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 1 ㅡ학문을 좋아했던 왕, 위기에서는 왜 달랐을까?
초롱초롱 박철홍의 조선사도 흐른다! 55
ㅡ 선조 1 ㅡ
(학문을 좋아했던 왕, 위기에서는 왜 달랐을까?)
내가 학창 시절 배운 역사와 당시 접했던 이야기 속에서 조선시대 나쁜 왕을 꼽으라면 먼저 떠오르는 인물은 '연산군'과 '광해군'이었다. 반면 오늘 이 글의 주인공 '선조'는 '임진왜란'이라는 조선 최대 전란을 이겨낸 왕으로 기억했다. 묘호에도 '종'이 아닌 '조'가 붙었으니 나라를 다시 일으킨 훌륭한 왕으로 받아들이기 쉬웠다. 그러나 묘호는 오늘날 우리가 매기는 역사 성적표가 아니다. 후대 왕실과 집권세력이 부여한 정치적 평가도 담겨 있다.
지금 역사를 다시 배우고 쓰는 나에게 조선 최악 왕을 꼽으라면 주저 없이 '인조'를 뽑겠다. 그리고 다음이 '선조'다.
내가 가장 무겁게 보는 기준은 백성 생명과 삶을 지켜야 할 군주바카라임이다.
연산군이 폭군이었다는 사실은 부정하기 어렵다. 그렇다고 그가 백성에게 끼친 고통을 가볍게 볼 생각도 없다. 다만 선조나 인조처럼 나라 전체가 전란에 휩싸인 시대와 비교하면 군주바카라임 무게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연산군 역시 폭군이라는 결론과 별개로, 당시 상황과 그가 그렇게 변해간 과정을 좀 더 깊이 살펴볼 필요가 있다.
광해군에 대한 평가도 많이 달라졌다. 한때 폭군으로만 기억되던 그를 이제는 외교적 판단력이 뛰어났던 군주로 평가하기도 한다. 명과 후금 사이에서 전쟁에 휘말리지 않으려 했던 외교, 경기도에서 시작한 대동법, 동의보감 완성과 간행 등이 대표적인 치적이다. 물론 궁궐공사에 따른 부담과 왕실 내부 비극 등 잘못도 적지 않았다. 광해군 편에서 자세히 다루겠다.
내가 인조를 조선 최악의 왕으로 꼽는 이유도 앞으로 나올 것이다.
그렇다고 모든 잘못을 인조 한 사람에게 돌릴 수는 없다. 인조반정으로 권력을 잡은 서인 집권세력도 함께 바카라임져야 한다. 그래도 최종 결정을 내려야 했던 국왕바카라임이 가장 크다고 나는 생각한다.
인조를 단순히 독단적인 군주로만 이해하기도 어렵다. 신하들의 주장을 들으면서도 결정을 미루거나 상황에 끌려간 모습이 있었다. 남한산성에서 '최명길'로 대표되는 '주화론'과 '김상헌'으로 대표되는 '척화론' 사이에 놓였을 때도 고민은 깊었을 것이다.
그러나 많이 듣고 오래 고민하는 것만으로 좋은 결정이 나오지는 않는다.
소통과 결단!
요즈음 이재명 대통령 소통방식을 둘러싼 논쟁을 보면서도 생각하게 되는 문제다. 늦은 시간 SNS에 글을 올려 국민과 직접 소통하는 방식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있고, 국무회의 생중계를 둘러싼 논란도 있다. 일부 장관들이 생중계 축소를 건의했다는 보도가 나왔지만, 총리실과 대통령 측은 관련 보도 내용을 반박했다. 따라서 국무위원들이 집단적으로 반대하고 나섰다고 단정할 일은 아니다. 다만 공개된 자리에서는 국무위원들이 대통령에게 다른 의견을 말하기 어려워지는 것 아니냐는 문제제기는 생각해 볼 만하다. 반대로 국민은 국정이 어떻게 논의되는지 직접 볼 권리가 있다. 국민에게 설명하는 소통과 참모들 이견을 듣는 소통은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많이 듣되 결정할 때는 결정하고, 그 결과에도 바카라임지는 것이 지도자의 자리일 것이다.
물론 오늘날 대통령과 조선 국왕을 그대로 비교할 수는 없다. 다만 지도자가 누구의 말을 어떻게 듣고 무엇을 결정해야 하는지는 시대를 넘어 되풀이되는 문제다.
인조 이야기는 뒤에 인조 편에서 자세히 다루고, 이제 내가 두 번째로 비판적으로 보는 선조를 만나보자.
선조는 참 복합적인 인물이다.
역사 속 어떤 인물도 좋은 점만 있거나 나쁜 점만 있지는 않다. 우리가 성웅으로 모시는 '이순신'이나 조선 대표적인 성군 '세종'도 모든 판단과 정바카라에서 완벽했던 것은 아니다.
앞서 세종 편에서 언급했듯 노비 신분의 세습과 주인에 대한 고소를 제한한 제도 역시 비판적으로 살펴볼 문제다.
특히 세종 때에는 태종 때 시행한 '종부법'을 폐지하고, 양인 아버지와 여종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가 어머니 신분을 따르도록 되돌린 '종모법'을 시행했다.
당시 지배층은 나름의 이유와 질서를 내세웠겠지만, 그것이 노비가 된 사람들의 고통까지 정당화해주지는 않는다. 시대적 배경을 이해하는 일과 그 제도를 옳다고 평가하는 일은 다르다.
선조 역시 장점과 한계를 함께 살펴야 제대로 보이는 인물이다.
더구나 선조시대에는 우리 역사에 이름을 남긴 수많은 인물이 활동했다.
이황과 기대승, 이이와 성혼, 유성룡과 이산해, 정철과 정여립, 그리고 이순신과 권율, 곽재우와 김덕령, 허준과 허균까지…
학문과 정치, 전쟁과 문학에서 익숙한 이름들이 줄줄이 등장한다.
선조 초기에는 학문을 존중하고 인재를 등용한 정치를 높이 평가하기도 한다. 그러나 사림이 정국을 주도하면서 '붕당정치'가 본격적으로 시작됐고, 마침내 임진왜란이라는 거대한 전쟁을 겪었다.
한 시대에 이렇게 많은 인물이 역사 교과서에 등장한 경우도 드물 것이다. 나라 안팎에서 큰 변화가 몰려왔던 '구한말'과 비교할 수 있을까?
나라가 큰 위기를 겪으면 그에 맞서는 인물도, 혼란을 이용하는 인물도 나타나기 마련이다.
선조는 1552년, 명종 7년에 '중종' 서자 '덕흥군'과 하동부대부인 정씨 사이에서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왕이 되기 전 군호는 '하성군'이었다.
덕흥군에게는 하원군, 하릉군, 하성군 세 아들이 있었다. 그중 막내가 왕위에 오른 것이다.
1567년 명종이 후사 없이 세상을 떠나자 '인순왕후' 뜻에 따라 하성군이 왕위를 이었다. 당시 나이는 열여섯이었다.
선조는 '명종' 조카였다. 중종을 기준으로 보면 직계 손자지만, 왕위를 넘겨준 명종을 기준으로 보면 '방계혈족'이었다. 흔히 선조를 조선 최초의 방계 출신 국왕이라고 설명하는 이유다.
더욱 주목할 점은 아버지 덕흥군이 중종 서자였다는 사실이다. 왕의 서자 집안에서 태어나 세자 과정을 거치지도 않은 소년이 갑자기 왕이 된 것이다.
성종 역시 예상 밖에 왕이 됐지만 세조 적손이었다는 점에서 선조와는 처지가 달랐다.
선조가 즉위했을 때 아버지 덕흥군은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다. 어머니 정씨도 즉위 직전에 세상을 떠났다. 선조는 뒤에 아버지를 덕흥대원군으로 추존했다. 조선 최초 대원군이다.
대원군은 자신이 왕은 아니면서 아들이 왕위에 오른 경우 그 생부에게 준 존호다. 조선에서는 덕흥대원군, 정원대원군, 전계대원군, 흥선대원군 네 사람이 있었다. 이 가운데 생전에 대원군이 되어 권력을 행사한 사람은 '고종' 아버지 "흥선대원군' 뿐이었다.
나도 예전에는 대원군이라면 흥선대원군 한 사람만 있는 줄 알았다.
조선은 적장자 계승을 원칙으로 삼았지만 실제 왕위는 반드시 그 원칙대로 이어지지 않았다. 아들이 없어 동생이나 조카가 왕이 되기도 했고, 반정이나 왕위 찬탈로 왕이 바뀌기도 했다.
그러나 원칙이 자주 지켜지지 않았다고 해서 적통을 중시하는 생각까지 약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정통성에 대한 시비는 왕에게도 큰 부담이었다.
선조가 자기 출신을 얼마나 의식했는지 속마음까지 알 수는 없다. 다만 서자 집안 셋째 아들로 태어나 갑자기 왕이 된 처지가 왕권과 정통성에 대한 불안을 키웠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즉위 초기에는 명종비 인순왕후가 수렴청정했고 원상들이 국정을 도왔다. 그러나 인순왕후는 이듬해 수렴청정을 거두었고, 선조는 직접 정사를 돌보기 시작했다.
1569년에는 '박응순' 딸을 왕비로 맞았다. '의인왕후'다. 그러나 두 사람 사이에는 자녀가 없었다.
대신 후궁들에게서 여러 왕자와 공주가 태어났다. '공빈김씨'에게 태어난 '임해군'과 '광해군', '인빈 김씨'에게서 태어난 '정원군' 등이 그들이다. 정원군은 훗날 인조의 아버지가 된다.
이 가족관계를 기억해 두면 앞으로 나올 광해군과 인조 이야기를 이해하기가 쉬워진다.
선조는 의인왕후가 세상을 떠난 뒤인 1602년, 선조 35년에 '김제남' 딸을 새 왕비로 맞았다. '인목왕후'다. 당시 나이로 선조는 쉰한 살, 인목왕후는 열아홉 살이었다. 나이 차이가 서른두 살이나 됐다.
인목왕후는 '정명공주'와 '영창대군'을 낳았다. 드라마 '화정'의 주인공으로 알려진 정명공주도 이때 등장한다.
선조는 오십 대에도 자녀를 보았다. 그러나 왕실의 늦둥이 탄생은 한 집안의 기쁨으로 끝나지 않았다.
광해군은 임진왜란이 일어난 직후 세자로 바카라봉됐다. 이후 분조를 이끌고 각지를 다니며 의병과 군량 모으는 등 전란 수습하는데 힘을 보탰다. 그렇게 오랫동안 세자 자리를 지키고 있었는데, 뒤늦게 왕비에게서 적자인 영창대군이 태어난 것이다. 광해군 아들보다도 어린 이복동생이었다.
문제는 선조가 자녀를 많이 낳았다는 데 있지 않았다. 이미 세자로서 역할을 해온 광해군과 새로 태어난 적자 사이에서 왕위계승을 둘러싼 불안과 갈등이 커졌다는 데 있었다. 그리고 그 갈등은 훗날 왕실 비극으로 이어진다.
이 이야기는 광해군 편에서 자세히 살펴보자.
정치적으로 선조 즉위는 사림이 정국의 중심에 서는 중요한 계기였다.
앞서 살펴봤듯 사림은 '성종' 때 중앙정계 진출을 넓혔지만 연산군 때 '무오사화'와 '갑자사화'를 겪으며 큰 타격을 받았다.
중종 때에는 '조광조'를 중심으로 다시 정치 전면에 나섰다. 그러나 성리학적 이상을 빠르게 실현하려던 조광조와 이를 부담스러워한 중종, 기존 공신세력 사이의 충돌은 '기묘사화'로 끝났다.
나는 조광조 정치를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개혁과 그대로 같다고 보지는 않는다. 다만 당시 사림이 내세운 정치적 이상과 그 좌절이 이후 사림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그 뒤에도 사림은 사라지지 않았다. 지방에서 학문과 인맥을 쌓았고 다시 중앙으로 진출했다. '인종'은 이들에게 우호적이었지만 재위가 너무 짧았다.
'명종' 때에는 '문정왕후'와 '윤원형'을 중심으로 한 '소윤'세력 권력을 잡았다. '을사사화'와 '정미사화'로 많은 사람이 죽거나 유배됐다.
이는 앞 편 등에서 자세히 살펴봤다.
그러나 문정왕후가 세상을 떠나고 윤원형이 몰락하면서 정국은 달라졌다. 명종 말기에 시작된 변화가 선조 즉위 뒤 더욱 빨라진 것이다.
선조는 '유희춘'과 '노수신' 등을 다시 기용했다. 이미 세상을 떠난 '이언적'과 '권벌' 등을 복권하고, 조광조에게도 시호와 벼슬을 추증했다. '이황'과 '이이' 같은 학자들을 예우하고 인재등용에도 힘썼다.
다만 선조가 아직 혼인하지 않았다고 해서 당시 외척세력까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인순왕후 친정 심씨처럼 기존 왕실과 연결된 외척이 있었고, 이들의 정치적 영향력도 남아 있었다.
이렇게 사림은 오랜 탄압을 지나 마침내 정국을 주도하게 됐다.
그러나 사림이라고 모두 같은 생각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누구를 등용하고 어떤 정치를 할 것인지, 외척을 어떻게 볼 것인지, 선배와 후배 사림 사이의 관계를 어떻게 정리할 것인지에서 차이가 드러났다.
결국 1575년, 선조 8년에 '심의겸'과 '김효원'을 중심으로 '서인'과 '동인'이 갈라졌다.
이황과 이이의 학문적 차이도 뒤에 각 학파와 정치세력을 이해하는 중요한 배경이 된다. 그러나 이기론 차이 때문에 곧바로 동인과 서인이 생겼다고 이해하면 곤란하다.
'붕당'은 정치적 갈등과 인사 문제, 학맥과 인맥에 철학이 결합하면서 형성됐다.
이 이야기는 '붕당정치' 편에서 자세히 다루겠다.
선조는 그 갈등을 조정하기도 했지만, 때로는 특정세력에 힘을 실어주거나 다른 세력을 견제하면서 왕권을 유지했다. 따라서 붕당의 잘못을 신하들에게만 돌릴 수는 없다.
선조는 본래 학문을 좋아했다. 즉위 초기부터 경연에 나가 경전과 역사를 토론했고 독서에도 힘썼다. 이황과 이이 등을 극진히 대우한 것도 단순히 출신에 대한 불안 때문이라고만 설명할 일은 아니다.
좋은 정치를 해보려는 뜻과 학문적 관심, 자신의 왕권을 지키려는 생각이 함께 작용했을 것이다.
선조의 검소함과 효성을 전하는 기록도 있다. 두 대비를 정성껏 모셨고, 음식과 의복을 절제했으며, 농민들의 수고를 생각해 낭비를 경계했다고 한다. 서화에도 재주가 있었다.
이런 모습만 보면 무능하거나 게으른 왕과는 거리가 멀다.
허준 '동의보감'도 선조 때 시작됐다. 1596년 선조의 명으로 편찬에 착수했고, 전쟁으로 중단되는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작업을 이어갔다. 마침내 광해군 2년인 1610년에 완성됐고 1613년에 간행됐다.
선조가 시작하게 했고, 허준이 오랜 세월 집필했으며, 광해군 때 완성과 간행이 이루어진 것이다. 어느 한 왕의 치적으로만 설명할 일은 아니다.
그렇다고 선조가 전쟁 전에는 성군이었는데 임진왜란 때문에 갑자기 나쁜 왕이 됐다고 볼 수도 없다. 전쟁 이전 '정여립 난'으로 일어난 '기축옥사'에서도 선조의 정치적 바카라임을 살펴야 한다.
학문을 좋아하는 것과 옳은 정치를 하는 것은 같지 않다. 인재를 알아보고 등용하는 능력과 그 인재를 끝까지 믿고 제 역할을 하게 하는 능력도 다르다.
선조가 인재등용에서 보여준 안목도 인정해야 한다. 대표적인 사례가 '이순신'이다. 선조는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인 1591년, 정읍현감이던 이순신을 전라좌수사로 파격적으로 발탁했다. 유성룡의 적극적인 천거가 있었다고 해도 최종적으로 그 인사를 결정한 사람은 선조였다. 추천하는 신하가 있어도 이를 받아들이는 왕의 결단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권율'의 능력을 인정하고 중용한 점도 마찬가지다. 광주목사였던 권율은 이치전투에서 공을 세운 뒤 전라도관찰사로 올라섰고, 행주대첩 이후에는 도원수로서 군사를 지휘했다. 전공을 세운 인물에게 더 큰 바카라임을 맡긴 것 역시 선조의 인사에서 평가할 부분이다.
이순신과 권율이 나라를 지킨 공은 물론 두 사람에게 있다. 그러나 그들이 능력을 펼칠 자리에 오르도록 한 선조의 공까지 지울 필요는 없다. 선조를 비판하더라도 잘한 일은 잘했다고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선조가 가장 크게 비판받는 이유도 이순신에게 있다. 자신이 파격적으로 발탁한 장수를 잡아들여 고문하고, 죽이려다가 구명 끝에 백의종군하게 했기 때문이다. 그 장수가 훗날 우리 역사에서 성웅으로 추앙받는 이순신이다. 능력을 알아보고 중용한 것은 선조였지만 정작 나라가 위태로울 때 그를 믿지 못하고 무너뜨리려 한 것도 선조였다. 가장 빛나는 인재 등용이 가장 뼈아픈 비판으로 돌아왔으니 참으로 역사의 아이러니다.
선조를 살피다 보면 바로 이 차이를 자꾸 만나게 된다. 자신이 '충용장'이라는 칭호까지 내렸던 의병장 '김덕령'도 역모혐의로 잡아들여 끝내 고문으로 죽게 했다. 나라를 지키겠다고 나선 의병장마저 억울하게 죽는 모습을 보면서 누가 마음 놓고 목숨을 걸 수 있었겠는가. 이듬해 정유재란 때 호남은 왜군에게 짓밟혀 참혹한 피해를 입었다. 그 원인을 김덕령의 죽음 하나로 돌릴 수는 없지만 나라를 지킬 사람들을 의심하고 꺾어버린 선조 바카라임이
가장 크다.
선조는 나라가 위태로울 때 의병을 나라를 살릴 구원군으로 치켜세웠다. 그러나 명나라 원군이 들어오고 전황이 달라지자 의병을 군량만 축내는 존재로 보거나 해산을 추진했고, 김덕령처럼 역모 혐의에 휘말려 고문 끝에 목숨을 잃은 의병장도 있었다.
나는 이런 태도에서 왜군과 싸우며 힘을 얻은 의병들이 훗날 왕권을 위협할 수도 있다는 선조 경계심을 읽는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 일어난 백성의 힘을 끝까지 믿기보다 자신 권력을 위협할 가능성부터 두려워했다. 이것이 내가 선조를 조선 최악의 왕 가운데 한 사람으로 꼽는 데 주저하지 않는 이유다. 이순신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그는 무조건 어리석은 왕이 아니었다. 야비하가 졸렬하기는 했지만 이런 정치적 판단력도 있었고 학식도 있었다. 그래서 오히려 묻게 된다.
'그런 왕이 왜 나라의 가장 큰 위기에서는 백성에게 그토록 큰 실망을 안겼을까?'
물론 임진왜란을 일으킨 바카라임은 조선 침략한 '도요토미히데요시'와 일본에 있다. 침략당한 나라의 왕에게 전쟁자체 바카라임을 돌릴 수는 없다. 그러나 침략에 얼마나 대비했는지 전쟁이 터진 뒤 무엇을 먼저 지키려 했는지 싸우는 장수와 백성을 어떻게 대했는지는 따져야 한다. 그것은 나라를 다스린 군주바카라임이기 때문이다.
나라의 최고 위기 때 최고 지도자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한다면 그 고통은 백성에게 돌아간다.
임진왜란과 정묘호란, 병자호란, 구한말의 국권 상실과 6·25 전쟁을 돌아볼 때도 나는 같은 질문을 하게 된다.
'나라가 위기에 빠졌을 때 지도자는 무엇을 했으며, 백성은 무엇을 감당해야 했는가?'
'우리는 이런 국가적 큰 위기 시 국가 최고지도자 복이 이토록 없을까?'
시대마다 사정이 다르고 지도자에게 돌릴 바카라임의 범위도 다르다. 그러나 강대국 사이에 놓였다는 사정이나 신하들 의견이 갈렸다는 이유만으로 지도자의 바카라임까지 사라지지는 않는다.
이제 선조시대에 일어난 일들을 하나씩 살펴보려 한다.
학문과 붕당, 왕권과 신권, 전쟁과 외교, 왕위계승과 왕실의 비극까지… 그 속에서 서로 다른 선택을 했던 수많은 인물도 만나게 될 것이다.
선조 한 사람을 비판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 시대 조선이 왜 그런 길로 나아갔는지 함께 생각해보려 한다.
앞서 말했듯 등장할 인물과 사건이 워낙 많아 선조 편은 다른 왕들 편 보다 훨씬 길어질 것이다.
이어서 선조 2가 이어집니다.
ㅡ 초롱박철홍 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