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롱초롱 박철홍의 조선사도 흐른다! 37

세조 치적과 권신들 ㅡ나라를 강하게 만든 사람들과 권력이 남긴 그림자

초롱초롱 박철홍의 조선사도 흐른다! 37

ㅡ 세조 치적과 권신들 ㅡ

(나라를 강하게 만든 사람들과 권력이 남긴 그림자)


내 초중고 학창 시절 국사 시간에 배운 기억을 더듬어보면 세조에 대해서는 주로 치적을 배웠던 것 같다. '계유정난' '사육신 사건', '단종죽음'도 배우기는 했지만 지금 내 기억으로는 그리 깊게 다루지 않았던 것 같다. 오히려 <육조직계제, 직전법, 진관체제, 경국대전> 편찬 같은 것이 시험문제에 더 자주 나왔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교과서를 벗어나 일반인들 기억 속 '세조'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남아 있다.


어린 친조카 단종에게서 왕위를 빼앗고 결국 죽음에 이르게 한 냉혹한 왕, 계유정난을 일으켜 '김종서'와 '황보인' 등을 제거하고 권력을 잡은 왕이라는 이미지가 훨씬 강하다.


둘 다 세조 모습이다.


세조가 왕위를 차지한 과정이 피로 얼룩져 있었다는 것도 역사이고, 왕이 된 뒤 적지 않은 제도와 정바카라을 정비했다는 것 역시 역사다.


그래서 오늘은 일단 세조의 왕위찬탈 과정에 대한 도덕적 평가는 앞편에서 여러 차례 다루었으니 잠시 옆으로 내려놓고, 왕이 된 뒤 무엇을 했는지 그리고 그를 도왔던 권신들은 어떤 사람들이었는지를 한번 살펴보려고 한다.


여기서 ‘치적’이라는 말도 조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조선왕들 치적을 이야기할 때 오늘날처럼 국민소득이 얼마였고, 백성들 실질생활이 얼마나 나아졌는지를 정확한 통계로 따지는 것은 아니다.

국가제도를 얼마나 정비했는지, 국방을 얼마나 강화했는지, 법과 행정제도를 어떻게 손보았는지, 국가적 위기를 어떻게 넘겼는지, 어떤 바카라과 법전을 편찬했는지 등을 종합해 평가한다.


그렇게 보면 세조는 분명 조선왕조 제도 정비 과정에서 상당한 흔적을 남긴 왕이다.


세조와 직접 비교하기에는 시대도 너무 다르고 조심스러운 부분이 많지만 그래도 여기서 조금 도발적인 질문 하나를 던져보고 싶다.


솔직히 요즘에도 거의 금기처럼 여겨지는 말이 하나 있다.


바로 ‘전두환 시대 경제성장’에 관한 이야기다.


앞편에서도 말했듯이 내 기억 속 1980년대는 세상이 흑백에서 컬러로 바뀌어가던 시기였다.

실제 텔레비전도 흑백에서 컬러로 바뀌었지만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그것만이 아니다. 군대를 다녀온 뒤 다시 슬롯로 돌아왔을 때 내가 느꼈던 세상 변화가 그만큼 컸다는 뜻이다.


그러나 전두환 정권은 출발부터 너무 많은 피와 상처를 안고 있었다. 특히 광주를 직접 겪은 내게는 더욱 그렇다. 그렇기 때문에 그 정권에서 나타난 어떤 긍정적인 변화나 경제적 성과를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마치 정권 전체를 옹호하는 것처럼 받아들여질까 봐 두렵기도 하다.


그러나 역사를 바라볼 때 정권의 탄생과 정당성, 그리고 그 시대에 나타난 슬롯·경제적 변화까지 모두 하나로 묶어 평가하는 것은 한 번쯤 생각해 볼 문제다.


전두환시대 경제성장률 표를 보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래 사진)


몇백 년 뒤 우리 후손들은 전두환 시대를 어떻게 기록할까?


1980년대 경제성장을 이야기하면서 '김재익' 경제수석과 당시 경제관료들 공만을 이야기할까?


아니면 그들을 발탁하고 경제정바카라을 맡긴 당시 최고권력자 정바카라적 선택 역시 어느 정도 함께 평가할까?


반대로 당시 경제성장을 대통령 한 사람의 치적으로 돌리는 것 역시 지나친 단순화는 아닐까?


당시 경제성장은 이전부터 축적 돼온 산업기반과 수출정바카라, 경제관료들의 정바카라, 국제유가와 금리, 환율 같은 대외여건까지 여러 요인이 함께 작용한 결과이기 때문이다.


이 질문의 답은 여러분들 생각에 맡겨두고 싶다.


오늘 우리가 세조를 이야기할 때 계유정난과 단종 죽음이라는 엄청난 과오를 말하면서도 동시에 세조시대 여러 정바카라과 치적을 따로 살펴보듯이 먼 훗날에는 전두환 정권 역시 ‘정권 탄생의 정당성’과 ‘그 시대에 나타난 경제성장과 슬롯 변화’를 구분해 바라보려 할까?


어쩌면 역사를 제대로 바라본다는 것은 바로 이런 불편한 두 얼굴을 함께 보는 일인지도 모른다.


세조를 이야기하면서 그의 왕위찬탈과 단종 죽음을 지울 수 없듯이 그의 치적 역시 역사에서 지울 수 없다.


1455년 왕위에 오른 세조는 1468년까지 재위했다. 세조가 통치기간 동안 가장 중요하게 추진한 것 가운데 하나는 '왕권강화'였다.


세조는 의정부 중심정치를 약화시키고 육조가 국왕에게 직접 보고하는 '육조직계제'를 강화했다. 세종과 문종시대에 성장했던 집현전도 단종복위운동 뒤 폐지했고 경연 역시 중단했다.


이것을 단순히 ‘성리학을 억압했다’고 표현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다. 세조 역시 성리학 국가 조선의 왕이었다. 다만 대신과 학자들이 국왕을 견제하고 국정에 참여하던 정치구조를 약화시키고 왕에게 권력을 집중시키려 했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하다.


사실 왕조시대 왕권강화를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독재정치와 그대로 같은 개념으로 볼 수는 없다.


강한 왕권이 관료나 지방세력 전횡을 억제하고 국가기강을 바로잡는 역할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반대로 왕권이 지나치게 약해 특정 권신이나 관료집단이 국정을 좌우하면서 부정부패와 권력형 비리가 커지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강한 왕권이라고 반드시 백성의 삶이 나아진 것도 아니었다. 왕의 권력이 지나치게 커지면 숙청과 탄압, 자의적 권력행사로 이어질 수도 있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왕권이 강했느냐 약했느냐 자체가 아니라 그 권력이 어떤 방식으로 행사됐고, 그 결과가 백성들에게 어떻게 돌아갔느냐일 것이다.


세조시대가 바로 그런 모순을 보여준다.


왕권을 강하게 만들었지만 동시에 세조를 도운 공신들이 막대한 특권을 얻으면서 또 다른 권력집단으로 성장했기 때문이다.


세조는 군사력 강화에도 상당한 관심을 기울였다.


중앙군을 '오위체제'로 정비하고 '호패법'을 다시 시행했으며 군적을 정리해 군역에서 빠져나간 사람들을 찾아냈다.


지방군사체제를 정비하고 병기를 만들게 했으며 둔전도 확대했다.


1457년에는 '오위'라는 명칭이 확립됐고 이후 이 제도는 '경국대전'에 법제화됐다.


또한 지방군사체제를 진관체제로 정비해 각 지역 방어체계를 보다 조직적으로 만들었다.


1460년에는 '신숙주' 등이 북방 여진정벌에 나섰고, 1467년 '이시애의 난'을 평정한 뒤에는 '강순'·'남이' 등을 중심으로 건주위 여진 공격도 이루어졌다.


경제제도에서도 큰 변화가 있었다.


'과전법'이 시행된 지 오래되면서 관리들에게 나눠줄 토지가 부족해지자 1466년 과전을 폐지하고 현직 관리에게만 수조지를 지급하는 '직전법'을 시행했다.


퇴직 관리와 산관에게까지 토지를 나눠주던 기존 제도를 줄임으로써 부족해진 수조지를 재정비하려 한 것이다.


다만 직전법 역시 이후 또 다른 문제를 낳았다.


수조권을 가진 관리와 농민 사이에서 수취문제가 계속 발생했고 결국 성종 때에는 국가가 대신 거두어 지급하는 '관수관급제'가 실시됐다.


제도란 한번 만들었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시대 상황에 따라 끊임없이 고쳐지는 것이다.


법전편찬도 세조 중요한 사업이었다.


세조는 기존 법령들을 정리해 조선 통치 기본법전이 되는 '경국대전' 편찬을 본격적으로 추진했다.


세조 때 '호전'과 '형전'이 먼저 완성돼 시행됐고, 이후 이전·예전· 병전·공전까지 정리됐다.


최종적인 경국대전은 여러 차례 수정 끝에 '성종' 때 완성됐지만 그 기반을 본격적으로 닦은 왕은 세조였다.


역사서 편찬에도 관심을 보였다.


'국조보감'을 편찬하게 했고 고대에서 고려까지 역사를 정리하려는 '동국통감' 편찬도 세조 때 시작됐다.


다만 동국통감은 세조 때 완성된 것은 아니다. 1458년 편찬을 시작해 세조 사후에도 작업이 이어졌고 성종 때 완성됐다.


세조는 조선왕들 가운데 불교를 적극 후원한 왕으로도 유명하다.


1461년 '간경도감'을 설치해 불경을 한글로 번역하고 간행했으며 능엄경언해· 법화경언해 등 여러 불서를 국가사업으로 펴냈다.


성리학자들 반발이 있었음에도 불교 후원을 계속했다.


오늘날 서울 탑골공원에 흔적이 남아 있는 원각사 역시 세조 때 세워졌다.


이렇게 놓고 보면 세조를 단순히 ‘조카를 죽이고 왕위를 빼앗은 왕’ 한마디로만 설명하기 어려운 이유도 분명해진다.


하지만 반대로 이런 치적이 계유정난과 단종 죽음, 사육신 처형이라는 피비린내 나는 권력장악 과정을 없던 일로 만들어주는 것도 아니다.


그것이 역사다.


사람 한 명을 완전히 영웅으로 만들기도 어렵고 완전히 악인으로만 만들기도 어렵다.


그리고 세조 곁에는 그와 함께 조선을 움직인 사람들이 있었다.


오늘날 우리는 이들을 흔히 ‘훈구세력’이라고 부른다.


다만 세조 때부터 이미 ‘훈구파와 사림파’가 서로 맞서 싸웠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사림세력이 중앙정계에 본격적으로 등장해 기존 공신·관료세력과 대립하기 시작한 것은 성종 때 이후다.


세조시대 공신들은 왕권을 강화하고 군제·법전·행정제도를 정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동시에 계유정난과 세조 즉위 과정에서 얻은 공신지위와 막대한 토지·노비를 바탕으로 거대한 특권세력으로 성장했다.


공과 과가 너무나 선명하게 함께 존재하는 사람들이다.


그중 몇 사람만 살펴보자.


1. 한명회


한명회(韓明澮, 1415~1487)는 앞에서 두 차례나 자세히 살펴봤으니 여기서는 세조시대 정치가 한명회 모습만 보자.


한명회는 신숙주와는 출발부터 달랐다. 신숙주는 세종과 문종시대 집현전 학사로 성장해 단종을 섬기다가 세조 편에 섰기 때문에 후대에는 ‘변절’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하지만 한명회는 애초부터 단종 측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계유정난을 직접 기획하고 수양대군을 권력 정상까지 끌어올린 핵심 바카라사였다. 그렇다고 한명회가 단종과 사육신 비극에서 자유롭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계유정난 핵심 인물이었고 단종복위운동을 진압하는 과정에서도 세조정권 중심에 있었다.


다만 신숙주와 한명회를 바라보는 후대 비판의 성격이 서로 달랐다고 보는 것이 맞다.


한명회 정치능력 자체는 만만히 볼 수 없다.


황해·평안·함길·강원 등 여러 지역 체찰사를 맡았고 이조판서와 병조판서를 거쳐 우의정·좌의정을 지낸 뒤 1466년 영의정에 올랐다.


세조 왕권을 떠받치고 공신세력을 관리하면서 정국을 운영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하지만 한명회는 그 과정에서 엄청난 권력과 부도 함께 쌓았다.

그의 집안은 이후 왕실과 거듭 혼인하며 조선 최고 권문 가운데 하나로 성장했다.


따라서 한명회를 단순히 권모술수에 능한 모리배로만 보는 것도 부족하고 뛰어난 정치가로만 보는 것 역시 부족하다.


그는 분명 뛰어난 권력기술자이자 현실정치에 능한 사람이었지만 동시에 자신이 만든 권력질서 가장 중심에서 막대한 특권을 누린 사람이었다.


2. 김질


김질(金礩, 1422~1478)을 이야기하면 가장 먼저 따라붙는 말이 ‘배신’이다. 단종복위운동에 성삼문·박팽년 등과 함께 참여했다가 장인 '정창손'에게 계획을 털어놓았고 결국 정창손과 함께 세조에게 거사를 고변했다.


이 때문에 단종복위운동은 무너졌고 사육신을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그래서 후대 사림 시각에서 김질은 변절과 배신의 상징처럼 남았다.


신숙주는 나름대로 현실정치가로서 여러 해석 여지가 있지만 김질은 자신이 참여했던 거사를 직접 고변했다는 점 때문에 훨씬 혹독한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여기서도 역사는 묘하다.


김질은 고변 뒤 세조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고 좌익공신에 바카라록 돼 주요 관직에 올랐다.


1459년 병조참판이 된 뒤 세조의 국방정바카라 수립에 참여했고 군제개편에도 깊숙이 관여했다.

경국대전 편찬 과정에서는 병전을 검토하고 이후 이전 교정에도 참여했다.


특히 국방문제에 많은 관심을 보여 북방 여진에 대비한 군사정바카라과 군적정비, 지방군정 점검 등에 관여했다.


그러니 김질이라는 사람에게는 분명 두 얼굴이 존재한다.

사육신 입장에서 보면 동지를 팔아 살아남은 배신자였지만 국가 관료로만 놓고 보면 군제와 법제정비에 참여한 유능한 대신이기도 했다.


한 사람에게 이런 서로 다른 모습이 동시에 존재하는 것이 바로 역사의 어려움일 것이다.


3. 권람


권람(權擥, 1416~1465)은 고려말과 조선초 대표적 학자 권근의 손자이며 남이장군의 장인이기도 하다.


그는 젊은 시절 한명회와 절친하게 지냈다. 두 사람 관계는 중국 춘추시대 관중과 포숙아 우정에 비유될 정도였다고 전한다.


함께 바카라을 읽고 천하 일을 논하며 뜻을 키웠다. 수양대군과 한명회를 연결한 과정에는 기록마다 조금 차이가 있지만 권람이 수양대군 세력 형성 초기부터 핵심 역할을 한 것은 분명하다.


계유정난 뒤 정난공신 1등에 바카라록 됐고 승정원과 이조를 거쳐 우의정·좌의정까지 올랐다.


권람은 단순한 정치바카라사만은 아니었다. 학문과 문장에도 뛰어났고 신숙주 등과 함께 국조보감 편찬에 참여했으며 동국통감 편찬에도 관여했다.

또한 할아버지 권근이 지은 응제시에 주석을 붙여 '응제시주'를 편찬했는데 이는 조선 전기 역사인식과 학문세계를 살펴보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하지만 권람 역시 공신으로 막대한 토지와 노비를 받았고 높은 지위와 큰 재산을 누렸다.


기록에는 남산 아래 큰 집을 소유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한명회와 마찬가지로 능력과 특권이 함께 따라다녔던 사람이다.


4. 정인지


정인지(鄭麟趾, 1396~1478)는 조금 다르게 볼 필요가 있다.

그를 단순히 ‘세조 권신’이라고만 부르기에는 세종시대에 세운 업적이 너무 크다.


정인지는 조선초기 최고 수준 학자 가운데 한 명이었다.

천문·역법·역사·음악 등 여러 국가사업에 참여했고 고려사와 고려사절요 편찬에도 깊이 관여했으며 훈민정음 창제와 정리 과정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계유정난 때 수양대군 편에 섰고 정난공신이 되었으며 세조 즉위 뒤 영의정부사에 올랐다.


흥미로운 것은 정인지가 세조 말이라면 무조건 따르는 사람도 아니었다는 점이다.


1458년에는 세조가 불경을 간행하려 하자 반대해 왕의 노여움을 사기도 했고, 1459년에는 술에 취한 상태에서 세조에게 지나치게 직설적인 말을 했다가 국왕에게 무례했다는 이유로 관직을 빼앗기고 외방으로 물러나기도 했다. 이후 다시 불려 왔다. 따라서 정인지를 단순한 간신으로만 그리는 것도 정확하지 않다.


세종시대 뛰어난 학자였고 동시에 계유정난 뒤 세조정권에 참여해 권력핵심에 선 원로대신이었다.

그 역시 한 사람의 정치적 선택이 역사적 평가를 얼마나 복잡하게 만드는지를 보여주는 인물이다.


5. 홍윤성


홍윤성(洪允成, 1425~1475)은 세조시대 공신권력이 얼마나 커질 수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는 계유정난에 적극 가담해 정난공신이 됐고 세조 즉위 뒤 좌익공신에도 바카라록 됐다.

무재가 뛰어나 북방 군사업무에도 참여했고 1467년 우의정까지 올랐다.


세조가 죽은 뒤 예종 때에는 좌의정과 영의정을 지냈다.


하지만 문제는 권력을 얻은 뒤였다. 기록에는 홍윤성이 권세를 믿고 다른 사람들을 능멸했으며 심지어 그의 가노들이 사람을 죽이는 일까지 있었다고 전한다. 그런데도 세조는 홍윤성이 계유정난 때부터 자신을 도운 원훈이라는 이유로 엄하게 처벌하지 않고 바카라망하는 정도로 넘어가기도 했다.


이 대목은 세조시대 공신정치의 어두운 면을 아주 잘 보여준다.

왕권을 강화하는 데 공을 세운 사람들은 그 대가로 엄청난 특권을 얻었고 그 특권이 때로는 법 위에 서는 힘으로 변했다.


나라를 강하게 만들겠다며 만든 공신세력이 어느 순간 나라 법보다 강해지는 모순이 생겨난 것이다.


세조가 왕권을 강화하면서도 자신을 만든 원훈들의 전횡까지 완전히 통제하지 못했다는 사실은 왕권강화가 곧바로 법치강화와 같은 말은 아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홍윤성은 그런 모순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사람 가운데 하나다.


6. 홍달손과 양정


'홍달손'과 '양정'은 문신보다는 무력으로 수양대군 집권을 도운 대표적인 무신들이다.


홍달손은 한명회와 가까웠으며 계유정난 당시 군사를 거느리고 수양대군 편에 서서 정난공신 1등이 됐다. 이후 세조시대 주요 무관으로 활동하며 높은 관직에 올랐다.


양정 역시 뛰어난 무예를 가진 무사였다.


한명회 주선으로 수양대군 진영에 들어가 계유정난에 적극 가담했고 정난공신, 세조 즉위 뒤에는 좌익공신이 됐다. 이후 주로 함길도와 평안도 등 북방에서 군사업무를 맡았다.


그런데 양정의 최후는 매우 역설적이다.


수양대군이 가장 위험하던 시절 목숨을 걸고 그를 도왔던 양정은 1466년 세조에게 왕위에서 물러나는 문제를 언급했다가 결국 죽음을 맞았다.


세조실록에는 양정이 세조가 빨리 왕위에서 물러나기를 바라는 듯한 뜻을 말로 드러냈다는 이유로 죄를 물어 처형한 내용이 전한다.


당시 사관은 오랫동안 북방근무만 하게 된 양정의 불만이 그런 발언으로 이어졌을 가능성도 기록해 놓았다.


어찌 됐든 분명한 것은 하나다.


권력을 만드는 데 함께했던 공신이라 해도 왕권을 위협하거나 왕의 의심을 사는 순간 결코 안전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어쩌면 이 사건만큼 세조권력의 성격을 잘 보여주는 장면도 드물 것이다.


세조시대는 참 묘하다.


계유정난과 단종 죽음, 사육신 처형을 바라보면 피로 시작된 시대였다.


그러나 동시에 군제와 법제, 토지제도와 행정체제가 정비되고 경국대전 같은 조선 통치 기본틀이 만들어지기 시작한 시대이기도 했다.


세조 곁에 있었던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한명회·김질·권람·정인지·홍윤성·홍달손·양정 등을 단순히 ‘간신’이라는 말 한마디로 묶어버리면 이들이 실제 국가운영에서 했던 역할이 사라진다.


그렇다고 그들이 능력이 있었다는 이유로 계유정난과 숙청, 공신특권과 축재, 권력남용까지 눈감아줄 수도 없다.


능력이 있다고 반드시 좋은 사람은 아니다. 좋은 제도를 만들었다고 그 사람이 저지른 잘못까지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나는 역사를 공부하면서 점점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역사는 사람에게 너무 쉽게 영웅이나 악인이라는 이름표를 붙이지 말라고 한다.


한 사람이 나라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누군가에게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남길 수 있다.


나라를 강하게 만든 권력이 동시에 수많은 사람을 억누르는 힘이 될 수도 있다.


세조와 그의 권신들이 바로 그런 경우가 아닐까?


세조가 왕이 되는 과정과 단종의 비극은 그의 역사에서 결코 지울 수 없다.


그러나 세조 재위기간 동안 이루어진 제도정비 역시 지울 수 없다.


한명회의 권모술수와 축재를 이야기하면서 그의 정치능력까지 없던 일로 만들 수 없고, 김질의 고변을 비판하면서 그가 이후 국방과 법제정비에 참여한 사실까지 지울 수 없으며, 정인지가 세조 편에 섰다는 이유로 세종시대 그가 남긴 학문적 업적까지 지울 수도 없다.


현재 정치와 현대사를 바라볼 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사람과 시대를 선과 악 두 칸으로만 나누기에는 인간도 역사도 너무 복잡하다.


세조와 그의 권신들이 남긴 조선 역시 그랬다.


그들은 조선을 강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 강한 권력 뒤에는 수많은 사람의 피와 눈물, 특권과 탐욕이라는 어두운 그림자도 함께 남아 있었다.


역사는 그 둘을 모두 기록한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어느 하나를 지우는 것이 아니라 둘을 함께 바라보는 것일지도 모른다.


ㅡ 초롱박철홍 ㅡ


<사진 순서>


세조


한명회


김질


권람


<사진 설명>


현재 전하는 세조 모습과 관련해 중요한 자료는 1935년 화가 김은호가 당시 전해오던 세조 어진을 다시 옮겨 그리는 과정에서 제작한 ‘세조 어진 초본’이다.


이 초본은 2016년 국립고궁박물관이 구입해 2018년 처음 공개했다.


당시 김은호가 참고해 옮겨 그렸던 완성된 세조 어진은 한국전쟁 때 부산으로 옮겨졌다가 이후 화재로 소실됐으며 현재 남아 있는 초본에는 채색이 되어 있지 않다.


오늘날 볼 수 있는 일부 채색 이미지는 이 초본 등을 토대로 후대에 복원한 것이다.


한명회·김질·권람 사진으로 현대에 제작된 이미지를 사용할 경우 실제 전해지는 초상화로 오해하지 않도록 ‘상상도’ 또는 ‘후대 상상화’라고 표기하는 것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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