게 사림은 없어지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사림의 진짜 힘은 조정에만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향촌에는 학맥과 서원, 제자들이 있었다.

한 사람을 제거하면 또 다른 제자가 올라왔다. 그래서 명종이 죽고 선조가 즉위할 무렵에는 오히려 사림이 중앙정계를 주도하게 된 것이다.


여기까지는 훈구 대 사림이었다.


그런데 훈구가 약해지고 사림이 권력을 잡자 모두 하나가 되어 행복하게 살았느냐?


아니다.


이때부터 진짜 붕당이 시작된다.


3. 동인과 서인 ― 작은 인사문제가 거대한 분열로


조선붕당의 본격적인 시작으로 흔히 이야기하는 것이 '동서분당'이다. 발단은 놀랍게도 엄청난 국가정바카라이 아니었다.


'이조전랑', 어찌 보면 지금 현재 인사부처 서기관급 인사문제였다.


이조전랑은 품계만 보면 높은 벼슬이 아니다. 이조전랑은 '청요직'에 진출할 사람을 추천하는 ‘통청권’과 자기 후임자를 추천하는 ‘자대권’을 가졌다. 그래서 품계는 낮았지만 인사권은 막강했고, 이 자리를 둘러싼 갈등이 동서분당 중요한 원인이 된 것이다.


'청요직'은 오늘날로 치면 젊고 유능한 엘리트 관료들이 가는 핵심보직이었다. 특히 사헌부·사간원·홍문관 삼사와 이조전랑이 대표적이었다


'김효원'이 이조전랑에 추천되자 '심의겸'이 반대한다. 김효원이 과거 윤원형 집안을 드나들었다는 점 등을 문제 삼았다.


그 뒤 심의겸의 동생 '심충겸'이 전랑 후보가 되자 이번에는 김효원이 반대한다.


심의겸은 '명종' 왕비 '인순왕후' 친동생으로, 명종 처남이자 대표적인 외척이었다. 선조 초 에도 대비 동생이라는 배경으로 정치적 영향력이 컸다.


“외척 집안사람이 이런 중요한 인사자리를 맡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이런 식으로 갈등이 커진다.

그러면서 김효원을 지지하는 신진사류와 심의겸을 지지하는 기성사류가 갈라졌고, 1575년 무렵 '동인'과 '서인'이라는 붕당이 뚜렷해집니다.


김효원 집이 도성 동쪽에 있어 '동인', 심의겸의 집이 서쪽에 있어 '서인'이라고 불렸다.


참 이름 정하기 쉽다.


현대에 와서도 야당 거물정치인 '김대중'과 '김영삼' 지지세력을 그들이 사는 동네 이름을 따서 '동교동계', '상도동계' 그랬으니 크게 이상할 일도 아니다.


그런데 처음에는 단순한 인사싸움처럼 보였던 이 갈등이 시간이 흐르면서 학맥과 정치철학까지 결합한다.


동인에는 '이황'과 '조식' 계열 학자들이 많이 참여했고, 서인에는 '성혼'과 '이이' 계열 인사들이 많이 자리 잡았다.


여기서 조선정치가 복잡해진다.

이제 사람싸움 뒤에 학문, 철학이 붙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4. 잠깐 철학시간 ― 이(理)와 기(氣)는 도대체 무엇인가?


여기에서 '사단칠정'과 '이기론'을 아주 간단하게 정리해야 한다.


철학이야기라고 겁먹지 마시라.


오늘 박사논문 쓸 것 아니다.

딱 이것만 이해하면 된다.


성리학에서 '이'(理)는 세상과 인간이 따라야 할 기본적 원리와 질서에 가깝다.


'기'(氣)는 실제 세상과 인간을 이루고 움직이게 하는 현실적 요소라고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그리고 '사단칠정'이 나온다.


사단은 맹자가 말한 네 가지 도덕적 마음이다.


<측은지심, 수오지심, 사양지심, 시비지심>


불쌍한 사람을 보고 가슴 아파하는 마음, 잘못을 부끄러워하는 마음, 양보하는 마음,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마음이다.


중요한 것은 이황은 이것이 후천적으로 만들어지는 마음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본래 존재하는 도덕성 실마리라고 보았다는 것이다.


어찌 보면 '성선설'에 가깝다.


'칠정'은 <희·노·애·구·애·오·욕>


즉 기쁨과 분노, 슬픔, 두려움, 사랑, 미움, 욕망 같은 인간의 일반적인 감정을 가리킨다.


퇴계 '이황'과 고봉 '기대승'은 바로 이것을 가지고 오랫동안 편지를 주고받으며 논쟁한다.


쉽게 풀면 이런 질문이다.


“사람 마음속 선한 도덕감정과 일반적인 감정은 같은 뿌리에서 나오는 것인가, 아니면 그 작동방식을 구별해야 하는가?”


이황은 사단에서 이의 발현을 더욱 강조했다.


기대승은 사단 역시 인간 전체 감정인 칠정과 완전히 분리해서 볼 수 없다고 반박했다.


그리고 이이가 기대승 쪽 문제의식을 일부 이어받으면서 자신의 이론을 발전시킨다.


그래서 흔히 이황을 ‘주리적’, 이이를 ‘주기적’이라고 설명한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주의점이 하나 있다.


퇴계는 '이기이원론',

율곡은 '이기일원론'이라고 두 칸으로 딱 나눠 외우면 이해는 쉽지만 실제 철학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두 사람 모두 이와 기를 인정했다. 차이는 인간과 세상을 설명할 때 어디에 더 무게를 두느냐에 있었다.


이황의 ‘이기이원론’은 이와 기가 서로 떨어질 수는 없지만, 그 성격과 역할은 구별된다고 보았다. 특히 도덕원리인 이를 중시하고, 인간의 욕심에 가려지지 않도록 마음을 수양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이이의 ‘이기일원론’은 이와 기가 언제나 하나로 결합해 작용한다고 보았다. 실제로 움직이고 변화하는 것은 기이며, 이는 그 안에 담긴 원리라고 설명했다. 따라서 도덕적 수양에서도 기질을 바르게 변화시키는 일을 중요하게 여겼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동인과 서인이 이 철학 때문에 처음 갈라진 것도 아니다. 정치적으로 먼저 갈라졌고, 그 뒤 학맥과 철학적 전통이 결합하면서 각 붕당 정체성이 더욱 강해졌다 보는 편이 정확하다.


아래 문장을 잘 기억하시라.


<조선당쟁은 철학 때문에 시작된 것이 아니라 정치와 학맥에 철학이 결합하면서 점점 더 강한 정체성을 가지게 되었다.>


5. 기축옥사 ― 정치싸움에 피가 흐르기 시작하다


처음 동인과 서인 경쟁은 서로 다른 붕당이 공존할 가능성도 있었다. 그러나 이이가 죽은 뒤 갈등은 더욱 심해진다.


사실 율곡 이이는 살아생전 동인과 서인의 갈등을 중재하려 애썼다. '정철'과 '이발'도 따로 불러 술자리도 만들었다. 그러나 갈등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정철과 이발은 정치적으로도 대립했지만 개인적인 감정도 매우 좋지 않았다. 술자리에서 이발이 정철의 수염을 잡아당기고, 뒤에는 정철이 이발의 얼굴에 침 뱉었다는 기록까지 전해진다.


그리고 1589년 엄청난 사건이 터진다. '정여립' 모반사건과 '기축옥사'이다.


정여립이 역모를 꾸민다는 고변이 들어왔고 조사가 시작된다.

당시 서인 영수 정철은 위관, 즉 옥사를 조사하는 바카라임자가 됐다.

지금으로 말하면 특검이 구성되었고 정철이 총바카라임자가 된 것이었다.


사건은 약 2년 반 동안 이어졌고 1,000명 안팎의 인사가 죽거나 정치적 피해를 입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동인과 호남지역 인사들이 큰 타격을 받았다. 앞서 말한 함평 출신 이발 가문이 큰 피해를 본다.


'기축옥사'에서 이발뿐 아니라 그의 노모와 어린 자식들 까지 참혹하게 희생되자, 후대에는 정철이 개인적인 원한까지 섞어 보복한 것 아니냐는 이야기도 나왔다. 그리고 그 원한이 얼마나 깊었는지를 보여주는 이발 집안 전승도 있다. 이발 후손들은 제사 때 고기를 도마에 다지면서 칼질 소리에 맞춰 ‘정철, 정철’ 하고 되뇌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사실 여부를 떠나 기축옥사가 이발 집안에 얼마나 깊은 한을 남겼는지를 보여주는 일화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조심해서 봐야 한다.


오랫동안 기축옥사는 ‘정철이 동인을 제거하기 위해 벌인 대숙청’으로 설명되기도 했다. 반면 최근 연구에서는 '선조'가 커진 동인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사건을 확대했다는 해석도 제기된다. 또 정여립이 실제로 어느 정도까지 역모를 계획했는지 고변 내용 가운데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부터 확대·왜곡됐는지 놓고도 지금까지 견해가 엇갈린다.


따라서


“모두 정철이 했다.”


또는 반대로


“정철은 아무 바카라임도 없고 모두 선조가 했다.”


라고 단정하는 것은 지나치다.


정철이 위관으로서 옥사를 이끈 바카라임이 있었고, 동시에 최종적인 국문과 처벌에는 국왕선조 판단과 의지가 강하게 작용했다.


결국 국왕 정치적 판단과 서인정권 이해관계가 맞물리면서 사건규모가 엄청 커진 것이다.


이때부터 붕당의 성격이 바뀐다.


상대방이 정권을 잃는 정도가 아니라 잘못하면 죽는다.

정치에서 패배가 곧 생존문제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런 정치는 어떻게 될까?


상대가 나를 살려둘 것이라는 믿음이 사라진다. 그러니 권력을 잡았을 때 상대를 제거하려 한다. 그리고 그 보복이 다시 보복을 낳는다.


6. 정철, 세자건저 문제로 실각


성미가 급했던 정철은 이번에는 '세자건저' 문제에서 정치적으로 고립된다. 기축옥사 뒤 동인이 크게 위축되고 서인이 정국 주도권을 잡았다. 그러나 1591년 세자바카라봉, 즉 ‘건저문제’가 터지면서 상황이 다시 뒤집혔다.


당시 선조에게는 왕비가 낳은 적자가 없었다. 정철은 '유성룡' 등을 비롯한 대신들과 '광해군'을 왕세자로 바카라봉 필요성을 논의했고, '이산해'에게도 이 문제를 상의했다. 그런데 정작 선조에게 건저문제를 주청 하는 과정에서 이산해는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산해 쪽에서는 선조가 총애하던 '인빈 김씨' 오빠 '김공량' 등을 통해 정철이 광해군을 세자로 세운 뒤 인빈 김씨와 '신성군'을 해치려 한다는 취지 이야기가 전달된다.

이런 상황에서 정철은 선조에게 광해군을 세자로 바카라봉해야 한다고 강하게 건의했다. 그러자 선조는 크게 노했다.


정철은 유성룡 등과 함께 세자바카라봉을 건의하기로 뜻을 모았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선조 앞에서는 유성룡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결국 성미가 급하고 곧은 정철만 앞장서 건의한 모양이 되었고, 선조 노여움도 정철에게 집중되었다. 말하자면 정철 혼자 ‘독박’을 쓴 셈이었다.


결국 정철은 물러나 유배됐고 '윤두수' 등 서인계 인사들도 잇따라 탄핵을 받았다.


여기서 의아한 대목이 있다. 광해군을 세자로 세우자고 건의했다가 유배를 간 사람은 서인 정철이었는데, 훗날 광해군이 왕위에 오르는 데 앞장선 세력은 정작 동인에서 갈라져 나온 북인이었다는 점이다


정철의 세자건저 문제로 서인이 물러나고 동인이 다시 정권을 잡는다. 결과적으로 선조는 기축옥사 이후 지나치게 커졌던 서인세력을 한꺼번에 눌렀다.

이때만 해도 선조가 붕당을 이용해 왕권을 강화시키려는 선조 입장에서는 나름 현명한 정치를 했다.


동인은 기축옥사 때 죽은 '최영경' 죽음 문제까지 다시 거론하면서 정철을 집중적으로 공격한다. 선조는 한술 더 떠 정철을 독철, 간철로 부르며 증오한다


그런데 동인이 다시 권력을 잡자 이번에는 정철 처벌문제를 놓고 동인 내부가 갈라진다.


정철을 강하게 처벌해야 한다는 쪽은 '북인'으로, 비교적 온건하게 처리하자는 쪽은 '남인'으로 나뉜다.


북인에는 '정인홍' 등이 있었고 남인에는 '유성룡' 등이 중심이 됐다. 유성룡도 세자건저 주청시 아무 말 안 한 게 마음에 걸렸나 보다.


여기서 중요한 인물이 또 있다.


바로 선조다.


기축옥사 때는 동인이 크게 약화됐고, 건저문제 때는 서인이 한꺼번에 무너졌다. 이것을 모두 선조가 처음부터 치밀하게 계획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선조가 붕당 간 경쟁을 이용하면서 어느 한 세력이 지나치게 강해지는 것을 견제했던 것은 분명히 볼 수 있다.


적어도 임진왜란 이전 선조를 정치력이 약한 왕이라고만 보는 것은 정확하지 않다.


조선붕당사를 보면 정철·이산해· 유성룡 같은 신하들 이름은 크게 남아 있는 반면, 정작 그들을 임명하고 파직하며 최종결정을 내렸던 선조는 뒤로 숨는 경우가 많다. 붕당은 신하들끼리만 벌인 싸움이 아니었다. 그 뒤에는 붕당을 이용하고 조정하면서 왕권을 유지하려 했던 국왕 정치도 있었던 것이다.


7. 북인, 다시 대북과 소북으로 갈라지다


임진왜란 이후 유성룡을 중심으로 한 남인이 물러나면서 북인이 정국 주도권을 잡는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권력을 잡은 북인도 곧 내부에서 갈라지기 시작한다.


1599년 '홍여순' 대사헌 임명 문제 등을 둘러싸고 갈등이 커지면서 정인홍·이산해 등을 중심으로 한 '대북'과 유영경·남이공 등을 중심으로 한 '소북'으로 갈라진다.


처음에는 인사문제에서 시작했지만 이후 왕위계승 문제가 붙으면서 갈등이 훨씬 커졌다.


선조 말 인목왕후가 영창대군을 낳자 왕위계승 문제가 다시 등장한다.


소북 '유영경' 등은 어린 영창대군 쪽으로 기울었고, 대북 정인홍· 이이첨 등은 임진왜란 당시 이미 세자로 바카라봉돼 나라를 이끌었던 광해군을 지지한다.


선조 말에는 소북이 우세해 대북 정인홍과 이이첨 등이 밀려나거나 유배되기도 했다. 그러나 1608년 선조가 갑자기 죽고 광해군이 즉위하면서 상황은 완전히 뒤집힌다.


광해군을 지지했던 대북이 정권 중심으로 올라왔고, 유영경을 비롯한 소북세력은 몰락한다.


광해군시대의 핵심 정치세력은 '대북'이었다.


결국 동인은 남인과 북인으로 갈라졌고, 다시 북인은 대북과 소북으로 갈라졌다.


조선 붕당은 상대 붕당과 싸우다가도 권력을 잡고 나면 내부에서 다시 갈라졌다.


이것이 조선붕당사를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이다.


친명, 친청하면서 현재 정치도 그러하고 있지 않는가?


8. 광해군과 인조반정 ― 북인의 몰락과 서인의 귀환


광해군시대에는 대북이 정국을 주도했다.


오늘날 광해군은 명나라와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새롭게 성장하는 후금과 충돌을 피하려 했던 현실적인 외교정바카라 때문에 재평가되기도 한다. 그러나 외교와 국내정치는 따로 봐야 한다.


광해군에게는 친형 '임해군'이 있었고, 선조 적자인 '영창대군'이 있었으며, 선조 정비 '인목대비'도 살아 있었다.


광해군 즉위 얼마 안 되어서 임해군은 유배된 뒤 죽었고, 1613년 '계축옥사'를 거치면서 영창대군은 강화도로 유배됐다가 이듬해 살해된다.


인목대비 역시 결국 서궁에 유폐된다.


이 과정에서 대북 강경세력이 정국을 장악했고 반대세력을 계속 제거했다.


의외인 인물도 있다.

'홍길동전'으로 유명한 '허균'이다. 허균은 말년에 대북정권과 가까워지면서 인목대비 폐모론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개혁적 사상가 허균 모습과는 상당히 다른 정치적 선택이었다. 그리고 광해군에게 거열형을 당해 죽는다. 역사 미스터리 중 하나이다. 나도 이 사태가 참 궁금하다. 왜 광해군은 그토록 신임하던 허균을 갑작스럽게 죽여야 했을까? 야릇한 역사 한 장면이다.

나는 이 사건을 소설로 풀고 있다


또 임진왜란으로 파괴된 궁궐을 복구하고 여러 궁궐을 새로 짓는 대규모 공사가 계속되면서 백성 부담도 커졌다.


결국 1623년 서인을 중심으로 한 세력이 '인조반정'을 일으켜 광해군을 폐위하고 '능양군'을 인조로 즉위시킨다.


대북은 이때 사실상 중앙정치에서 몰락한다. 동인계열에서는 이제 남인만 남는다


반정세력은 광해군이 명나라와 의리를 저버리고 후금과 가까이했다는 중립 외교정바카라을 핵심적인 반정 명분으로 내세웠다. 여기에 폐모살제와 대북정권의 정치적 전횡 등을 더해 광해군을 몰아냈다.


참 안타까운 일이다. 현재 역사학자들이 광해군 제1의 치적으로 보는 '중립외교'를 반정핵심 명분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솔직히 나는 개인적으로 이점에서 분노하고 인조반정을 최악의 쿠데타로 보는 것에 주저하지 않는다.


물론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단순히 인조반정 하나 때문에 일어난 전쟁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인조정권의 친명배금정바카라과 '모문룡' 지원 등이 후금과의 갈등을 심화시킨 중요한 요인 가운데 하나였던 것은 분명하다.


당시 명나라 장수 모문룡은 조선 작은 섬 '가도'를 근거지로 삼아 후금과 대치한다는 명분으로 명과 조선 양쪽에서 지원을 받아냈다. 내가 보기에는 국제사기꾼이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인조가 모문룡을 지원한 배경에는 아버지 정원군을 왕으로 추숭 하는 데 명나라의 승인을 얻으려는 속셈도 얽혀 있었다. 병자호란 편에서 자세히 다루겠지만, 왕실 위상을 높이려고 백성에게 부담을 떠넘긴 참으로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결국 1627년 정묘호란, 1636년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조선 백성들은 엄청난 피해를 입는다.


저는 이전 역사글에서도 인조반정 이후의 정치와 외교를 상당히 비판적으로 다룬 적이 있다.

하지만 오늘은 그 평가보다 당정흐름에만 집중하고 인조 편에서 자세히 다루겠다.


여기에서 중요한 변화가 하나 생긴다.


인조반정 이후 서인이 정국의 중심이 되지만 남인을 완전히 제거하지는 않았다.


남인의 대표적인 원로였던 이원익도 다시 정승의 자리에 올랐다.


‘오리정승’으로 유명한 이원익은 생각보다 널리 알려지지 않았지만, 조선 정치사에서 정말 중요하게 볼 만한 인물이다. 광해군 때 대동법이 처음 시행되는 과정에서 큰 역할을 했고, 무엇보다 청렴한 재상으로 이름이 높았다.


그 뒤에는 김육이 대동법을 전국적으로 확대하는 데 평생을 바쳤다. 사실 저는 당쟁 이야기보다 이원익과 김육, 이 두 사람 이야기를 더 길게 하고 싶다. 오늘은 당쟁사가 중심이니 다음 기회로 미루겠다.


그런데 대동법 확대를 둘러싸고 서인 내부에서도 갈등이 벌어진다. 이른바 ‘산당’과 ‘한당’의 대립이다. 다만 동인과 서인처럼 뚜렷하게 갈라진 분당이라기보다는, 정바카라과 정치 운영을 둘러싼 서인 내부 세력 다툼에 가까웠다.


이원익은 남인이었지만 김육은 서인이었다. 두 사람은 붕당이 달라도 대동법이 필요하다는 생각만큼은 같았다. 이원익이 한 세대 앞서 시행의 물꼬를 텄다면, 김육은 그 뒤를 이어 확대 시행에 힘을 쏟았다.


효종이 즉위하자 김육은 호서, 곧 충청도에 대동법을 실시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김육처럼 중앙에서 행정 경험을 쌓은 관료들을 중심으로 형성된 세력을 '한당'이라 불렀다. 반면 김집을 중심으로 학문과 예법, 도덕적 명분을 중시한 산림 세력은 '산당'이라 불렀다. 송시열은 김집 수제자로서 이 계열이었다.


김집 등은 시행 여건과 부작용을 들어 대동법 확대에 반대했다. 그러나 김육은 물러서지 않았고, 결국 1651년 효종 때 충청도에 대동법이 시행되었다. 이어 1658년에는 전라도 해안 지역으로 확대되었으며, 현종 때인 1662년에는 전라도 내륙 산간 지역까지 시행 범위가 넓어졌다. 다만 확대 과정에서도 논란과 시행착오는 계속되었다.


송시열의 태도도 처음부터 끝까지 같았던 것은 아니다. 충청도에서 대동법이 시행된 뒤 백성들이 편리하게 여긴다는 점을 인정했다. 같은 서인이라도 정바카라을 놓고 맞섰고, 시행 결과에 따라 판단을 달리하기도 했던 것이다.


김육이 죽은 뒤에도 대동법 확대는 계속되어 숙종 때 경상도와 황해도까지 시행되었다. 그러나 이를 두고 한당은 사라지고 송시열을 중심으로 한 산당만 남았다고 보기는 어렵다. 서인 내부 인맥과 갈등은 이어졌고, 이후에는 다른 정치적 쟁점들이 겹치면서 다시 분열하게 된다.


한편 인조와 효종 때는 서인이 정국을 주도하면서도 남인이 일정하게 참여하는 정치가 이어졌다. 두 세력은 경쟁하고 대립하면서도 조정 안에서 공존했다. 한 세력이 모든 것을 완전히 독점하기보다는 서로 비판하고 견제하는 구조가 어느 정도 작동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런 공존도 오래가지는 못한다.


왕위계승의 정통성과 예법문제가 정치권력과 결합하면서 또 한 번 거대한 싸움이 벌어집니다.


바로 '예송'이다.


9. 예송논쟁 ― 상복이 아니라 왕의 정통성을 놓고 싸우다


1659년 '효종'이 죽는다.


효종 계모인 '자의대비'가 상복을 얼마 동안 입어야 하느냐는 문제가 생긴다.


여러분은 아마 이렇게 생각하실 것이다.


“아니, 상복 몇 년 입는 걸 가지고 나라 대신들이 왜 그렇게 싸워?”


그런데 조선은 성리학 국가이다. 왕실상례는 그냥 장례절차가 아니다.


누가 적통인가?


왕은 일반 사대부와 어떤 관계인가?


종법을 왕실에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


이 모든 문제가 걸려 있었다.


1659년 효종이 죽자 제1차 ‘기해예송’이 벌어졌다. 송시열 등 서인은 자의대비가 효종을 위해 1년 동안 상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효종이 왕위를 계승했더라도 인조의 둘째 아들이라는 종법상 위치를 중요하게 본 것이다.


그러나 이때 송시열이 자기 논리만 끝까지 고집한 것은 아니었다. 영의정 '정태화'는 효종이 장자인지 차자인지를 따지기보다, '경국대전'에 따라 아들이 죽으면 어머니가 장자와 차자를 구별하지 않고 1년복을 입는다는 국가규정을 적용하자고 했다. 송시열도 이를 받아들였고, 현종 역시 승인하면서 일단 문제가 마무리되는 듯했다.


그런데 이듬해 효종의 소상이 다가오자 허목·윤휴 등 남인이 다시 3년복을 주장하고 나섰다. 효종이 비록 둘째 아들로 태어났지만 왕위를 계승해 종통을 이었으므로 장자와 같은 예를 적용해야 한다는 논리였다.


여기에 '어부사시사'로 유명한 '윤선도'가 가세했다. 윤선도는 3년복을 주장하는 데 그치지 않고, 송시열 논리가 효종을 낮추고 왕통 정당성을 흔드는 것이라며 정면으로 공격했다.

송시열 인신공격성 내용도 마다하디 않았다.


서인들은 이를 '예법'에 관한 논의를 빌려 송시열을 몰아내려는 정치적 공격으로 받아들였다. 결국 윤선도 상소문은 불태워졌고, 윤선도는 함경도 삼수로 유배되었다.


상복을 몇 년 입느냐는 논쟁이 왕실의 정통성과 상대 붕당의 정치적 바카라임을 따지는 싸움으로 커진 것이다.


결과적으로는 1년복이 채택됐고 정국은 서인이 계속 주도했다.


그런데 1674년 또 문제가 생긴다.


이번에는 효종왕비 '차자’의'가 죽는다. 자의대비가 며느리인 인선왕후를 위해 얼마나 상복을 입어야 하느냐는 문제였다.


서인은 9개월인 대공복을 주장했고, 남인 쪽에서는 1년인 기년복을 주장했다.


이번에는 현종이 직접 나서 1년복으로 바로잡는다. 이제 정치 흐름을 어느 정도 읽게 된 현종은 서인 예법 논리가 아버지 효종 정통성을 낮추고 자신 왕권까지 흔들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서인 주요 인사들이 관직에서 밀려나고 정국 주도권은 남인에게 넘어간다. 제2차 예송논쟁인 ‘갑인예송’ 결과였다.


그리고 약 한 달 뒤 현종이 죽고 열네 살 숙종이 즉위한다. 숙종 즉위 뒤에도 서인이 밀려나고 남인이 정국을 주도하는 흐름은 이어진다.


이처럼 1, 2차 예송논쟁을 단순하게


“서인은 신권이고 남인은 왕권이다.”


라고만 외복합적으로 하다.


서인이 왕도 예법 질서 속에 있다고 본 측면과 남인이 왕위계승으로 형성된 종통을 더욱 강조한 차이는 분명히 있었다.


그러나 핵심에는 효종의 왕위계승 정통성, 왕실 종법과 예법 해석, 그리고 서인과 남인의 정치적 주도권 문제가 복합적으로 얽혀 있었다.


하지만 왕의 입장에서 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송시열과 서인 '예론'은 효종을 인조 둘째 아들이라는 종법적 질서에서 바라본 것이지만 왕실 입장에서는 효종과 현종 정통성을 가볍게 보는 주장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었다.


'1차 예송' 때는 현종이 즉위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오랫동안 정국을 주도해 온 서인 힘도 막강했다. 결국 서인 주장이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2차 예송'이 벌어진 15년 뒤에는 상황이 달라졌다. 현종은 어느 정도 정국 주도권을 확보하고 있었고, 효종을 계속 ‘차자’의 예로 다루려는 서인 주장을 왕실을 무시하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결국 현종은 이번에는 서인의 손을 들어주지 않았고 남인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쉽게 말하면 1차 예송에서는 서인의 힘이 강했다면, 2차 예송에서는 현종이 왕권을 바탕으로 서인을 강하게 견제한 것이다.


이제 붕당은 단순히 사람끼리 모인 집단이 아니다. 학문과 예법이 곧 정치논리가 된다.


그리고 숙종시대가 되면 또 하나의 변화가 생긴다.


현종은 2차 예송에서 남인 손을 들어준 뒤 불과 한 달여 만에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열네 살 어린 '숙종'이 왕위에 올랐다.


하지만 숙종 왕위 정통성은 매우 확고했다. 현종과 명성왕후 사이에서 태어난 적장자로서 왕위를 이어받았기 때문이다. 조선왕조에서 이렇게 적통이 분명한 왕위 계승은 생각보다 흔하지 않았다.


숙종은 비록 어린 나이에 즉위했지만 왕권에 대한 의식은 강했다. 즉위 직후 아버지 현종 결정을 이어받아 서인과 송시열을 더욱 강하게 압박했고, 결국 송시열을 유배시키고 서인을 조정에서 몰아내면서 남인 중심으로 재편했다


국왕이 붕당을 훨씬 적극적으로 교체하면서 정치 주도권을 장악한 것이다.


10. 숙종의 환국정치와 회니시비 ― 오늘의 승자가 내일의 죄인이 되다 ㅡ


숙종시대에는 정권이 갑자기 뒤집히는 '환국'이 반복된다.


대표적으로 세 번만 기억하자.


<1680년 경신환국.>


남인이 몰락하고 서인이 다시 집권한다. 발단은 이른바 ‘유악사건’이었다. 남인 영수이자 영의정 '허적'이 집안잔치를 열던 날 비가 내렸다. 숙종은 왕실에서 사용하던 기름 먹인 천막, 즉 유악을 허적에게 보내주려 했는데 알아보니 허적이 왕의 허락도 받기 전에 이미 가져다 쓰고 있었다. 이에 숙종은 크게 노했다.

그러나 천막 하나 때문에 정권이 무너진 것은 아니었다. 숙종은 이미 세력이 너무 커진 남인을 견제하고 있었다. 유악사건을 계기로 남인이 장악하고 있던 군권을 서인 쪽으로 넘긴다.

그리고 곧 더 큰 사건이 터진다.

허적의 서자 '허견'이 왕실종친인 복창군·복선군·복평군, 이른바 ‘삼복’과 함께 역모를 꾸몄다는 고변이 들어온 것이다.

이것을 ‘삼복의 변’이라고 한다.

이를 계기로 허적과 윤휴를 비롯한 남인세력이 대거 처벌되고 서인이 다시 정권을 잡는다.


이것이 '경신환국'이다.


그러니까 쉽게 기억하게

'경기갑'으로 외워 두자.


‘허적의 유악사건이 불을 붙였고, 삼복의 변이 결정타가 되어 남인정권이 무너졌다'



<1689년 기사환국>


희빈 장씨가 낳은 왕자를 원자로 바카라봉하는 문제를 놓고 숙종과 서인이 충돌합니다. 송시열을 비롯한 서인세력이 원자바카라봉에 반대하자 숙종은 서인을 대거 축출하고 남인을 불러들인다.

이때 송시열은 유배됐다가 사사됐고 '인현왕후'도 폐위된다.

'장희빈'은 왕비가 된다.


드라마에서 너무 많이 본 장면이다.


그러나 이것을 장희빈 때문에 생긴 일로만 볼 수는 없다. 숙종의 눈에는 서인세력이 지나치게 커지고, 조정을 자기들 뜻대로 움직이려는 것처럼 보였다.


이때만 해도 숙종 왕권은 상당히 강했다. 그래서 나쁜 남자 숙종은 여인들을 이용해 필요하면 서인을 과감하게 밀어내고 다른 세력을 끌어올리면서 정국 주도권을 직접 쥐려 했다.


그런데 불과 5년 뒤인 1694년 '갑술환국'이 또 일어난다.


이 부분은 정확히 볼 필요가 있다.


노론계 '김춘택'과 소론계 '한중혁' 등이 폐비 민씨, 즉 인현왕후의 복위를 추진한다. 집권 남인의 '민암' 등은 이 움직임을 조사하고 관련자들을 처벌하려 했다.


그런데 숙종 변덕 또 시작된다. 이미 인현왕후 폐위를 후회하기 시작했던 숙종은 오히려 민암 등 남인 지도부를 내친다.

그리고 서인계 인사들을 다시 불러들여 정권을 교체한다.

인현왕후는 복위되고 장씨는 다시 희빈으로 강등된다.


이것이 '갑술환국'이다.


갑술환국을 단순히 숙종이 장희빈에게 싫증 나서 인현왕후를 다시 사랑하게 되었다. 라고 이해하면 안 된다.


드라마에서는 사랑과 질투가 중심이지만 실제정치에서는 왕위계승 문제와 남인·서인의 권력투쟁, 그리고 국왕 숙종의 정국운영이 훨씬 중요했다.

숙종 변덕도 한몫했다

숙종은 진짜 나쁜 남자 전형이었다.


희빈 장씨가 사사되는 것은 갑술환국 때가 아니다.

그로부터 7년 뒤인 1701년 인현왕후가 죽은 뒤 무고옥이 일어나면서 사사된다.


이것도 구별해야 한다.


그런데 여기서 또 하나 중요한 일이 벌어 자다.


이때 서인이 또 갈라진다.

바로 '노론'과 '소론'이다.


흔히 갑술환국 때 노론과 소론이 갈라졌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보다 앞선다.


1680년 경신환국 뒤 남인 처리 문제와 훈척정치, 남인 '김익훈' 처벌 문제 등을 놓고 서인 '노장파'와 '소장파'가 충돌하기 시작했고 1683~1684년 무렵 노론과 소론 분화가 뚜렷해진다.

그리고 이 분열을 더욱 깊게 만든 사건이 있었다.


'회니시비'이다.


‘회’는 송시열이 살던 회덕.

‘니’는 '윤증'이 살던 니산, 지금의 논산이다.


그래서 두 사람 사이 시비를 '회니시비'라고 한다.


송시열과 윤증 아버지 '윤선거'는 '김장생' 문하에서 공부한 가까운 사이였다. 그런데 윤선거는 송시열과 학문적으로 갈라선 '윤휴'와도 관계를 계속 유지했다. 송시열은 이것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윤선거가 죽은 뒤 아들 윤증은 스승이기도 했던 평소 가까웠던 송시열에게 아버지 묘갈명을 부탁했다. 그런데 송시열이 써준 글에는 윤선거에게 평생 가장 아픈 기억이었던 병자호란 당시 강화도 사건이 들어 있었다.


강화도가 함락되자 윤선거 부인은 청군에게 치욕을 당하느니 죽음을 택하겠다며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함께 순절을 약속했던 벗 권순장과 김익겸도 목숨을 잃었다. 그러나 윤선거는 살아서 강화도를 빠져나왔다. 아들 윤증이 열 살도 되지 않았을 때였다. 윤선거는 연로한 아버지가 살아 계신데 아들이 먼저 죽을 수는 없었다고 밝혔다. 아버지를 봉양해야 한다는 것이 그가 죽음을 함께하지 못한 이유였다.


윤선거와 윤증 부자에게 이 일은 평생 지워지지 않는 상처이자 마음의 짐이었다. 그런데 송시열이 아버지 삶을 기리는 묘갈명에서 바로 그 아픈 지점을 다시 건드린 것이다. 특히 ‘나는 전해 적을 뿐 새로 짓지 않는다’는 표현이 윤증 마음을 크게 상하게 했다.


윤증으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단순히 글 한 편을 고쳐달라는 문제가 아니라, 아버지 명예와 평생 상처가 걸린 문제였다. 결국 이 묘갈명 문제는 송시열과 윤증 오랜 관계가 무너지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


결국 윤증은 1681년 송시열의 학문과 처신을 비판하는 편지를 쓴다.


바로 ‘신유의서’이다.


다만 실제로 스승에게 보내지는 않았다. 부치지 못한 편지였다.

나는 <부치지 못한 편지>라는 제목으로 이 장면들을 소설로 다시 만들었다


그런데 이 편지가 주변 사람을 통해 송시열에게도 알려진다.


1684년 송시열 제자 '최신'이 윤증을 ‘스승을 배반했다’며 공격하면서 개인적인 사제갈등이 조정전체 정치논쟁으로 번진다.


이것이 '회니시비'다.


송시열을 따르는 쪽이 노론 중심이 되고 윤증을 따르는 쪽이 소론 중심이 된다.


그렇다고 노론과 소론이 단순히

‘늙은 사람들의 당’과 ‘젊은 사람들의 당’이었다고 이해하면 안 된다.


초기에는 노장파와 소장파의 성격이 있었지만 남인 처리문제와 훈척정치에 대한 입장, 송시열과 윤증 학문적 갈등 등이 함께 얽히면서 독립된 붕당으로 발전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윤휴' 문제도 빠질 수 없다. 윤휴는 '주자' 해석만을 절대적인 것으로 보지 않고 경전을 독자적으로 해석하려 했던 학자였다.


송시열은 이런 윤휴 학문을 매우 강하게 비판했고 ‘사문난적’으로 규정했다.


그러나 윤휴 죽음을 단순히

송시열이 윤휴를 사문난적으로 몰아 죽였다라고 말하면 지나치다.


윤휴는 1680년 경신환국으로 남인정권이 몰락하는 정치적 숙청 과정에서 사사됐다.


다만 송시열과 윤휴 오랜 학문적·정치적 대립이 그 배경에 깊이 자리하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결국 '회니시비'는 친구였던 송시열과 윤선거 갈등에서 시작해 스승 송시열과 제자 윤증 갈등으로 이어졌고, 마침내 서인 전체가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지는 데 중요한 요인이 됐다.


개인관계와 학문이 정치가 되고, 정치가 다시 붕당을 만든 것이다.


이것이 조선붕당의 또 다른 모습이다.


11. 노론·소론 그리고 호락논쟁 ― 같은 노론 안에서도 또 갈라진 철학 ㅡ


이제 붕당에 다시 철학이 등장한다.


조선후기 노론 내부에서 벌어진 대표적인 철학논쟁이 '호락논쟁'이다.


쉽게 말하면


“인간과 동물 본성은 근본적으로 같은가, 다른가?” 하는 문제였다.


'권상하' 문하 '한원진'은 인간과 사물 본성이 다르다는 ‘인물성이론’을 강조했고, '이간'은 근본적인 본성은 같다는 ‘인물성동론’을 주장했습니다.


한원진 쪽 학자들이 주로 충청도, 즉 호서지역에 있어 '호론'이라 불렸고, 이간의 학설을 지지하는 학자들이 서울과 경기지역에 많아 '낙론'이라고 불렸다.


여기서 다시 여러분들이 물을 수 있다.


“도대체 사람이랑 짐승 본성이 같은지가 정치하고 무슨 상관입니까?”


바로 그 질문이 중요하다.


성리학자들에게 인간 본성에 대한 해석은 단순한 철학문제가 아니었다.


누가 문명인이고 누가 오랑캐인가?


다른 문화와 사상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인간이 도덕적 존재가 될 수 있는 근거가 무엇인가?


이런 현실인식과도 연결됐다.


호론 쪽에서는 화이론적 질서와 조선중화 의식을 강하게 강조하는 경향이 나타났고, 낙론 쪽에서는 인간과 사물의 보편적인 본성을 강조하면서 상대적으로 보다 개방적인 사상으로 발전했다.


후대에 낙론계 인맥 일부가 '북학파'와 연결되고 호론계 강한 화이론이 '위정척사사상'과 통하는 측면도 나타난다.


그러나 이것도


‘호론=쇄국과 위정척사’


‘낙론=개화와 북학’


이렇게 1대 1로 연결하면 지나친 단순화이다. 후대 북학과 위정척사 같은 흐름에 영향을 준 여러 사상적 배경 가운데 하나로 이해하면 된다.


즉 처음 이황과 기대승이 인간의 마음을 놓고 벌였던 철학논쟁이 조선후기로 가면서 더욱 세분화되고 정치적 학맥과 결합해 새로운 논쟁으로 이어진 것이다.


12. 영조와 정조의 탕평 ― 당을 없애려 한 것이 아니라 당을 다스리다. ㅡ


숙종시대까지 붕당 갈등이 너무 심해지자 영조는 '탕평'을 내세운다.


탕평은 쉽게 말하면 어느 한 당파에 정권을 완전히 맡기지 않고 여러 정치세력을 조정하면서 국왕 중심으로 정치를 운영하려는 것이다.


영조는 노론과 소론 온건파를 함께 등용했고 이조전랑이 가지고 있던 정치적 특권도 축소했다. 그래서 영조의 탕평을 단순히 ‘보여주기식 정치’라고만 평가하기는 어렵다.


실제로 붕당의 극단적인 대립을 완화하려는 여러 제도적·정치적 시도가 있었다.


다만 시간이 흐르면서 노론 우세가 커졌고 탕평정치에도 분명한 한계가 나타났다.


정조는 또 다른 방식의 탕평을 추구한다.


'규장각'을 키우고 '초계문신'을 양성하며 여러 정치세력을 국왕 중심으로 재편하려 했다.


'초계문신'(抄啓文臣)은 정조가 젊고 유능한 문신을 뽑아 특별히 공부시키고 육성한 관리를 말한다.


남인 '채제공'을 정승에 등용하면서 노론중심 정치에 균형을 맞추려 하기도 했다.


정조시대에는 정치세력이 다시 '시파'와 '벽파'로 나뉜다.


이것도 노론과 남인처럼 오랫동안 이어진 독립된 붕당이라기보다는 사도세자 문제와 정조 정치노선을 둘러싸고 기존 붕당사람들이 새롭게 결합하면서 나타난 정치구도라고 보는 것이 좋다.


'시파'는 대체로 정조 정치와 사도세자에 대한 추숭에 비교적 우호적인 세력이었고, '벽파'는 이에 비판적이거나 신중한 입장을 가진 세력들이었다.


그러나 시파 안에도 노론과 남인이 있었고 벽파 역시 단순히 하나의 학파로 설명하기 어렵다.


대표적인 시파계 인물이 훗날 정조와 사돈관계를 맺고 조선후기 세도정치를 연 '김조순'이다.


그리고 1800년 정조가 갑자기 죽은 뒤 어린 순조가 즉위하면서 조선정치는 또 다른 단계로 넘어간다.


붕당이 갈라져 싸우던 정치에서 몇몇 외척가문이 권력을 장악하는 세도정치 시대로 넘어가는 것이다.


여기까지 오면 조선붕당사는 사실상 마지막 단계에 들어간다.


13. 정조 이후 세도정치

― 붕당정치가 무너진 자리에 가문이 들어서다. ㅡ


1800년 정조가 죽고 어린 순조가 즉위한다.


처음에는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했고 노론벽파가 정국을 주도한다.


이후 순조가 친정을 시작하면서 노론시파 김조순을 중심으로 '안동김씨' 정치적 영향력이 커진다.


여기서부터 우리가 세도정치라고 부르는 정치형태가 점차 자리 잡는다.


중요한 점이 있다.


세도정치를 단순히 ‘노론 일당독재’라고만 부르면 충분하지 않다. 이 시기에는 오히려 전통적인 붕당정치 자체가 힘을 잃고 특정 외척가문이 핵심관직을 장악하는 정치로 성격이 바뀐다.


'안동김씨'와 '풍양조씨' 같은 세도가문 중심 정치이다.


이것은 이전 붕당정치와도 다르다.


붕당정치에서는 최소한 학문과 공론, 서로 다른 정치세력 경쟁 이라는 틀이 있었다.


그런데 세도정치에서는 특정 가문 중심으로 권력이 집중되면서 이런 견제구조가 크게 약화된다.


19세기에는 삼정문란과 농민부담이 심각해지고 전국 각지에서 민란이 이어진다.


결국 조선정치가 맞닥뜨린 가장 큰 문제는 붕당이 존재했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라 권력을 견제할 경쟁과 공론의 구조가 무너졌다는 데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나는 조선붕당사를 단순히

‘옛날 사람들이 맨날 싸웠던 역사’

라고만 보지 않았으면 한다.


그 속에는 사람과 권력도 있고 철학도 있으며 이상과 현실도 있고 견제와 독점이라는 정치의 오래된 문제가 들어 있다.


무엇보다 조선선비들은 우리가 학창 시절 졸면서 외웠던 것처럼 아무 이유 없이 '사단칠정'이나 '예송'을 붙들고 싸운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들에게 그것은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왕은 어떤 존재인가?’


‘누가 나라를 다스려야 하는가?’


‘권력은 어떤 원리에 따라 행사되어야 하는가?’


라는 현실적인 정치문제였다.


지금의 정치에서도 형태는 달라도 권력과 견제, 분열과 통합이라는 문제는 계속 반복된다.


그래서 조선붕당사를 제대로 이해하면 조선의 정치사가 한꺼번에 보인다.


그리고 현대사 현실정치도 보인다.


지금 당장 민주당과 국민의 힘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도

새롭게 보일 것이다.


오늘 내 글 흐름만 정확하게 잡으셨다면 이제 사극을 보다가


“동인이 뭐였지?”


“서인이 뭐였지?”


하실 일은 없을 것이다.


남인이 나오면


‘아, 동인에서 갈라졌지.’


북인이 나오면


‘동인에서 남인과 함께 갈라졌다가 다시 대북과 소북으로 나뉘었지.’


노론이 나오면


‘서인이 다시 갈라졌지.’


이 정도는 바로 떠오르실 거다.


거기에 예송과 환국, 탕평, 세도정치가 차례로 연결될 것이다.


그러면 오늘 내 글 목적은 다 이루어진 것이다.


그리고 어디 가서 조선당쟁 이야기가 나오면...


조금 아는 체하셔도 된다.^^


마지막으로 조선 붕당사에 쓴소리 한번 하겠다.


조선오백 년 역사에서 사대부들은 서로 죽이기까지 하며 피 터지게 싸웠다. 그러나 그 치열한 싸움 속에서 '백성의 삶은 얼마나 중요하게 다뤄졌을까?'


'명분과 사상을 앞세웠지만 결국 자기 세력의 권력을 지키고 빼앗는 데 더 몰두한 것은 아니었을까?'


그나마 '이원익'과 '김육'처럼 붕당을 넘어 백성의 먹고사는 문제를 붙들고 씨름한 사람들이 있어서 다행이다. 그런 노력마저 없었다면 조선붕당사는 일제 식민사학이 그려놓은 대로 ‘나라를 망친 사대부들의 당쟁 잔치’라는 비판을 벗어나기 더욱 어려웠을 것이다.


ㅡ 초롱 박철홍 ㅡ


첫 번째 사진을 좀 더 크게 복사하여 내 글과 대조해 가면서 읽는다면 조선붕당사를 한눈에 그려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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