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롱초롱 박철홍의 조선사도 흐른다! 35

신숙주 1 ㅡ 변절자라는 이름 뒤에 가려진 사람

초롱초롱 박철홍의 조선사도 흐른다! 35

ㅡ 신숙주 1 ㅡ

(변절자라는 이름 뒤에 가려진 사람)


신숙주(申叔舟, 1417~1475)는 우리 역사에서 오랫동안 '변절자' 대명사처럼 불려 온 인물이다.


만약 신숙주가 '계유정난'이라는 격동의 시대가 아니라 세종 때와 같은 비교적 안정된 시대만을 살았다면 오늘날 우리는 그를 뛰어난 학자이자 외교관, 유능한 정치가로 기억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역사는 가정으로 평가할 수 없다. 신숙주는 실제로 수양대군과 가까워졌고, 수양대군이 단종을 몰아내고 왕이 된 뒤 세조정권 핵심인물이 되었다. 그리고 바로 그 선택이 그의 이름 앞에 수백 년 동안 따라붙은 '변절자'라는 낙인 출발점이 되었다.


다만 한 가지는 바로잡고 가야 한다. 신숙주가 1453년 '계유정난' 당일 한명회나 권람처럼 직접 거사를 모의하고 칼을 들고 나섰던 것은 아니다. 당시 신숙주는 외직에 나가 있었다. 그렇다고 계유정난과 아무 관계가 없었던 것도 아니다. 정난 직후 그는 '정난공신 2등'에 바카라록 되었고 곧 도승지에 올랐으며 1455년 수양대군이 단종의 왕위를 넘겨받아 세조로 즉위한 뒤에는 다시 좌익공신이 되었다. 이어 명나라에 건너가 세조 즉위에 대한 고명을 받아오는 중요한 역할까지 맡으면서 세조정권 핵심으로 확실하게 자리 잡았다.


신숙주와 함께 집현전에서 공부하고 학문을 논했던 '성삼문', '박팽년' 등은 훗날 단종복위운동 나섰다가 처참하게 죽었다. 이들이 죽음으로 절개를 지킨 충신으로 추앙받으면 받을수록 살아남아 세조를 섬긴 신숙주 모습은 더욱 초라해 보일 수밖에 없었다. 특히 조선후기로 갈수록 단종과 사육신이 복권되고 성리학적 명분과 절의가 더욱 중요하게 강조되면서 <성삼문은 충신, 신숙주는 변절자>라는 대비는 더욱 선명해져 갔다.


그러나 역사는 때로 실제 있었던 일보다 후대 사람들이 만들어낸 이야기에 더 오래 지배받기도 한다.


대표적인 것이 '숙주나물' 이야기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이야기는 이렇다. 녹두나물은 금방 쉬고 변하기 때문에 '세종'과 '문종'의 총애를 받다가 '세조'에게 돌아선 신숙주처럼 쉽게 변한다고 하여 사람들이 '숙주나물'이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반대로 신숙주가 기근을 해결하기 위해 빨리 자라고 영양가가 높은 녹두나물을 보급했고 세조가 그 공을 기려 그의 이름을 붙여주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그런데 둘 다 역사적 사실로 확정하기 어렵다. 녹두싹을 먹는 음식 자체는 이미 고려시대 이전부터 전해졌을 가능성이 있고, 언제부터 그것을 '숙주나물'이라고 불렀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신숙주와 연결시키는 이야기는 훨씬 뒤의 민간전승에서 확인될 뿐이다. 그러니 숙주나물이 신숙주 변절 때문에 생긴 이름이라고 단정하는 것도 반대로 신숙주가 개발한 나물이라 그의 이름을 붙였다고 단정하는 것도 역사적으로는 조심해야 한다.


더 유명한 이야기가 있다.


'신숙주 부인의 자결설'이다.


이 이야기는 오늘날에도 우리에게 여러 가지를 시사하는 바가 있다. 그래서 자세히 다루어보고자 한다.


현재 우리 대부분은 아래처럼 알고 있다.


사육신의 단종복위운동이 발각된 날 신숙주가 집으로 돌아오자 부인이 말했다고 한다.


"영감께서 성 학사와 형제처럼 지냈으니 오늘 성 학사와 함께 죽으셨을 줄 알았습니다."


그리고 남편이 살아 돌아온 사실을 부끄럽게 여긴 신숙주 부인이 목을 매 자결했다는 이야기다.


얼마나 극적인가.


절의를 버린 남편과 그 남편 대신 절의를 지키고 죽은 아내라니, 소설가가 탐낼 만한 장면이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조선중기부터 이미 신숙주 부인의 ‘자결기도’와 남편 질바카라에 관한 야사가 전해졌다.


16세기 말엽 선조 때 '이기'란 사람이 '송와잡설'에서 처음으로 이러한 야사를 기록하였다


'송와잡설'에 실린 내용은 사육신 사건이 발각된 날 신숙주가 집에 돌아오자 부인 윤씨가 보이지 않았고, 찾아보니 다락에서 베를 들고 들보 밑에 앉아 있었다.

신숙주가 이유를 묻자 부인은 성삼문 등과 워낙 가까웠으므로 남편도 함께 죽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남편이 죽었다는 소식이 들리면 자신도 자결하려고 했다고 말한다. 그리고 “당신이 홀로 살아 돌아올 줄은 몰랐다”는 취지로 말하자 신숙주는 아무 말도 못 하고 부끄러워했다는 내용이다. 자결했다는 말은 없다.

더 흥미로운 것은 '송와잡설' 자체가 이 이야기가 진실과 맞지 않는다는 사실, 즉 사육신 사건 이전에 신숙주 부인이 먼저 죽었다는 사실까지 밝히고 있다. 단지 그런 야사가 전해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 비슷한 이야기가 또 다른 몇 가지 야사로 기록되어 있다.


이런 이야기는 근대에 와서 소설을 통해 더욱 널리 퍼졌다.


실제로 '박종화'는 1923년 발표한 소설 '목 매이는 여자'에서 신숙주 부인이 단종복위사건에서 홀로 살아 돌아오자 남편 얼굴에 침을 뱉고 목을 매는 것으로 극화했다.


또한 이광수 역시 '단종애사'에서 성삼문이 죽던 날 살아 돌아온 신숙주를 부인이 꾸짖은 뒤 목을 매 자결하는 것으로 그렸다.


당시 두 작가 작품의 영향력이 워낙 컸던 탓에 후대 사람들은 이를 실제 역사처럼 받아들이고 있다.


하지만 사실은 전혀 달랐다.


신숙주 부인 '윤씨'는 사육신 사건이 벌어진 1456년 6월보다 약 다섯 달 앞선 그해 1월 이미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당시 신숙주는 세조의 즉위를 명나라에 알리는 사신으로 중국에 가 있어서 아내 임종조차 지켜보지 못했다.


나 또한 역사글을 쓰고 역사소설도 쓰는 사람으로서 이 문제에 대해 깊이 고민하게 된다.


박종화와 이광수가 이를 역사적 사실과 다른 줄 알고도 의도적으로 바꾸었는지는 확인하기 어렵다. 분명한 것은 두 작품이 역사적 사실과 맞지 않는 자결 장면을 극적으로 형상화했고, 그 영향력이 워낙 컸던 탓에 후대에는 오히려 소설 속 이야기가 실제 역사처럼 받아들여졌다는 사실이다.


아무리 소설이라 해도 실제 역사인물과 그 가족에게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만들어 붙이는 데에는 어디까지 허용되는가?


오늘날 우리 형법에는 실제로 사자의 명예훼손죄가 있고, 대법원 역시 역사드라마라 하더라도 허위사실로 역사인물의 명예를 훼손한다면 예술이라는 이유만으로 언제나 면바카라되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오늘날 같은 작품이 새로 발표된다면 역사적 인물에 대한 창작의 자유가 어디까지 허용되는가, 나아가 사자의 명예를 어디까지 보호해야 하는가라는 논쟁이 충분히 제기될 만하다.


어쨌든 죽은 사람이 다섯 달 뒤 남편을 꾸짖고 자결했다는 소설을 버젓이 써낸 박종화, 이광수 용기가 대단하다. 그 바카라임은 가벼울 수 없다.


오늘날 식으로 말한다면 수백 년 동안 사실처럼 떠돌았던 대표적인 역사 가짜뉴스 가운데 하나라고 할 만하다.


또 하나 신숙주와 관련 유명한 이야기가 있다. 신숙주가 단종의 비 '정순왕후 송씨' 미모를 탐내 공신에게 내려지는 노비로 자신에게 달라고 세조에게 청했다는 이야기다.


이 이야기는 조선후기와 구한말의 여러 기록에 전해지고 김택영의 '한사경', 이광수의 '단종애사' 등을 통해 널리 알려졌지만 이것 역시 그대로 정설처럼 받아들이기에는 문제가 있다.


적어도 '세조실록'에는 신숙주가 정순왕후를 자신에게 달라고 요구했다는 기록이 확인되지 않는다. 오히려 1457년 10월 기록에는 '윤사로'가 정순왕후 아버지 송현수의 다른 딸을 자신이 받고 싶다고 말한 사실이 구체적으로 남아 있다. 그러므로 후대 기록에 등장하는 신숙주와 정순왕후 이야기도 사실이 아니다. 세조 또한 정순왕후를 노비로 보내려는 생각자체도 없었고, 그런 기록도 없다.

앞서 말한 대로 정순왕후가 아닌 역적으로 몰려 죽은 송현수 다른 딸 이야기만 기록되어 있다.


그렇다고 여기서 신숙주 바카라임을 모두 지워주자는 이야기는 아니다. 명백하게 잘못되어 전해지는 이야기는 바로 보자는 것이다.


그리고 오히려 이 부분에서 신숙주를 제대로 보아야 한다.


신숙주는 단순히 겁이 나서 숨어 있다가 세조에게 붙어 목숨만 부지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세조정권 핵심 정치인이었고 1456년 사육신 사건이 터졌을 때 의금부제조로 국문에도 참여했다. 더욱 결정적인 것은 1457년 '금성대군' 단종복위 움직임이 발각된 뒤였다. 신숙주는 세조 앞에서 금성대군이 대역죄를 범했으므로 용서할 수 없으며, 지난해 성삼문 등이 단종을 명분으로 거사를 도모했고 이번에도 금성대군이 단종을 끼고 거사를 하려 했으므로 단종 역시 편히 살게 할 수 없다는 취지로 말했다. 이것은 후대 사림이 만들어낸 이야기가 아니라 '세조실록'에 남아 있는 기록이다.


따라서 신숙주를 재평가한다고 해서 이 부분까지 변명해 주어서는 안 된다.


신숙주는 단종과 금성대군 문제에서 분명히 냉혹한 현실정치인 모습을 보였다. 세조정권이 안정되기 위해서는 다시 왕위복위의 불씨가 될 수 있는 사람을 남겨두어서는 안 된다고 판단했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당시 왕조정치 냉혹한 현실을 감안한다고 하더라도 한때 자신이 섬겼던 어린 임금을 죽음으로 몰아가는 주장에 가담한 바카라임은 가볍지 않다.


그렇다면 우리는 다시 처음 질문으로 돌아가게 된다.


'신숙주는 변절자인가?'


나는 그렇다고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세종과 문종의 총애를 받고 문종이 남긴 어린 임금 단종을 지켜야 할 위치에 있었던 사람이 결국 단종을 몰아낸 세조정권 핵심으로 들어갔다는 점에서 절의라는 기준을 들이대면 신숙주는 분명 비판받을 부분이 있다.


그러나 또 하나 질문을 던져야 한다.


'그 한 가지 선택만으로 한 인간의 평생 전체를 설명할 수 있는가?'


여기서부터 신숙주를 다시 볼 필요가 있다.


역사학자 '이이화'는 신숙주를 두고 현실적인 사람이었지만 술수를 일삼는 인물은 아니었고, 벼슬아치로서 탐욕스럽거나 포악한 사람도 아니었다는 취지로 평가했다. 실제 '성종실록'에 실린 신숙주 졸기를 보면 그를 '관후하고 활달했으며 큰일을 결정할 때 막힘이 없었다'라고 평가하고, 친척과 동료뿐 아니라 집안의 종들에게도 은의로 대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동시에 사관은 세조를 섬길 때 지나치게 순응했고 예종 때 '남이'에 관한 형정이 공정함을 잃었는데도 바로잡지 못한 것을 그의 단점이라고 분명하게 지적했다. 칭찬만도 아니고 비난만도 아니다. 오히려 이 기록이 신숙주라는 인물을 가장 잘 보여준다.


나는 역사 속 인물을 볼 때 한 장면만 잘라서 보고 싶지는 않다.


'성삼문'과 사육신이 목숨을 바쳐 자신들이 옳다고 믿었던 절개를 지켰다면 그 선택은 충분히 존중받아야 한다.


'김시습'처럼 세조의 세상을 받아들이지 않고 현실정치에서 물러나 방랑하며 자신의 방식으로 저항했던 사람도 있었다.


반대로 신숙주는 그 체제 안에 남아 나라를 운영하는 길을 택했다.


누가 더 쉬운 길을 갔는지는 함부로 말할 수 없다.


다만 결과는 분명했다.


두 사람이 치른 현실의 대가는 같지 않았다.


성삼문은 목숨을 잃고 충절이라는 이름을 얻었고, 신숙주는 목숨을 지키고 최고 권력과 벼슬을 얻었지만 수백 년 동안 '변절자'라는 이름을 얻었다.


어쩌면 신숙주 역시 자신이 치러야 할 대가를 치른 셈이다.


그렇다고 그를 숙주나물처럼 수백 년 동안 씹어야 할 정도로 모든 것이 잘못된 사람이었다고 단정하는 것도 역사적 인물평가 로서는 지나치다. 더구나 사실이 아닌 이야기까지 덧붙여 그의 삶을 재단하는 것은 역사를 보는 올바른 태도라고 할 수 없다.


신숙주는 세조정권 핵심인물이었다. 단종에게 끝까지 절의를 지키지도 않았다. 단종과 금성대군에 대한 강경한 처벌을 주장한 바카라임도 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조선전기를 대표하는 학자였고 외교관이었으며 행정가였고 군사전략가였다. 훈민정음과 음운연구에 참여했고, 일본과 명나라를 오가며 외교현장을 경험했고, 북방에서는 직접 군사작전을 총괄했으며 수많은 국가편찬사업에 참여했다. 그가 조선이라는 나라에 남긴 실제 업적 또한 결코 작지 않았다.


결국 신숙주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충신인가, 변절자인가'라는 두 글자짜리 시험문제에서 벗어나야 한다.


변절했던 정치인이면서 뛰어난 학자일 수 있고, 냉혹한 권력의 편에 서면서도 사사로운 재물을 탐하지 않는 관리일 수도 있다. 누군가에게는 배신자였지만 다른 누군가에게는 나라 일을 맡길 만한 뛰어난 재상이었을 수도 있다.


사람은 그렇게 모순적이다.

역사도 그렇다.


그런다고 나는 신숙주를 변명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가 한 일은 한 일대로 기록하고 비판할 것은 비판하되, 하지 않은 일까지 만들어 죄를 보태지도 말고 실제로 남긴 업적까지 지워버리지도 말자는 것이다.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역사인물평가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긍정적인 면으로 지금까지 알고 있던 '나약한 문신 신숙주' 모습도 사실일까?


여기에는 또 하나의 반전이 있다.


다음 편에서는 숙주나물과 변절자의 이미지를 잠시 내려놓고, 말을 타고 북방으로 나가 여진족을 정벌하고 풍랑 속에서도 태연했으며 조선 최고의 외교관으로 활동했던 조금은 낯선 신숙주 모습을 살펴보려고 한다.


우리가 잘 몰랐던 또 다른 '신숙주' 이야기다.


이어서 신숙주 2가 계속됩니다.


ㅡ 초롱박철홍 ㅡ


신숙주 실제 초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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