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롱초롱 박철홍의 조선사도 흐른다! 53

문정왕후의 여인천하와 을사사화(1545) ㅡ권력을 잡은 여인들과 사림의

초롱초롱 박철홍의 조선사도 흐른다! 53

ㅡ 문정왕후의 여인천하와 을사사화(1545) ㅡ

(권력을 잡은 여인들과 사림의 비극)


조선의 4대 사화 가운데 마지막 사화가 명종 즉위년에 일어난 '을사사화'다.


을사사화는 앞서 일어난 다른 사화들보다 조금 복잡하다. 외척 사이 왕위계승을 둘러싼 권력투쟁에서 시작되었지만 그 과정에서 사림들이 큰 피해를 입었기 때문이다.


우선 을사사화를 이해하려면 조선 국왕 가운데 상대적으로 존재감이 약한 '인종'과 '명종', 그리고 이 두 왕보다 훨씬 강력한 권력을 행사했던 한 여인을 알아야 한다.


바로 '문정왕후'다.


'태정태세문단세예성연중인명선광인효현숙경영정순헌철고순'


솔직히 나도 학창 시절부터 노래처럼 외워 온 조선 왕 순서 가운데 자주 빠뜨리는 왕이 '인종'이다. 명종은 그래도 문정왕후와 '임꺽정' 때문에 이름이 조금 알려져 있다.


그런데 역사를 살펴보면 인종과 명종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흥미로운 인물들이다.


특히 인종은 참으로 안타까운 왕이었다.


인종은 1515년 '중종'과 장경왕후 윤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런데 태어난 지 불과 엿새 만에 어머니를 잃었다. '장경왕후'가 산후병으로 세상을 떠난 것이다.


이후 중종은 새 왕비 맞아들였다. 그 여인이 바로 '문정왕후' 윤씨다.


문정왕후는 인종의 계모였지만 자신도 1534년 '경원대군'을 낳으면서 궁궐 상황이 달라졌다.


장경왕후 아들인 인종에게는 외삼촌 '윤임'이 있었고, 문정왕후에게는 '윤원로'와 '윤원형'이라는 동생들이 있었다.


윤임을 중심으로 한 세력을 '대윤', 윤원로와 윤원형 형제를 중심으로 한 세력을 '소윤'이라고 불렀다.


이 두 외척 세력 사이에서 치열한 권력투쟁이 벌어졌다.


그러나 인종은 어려서부터 성품이 온화하고 효심이 깊었다고 한다. 계모인 문정왕후를 친어머니처럼 섬겼으며 이복동생 경원대군에게도 우애가 깊었다.


인종의 이런 성품을 보여주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1543년 1월, 인종이 세자로 있던 동궁에 큰 불이 났다. 이 화재는 실록에도 기록된 실제 사건이다.

그런데 후대에 전해지는 이야기는 더욱 놀라운 내용이 나온다.


화재 당시 세자가 거처하던 곳의 문이 밖에서 잠겨 있었다는 것이다. 누군가 고의로 세자를 죽이기 위해 불을 질렀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인종의 반응이었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인종은 불길 속에서도 쉽게 피하려 하지 않았다. 자신이 죽으면 오히려 부모에게 나쁜 소문이 돌아갈 염려가 없어질 것이라는 취지의 말을 했다는 것이다.


물론 이 내용은 실록에서 확인되는 사실이 아니라 후대에 전해지는 일화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가 전해질 정도로 인종은 효심이 깊었고, 당시 왕위를 둘러싼 궁궐정세도 불안했다.


인종은 아버지 중종이 병석에 누웠을 때도 정성을 다해 간호했다. 중종이 죽자 슬픔에 빠져 제대로 먹지도 못했다고 한다. 그렇다고 인종이 착하기만 하고 정치적 의지가 없는 왕은 아니었다.


1544년 중종이 죽자 인종이 왕위에 올랐다.


인종은 '기묘사화'로 희생된 조광조 등 사림들 명예를 회복시켰고, 폐지되었던 '현량과'를 복구했다.


또 율곡이이 스승 '이언적' 등 사림계 인사들을 중용하며 새로운 정치를 시작하려 했다.


인종이 특별히 아꼈던 사림 가운데 한 사람이 장성출신의 하서 '김인후'다.


김인후는 인종이 세자였을 때 세자시강원에서 학문을 가르쳤다. 두 사람 사이에는 깊은 신뢰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인종은 왕위에 오른 지 불과 8개월 만에 갑자기 죽었다.

김인후는 인종 죽음을 깊이 슬퍼했고, 이후 관직에 다시 나아가지 않았다. 그는 평생 인종을 그리워하며 추모하는 시를 남겼다.


그 가운데 유명한 작품이 '유소사(有所思)'다.


훗날 김인후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곳이 장성 '필암서원'이다. 현재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한국의 9개 서원 가운데 하나다.


인종은 살아 있을 때뿐 아니라 죽은 뒤에도 이렇게 깊은 존경을 받았던 왕이었다. 그런데 인종 죽음에는 지금도 의문이 많다.


당시 나이 서른한 살이었다.

젊은 나이에 갑자기 죽은 데다 그동안 왕위계승 문제로 첨예하게 대립했던 문정왕후 세력이 가장 큰 정치적 이익을 얻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종이 독살당했다는 이야기가 오래전부터 전해진다.


물론 독살을 입증할 확실한 증거는 없다. 그러나 나는 인종의 죽음에 상당한 의문을 가지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독살설에 확신에 가까운 심증을 굳히고 있다.


만약 인종이 10년만 더 살았다면 조선역사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기묘사화로 위축되었던 사림들이 새로운 정치세력으로 성장했을 것이고, 어쩌면 을사사화도 일어나지 않았을지 모른다.


사림들 붕쟁은 더 빨리 벌어졌을지는 모른다.


그러나 역사는 인종에게 그런 기회를 주지 않았다.


인종이 후사 없이 죽자 이복동생 경원대군이 왕위에 올랐다.


그가 바로 '명종'이다.

당시 명종의 나이는 열두 살이었다. 어린 아들이 왕이 되자 어머니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시작했다.


그리고 조선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여인천하'가 시작되었다.

얼마 전까지도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 '여인천하'에서 '전인화'가 연기한 인물이 바로 문정왕후다.


또 드라마 '대장금'에서도 중종의 왕비로 등장한다. 중종이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서 "음~ 맛있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일 때 옆에서 함께 고개를 끄덕이던 고상한 왕비가 바로 문정왕후다.


그러나 실제 문정왕후는 단순히 고상한 왕비가 아니었다.

조선오백년 동안 가장 강력한 정치권력을 행사한 여인을 꼽으라고 한다면 나는 문정왕후를 빼놓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시작하자 동생 윤원형을 중심으로 한 소윤 세력이 권력을 장악했다.

그리고 인종을 지지했던 대윤 세력을 제거하기 시작했다.


윤원형은 이기, 정순붕 등과 함께 윤임 일파가 왕위를 다른 종친에게 넘기려 한다는 역모혐의를 제기했다.


그 결과 윤임, 유관, 유인숙 등이 죽음을 당했고 수많은 사람이 유배되었다.


바로 1545년에 일어난 '을사사화'다.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이 있다.


조선 역사에는 을사사화보다 더 많은 사람이 희생된 정치적 사건도 있었다. 그런데 왜 을사사화를 무오·갑자·기묘사화와 함께 '조선 4대사화'라고 부를까?


'사화'(士禍)는 선비들이 화를 당했다는 뜻이다. 조선 4대사화는 단순히 정치적 숙청 규모가 큰 사건 네 가지를 골라놓은 것이 아니다. 사림 세력이 정치적 탄압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는 공통점 때문에 묶어 부르는 것이다.


무오사화에서는 김종직과 그 제자들을 비롯한 사림들이, 갑자사화에서는 연산군 보복 과정에서 사림을 포함한 여러 정치세력이, 기묘사화에서는 조광조를 중심으로 한 사림들이 큰 피해를 입었다. 을사사화 역시 외척 권력투쟁에서 시작되었지만 인종을 지지했던 사림계 인사들이 대거 숙청당하면서 조선 4대사화 가운데 하나로 기록된 것이다.


을사사화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1547년 양재역에 문정왕후와 권신들의 정치를 비판하는 익명의 벽서가 붙었다. 이를 구실로 소윤 세력은 반대파를 다시 숙청했다.


이 사건을 '양재역 벽서사건' 또는 '정미사화'라고 한다.


송인수 등이 죽음을 당했고 이언적, 노수신, 유희춘 등 많은 사림이 유배되었다.


이 가운데 '미암일기'로 유명한 유희춘은 내 고향 담양과도 깊은 인연이 있다.


유희춘은 담양 출신은 아니지만 담양으로 장가와 오랫동안 담양에서 살았다. 그의 부인 '송덕봉'은 담양에서는 신사임당 못지않게 유명한 여인이다.

송덕봉은 당시 여성으로서는 보기 드물게 학문과 문장에 뛰어났으며, 자기 생각을 당당하게 표현할 줄 아는 깨어 있는 여인이었다. 남편 유희춘도 그런 부인을 깊이 존중했다. 특히 두 사람이 주고받은 편지와 시에는 서로의 학문과 생각을 존중했던 모습이 잘 드러난다.

송덕봉의 당시로서는 놀라운 생각들을 많이 접할 수 있다.

그 내용이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미암일기' 등에 남아 있다.

내 개인적으로는 신사임당 보다는 송덕봉을 조선의 여인으로

존경받아야 한다는 생각이다.


송덕봉이 얼마나 깨어 있는 여인이었는지를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송덕봉이 친정아버지의 묘비를 세우려고 했는데 남편 유희춘이 비용 등을 이유로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러자 송덕봉은 남편에게 편지를 보내 당당하게 항의했다. 부부 사이가 세상에 둘도 없이 화목하다고 자랑만 하지 말고, 진정 자신을 생각한다면 친정아버지의 묘비를 세우는 일에도 관심을 가져달라는 것이었다. 남편에게 무조건 순종하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던 시대에 자기 생각을 이렇게 당당하게 표현한 여인이었다.


사실 송덕봉은 여인천하 또 다른 주인공이었다


이렇게 문정왕후와 윤원형은 반대 세력을 제거하고 권력 기반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흥미로운 인물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바로 '정난정'이다.


드라마 '여인천하'의 실질적인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여인이다. 정난정은 양반 출신 '정윤겸'과 천한 신분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양반이었지만 어머니가 천한 신분이었기 때문에 정난정은 태어날 때부터 얼녀로서 신분의 벽에 가로막혔다.


조선시대 서얼은 남성이나 여성이나 또 같은 처지였다.

아무리 영리하고 능력이 뛰어나도 출생 신분을 쉽게 벗어날 수 없는 슬롯였다.


그런 정난정이 윤원형 첩이 되었다. 그리고 정난정은 뛰어난 처세술과 정치적 감각으로 윤원형 신임을 얻었고 문정왕후와도 가까워졌다. 마침내 윤원형의 정실부인 지위에까지 올라 정경부인이 되었다. 천한신분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여인이 당시 최고권력을 가진 재상 정실부인이 된 것이다. 조선 신분제도를 생각하면 참으로 이례적인 일이었다.


물론 정난정이 권력을 얻는 과정은 결코 깨끗하지 않았다.


정난정은 어찌 보면 여성 '유자광'이었다. 권력을 획득하고 종래에 비참해지는 과정 너무 비슷했다.


을사사화를 일으킨 주역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권력투쟁에 깊이 관여했고, 윤원형의 정치적 활동을 돕는 과정에서 여러 비판을 받았다. 특히 윤원형 본처 김 씨를 쫓아내고, 독살까지 했다는 이야기는 지금도 논란의 대상이다.


그러나 나는 정난정을 단순히 권력욕에 사로잡힌 악녀로만 평가하는 것은 조금 신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녀가 태어났던 신분과 당시 조선슬롯가 여성에게 가했던 제약도 함께 살펴봐야 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윤원형의 또 다른 모습이 나타난다. 윤원형은 서얼차별 문제를 공식적으로 제기한 조선 최초 초고위층 인물이기도 했다.


1553년 명종 8년, 윤원형은 여러 대신과 함께 서얼에게도 과거시험에 응시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자는 주장을 폈다.


그 논의에서 나온 말 가운데 주목할 만한 대목이 있다.


'인재의 우열은 출생의 귀천과 관계가 없다.'


참으로 놀라운 말이다.

조선은 양반의 아들이라도 첩에게서 태어나면 과거시험에 응시하지 못하도록 제한했던 나라였다. 그런데 당시 권력의 중심에 있던 윤원형이 이러한 신분차별을 문제 삼은 것이다.

물론 윤원형 혼자만의 주장은 아니었다. 심연원, 상진, 윤개 등 여러 대신이 함께 논의했다.

그 결과 서얼의 과거응시를 일부 허용하는 제한적인 조치가 이루어졌다.


완전한 신분차별 철폐는 아니었지만 기존제도 문제를 공식적으로 인정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하지만 실록을 기록한 사관은 윤원형이 첩을 처로 삼았기 때문에 서얼허통을 추진했다고 비판적으로 보았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 정바카라 의미까지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나는 그동안 역사글과 소설을 쓰면서 조선의 서얼차별 문제를 여러 차례 다루었다.


유자광, 홍길동, 전우치, 7서, 송익필 등 내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역사 속 인물들도 신분의 벽과 깊은 관계가 있다.


윤원형은 수많은 사림을 죽음으로 몰아간 권력자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서얼차별 문제를 제기한 인물이기도 했다.


이때 윤원형이 주장한 서얼허통이 제대로 정착되었다면 조선후기 신분차별로 인한 수많은 비극도 줄어들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후 권력을 장악한 사림은 오히려 성리학적 신분질서에 더욱 깊이 빠져들었다. 서얼차별을 비롯한 신분제도 모순을 바로잡기보다는 기존질서를 유지하는 데 더 치중했다. 결국 조선은 불합리한 신분차별을 쉽게 극복하지 못했고, 그로 인한 수많은 비극은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역사적 인물은 이렇게 복합적이다. 한 가지 잘못으로 그 사람이 했던 모든 일을 부정하거나 한 가지 공적을 이유로 잘못까지 덮어줄 수는 없다.


문정왕후도 마찬가지다.


문정왕후 하면 을사사화와 외척 권력 전횡이 먼저 떠오른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또 하나의 중요한 정바카라이 있었다.


바로 '불교중흥'이다.


문정왕후는 승려 '보우'를 신임하여 1550년 '선종'과 '교종' 부활시키고 '승과'와 '도첩제'를 다시 시행했다.


숭유억불을 국정이념으로 삼았던 조선에서 이러한 정바카라은 성리학자들 거센 반발을 불러왔다.


보우는 봉은사 주지를 지냈고 도대선사 등 높은 승직에 올랐다.


문정왕후 불교정바카라은 당시 성리학자들에게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우리나라 역사 전체를 놓고 보면 조금 다르게 평가할 필요가 있다.


당시 불교중흥 정바카라을 통해 배출된 대표적인 승려가 '서산대사 휴정'과 '사명대사 유정'이다.


훗날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이들은 승군을 이끌어 나라를 구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물론 문정왕후가 훗날 임진왜란을 예상하고 불교를 부흥시킨 것은 아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녀 불교중흥 정바카라이 승군의 성장에 기여했다는 점은 역사적 성과로 평가할 수 있다.


문정왕후가 죽자 사관은 그녀를 사직의 죄인이라고까지 비판했다.


그 기록에는 문정왕후 권력남용에 대한 비판과 함께 여성 정치 참여와 불교를 부정적으로 바라보던 성리학적 가치관도 반영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문정왕후가 저지른 정치적 숙청의 바카라임까지 부정할 수는 없다.


문정왕후는 뛰어난 정치적 수완을 가진 권력자였지만 자신 권력을 유지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을 희생시켰다.


이것은 분명한 잘못이다.


그런 문정왕후도 1565년 세상을 떠났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그토록 막강했던 윤원형의 권력이 순식간에 무너지기 시작한 것이다. 윤원형은 탄핵을 받아 관직에서 물러났고 정난정과 함께 황해도 강음으로 내려갔다.


그런데 정난정에게 과거 윤원형의 본처 김씨를 독살했다는 혐의가 제기되었다. 실록은 정난정 독살 혐의를 사실로 기록하고 있다.

다만 정난정이 정식 재판에서 최종 판결을 받기 전에 죽었고, 기록에는 당시 사관 강한 비판도 담겨 있다는 점을 함께 살펴볼 필요가 있다.


정난정은 자신을 잡으러 온다는 소식을 듣고 독약을 마셨다.

1565년 11월 13일이었다.


그런데 더욱 극적인 일이 벌어졌다. 윤원형도 정난정이 죽은 지 닷새 만에 세상을 떠난 것이다.


실록에는 윤원형이 정난정의 죽음을 보고 울분에 싸여 있다가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윤원형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실록은 자살이라고 명확하게 기록하지는 않았다.


나는 이 두 사람의 마지막이 참 묘하게 느껴진다. 정난정은 천한 신분에서 태어나 조선 최고의 권력자 부인 자리에까지 올랐다.

윤원형은 왕의 외삼촌이라는 신분으로 엄청난 권력을 누렸다.

그들은 권력을 얻기 위해 수많은 사람을 희생시켰다. 그러나 모든 권력을 잃은 뒤에도 두 사람은 함께 있었다. 정난정이 죽자 윤원형도 며칠을 넘기지 못했다.

두 사람이 서로 얼마나 사랑했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적어도 이들의 관계를 권력과 욕망만으로 설명할 수 있을지는 생각해 볼 일이다.


그렇다고 마지막이 비극적이었다는 이유로 두 사람 정치적 잘못까지 아름답게 포장할 수는 없다.


내가 역사적 인물을 바라볼 때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바로 이런 점이다.


문정왕후는 수많은 사림을 숙청했지만 불교 중흥이라는 역사적 성과도 남겼다.


윤원형은 권력을 남용했지만 서얼 차별이라는 당시 신분제도 모순을 공식적으로 지적했다.


정난정은 권력투쟁 중심에 섰지만 천한 출생 신분을 뛰어넘어 당시 슬롯에서 상상하기 어려운 자리에까지 올랐다.


이들을 단순히 악녀나 간신이라는 한마디로 규정하기에는 역사 속 모습이 너무나 복잡하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이 하나 있다.


문정왕후와 윤원형이 권력을 잡고 있던 동안 조선정치가 크게 혼란스러웠고, 그 피해는 결국 백성들에게 돌아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시기 어린 나이에 왕이 되었던 명종은 무엇을 했을까?


명종은 정말 어머니에게 끌려다니기만 했던 왕이었을까?


그리고 이 무렵 조선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도적 가운데 한 사람인 임꺽정은 왜 등장했을까?


다음 편에서는 명종 정치와 을묘왜변, 그리고 임꺽정 이야기를 살펴보기로 하겠다.


마지막 초상화는 인종 상상화


ㅡ 초롱박철홍 ㅡ

월, 화, 수, 목, 금, 토 연재
이전 23화초롱초롱 박철홍의 조선사도 흐른다! 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