ㅡ 사육신의 충절은 누구를 위한 것이었을까?ㅡ
초롱초롱 박철홍의 조선사도 흐른다! 34
ㅡ 사육신의 충절은 누구를 위한 것이었을까?ㅡ
나는 오늘 이 글을 쓰기 전에 먼저 나 자신에게 묻는다.
내가 그 당시에 '사육신'들과 같은 자리에 있었다면 과연 어떤 선택을 했을까?
역사 글을 쓰다 보면 이런 선택의 기로 앞에 서게 되는 경우가 참 많다. 가까이만 보아도 일제강점기를 전후해 누군가는 친일과 매국의 길을 걸었고 누군가는 모든 것을 버리고 독립운동의 길로 들어섰으며, 해방전후에는 좌우로 갈라진 이념 속에서 어느 쪽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한 사람뿐 아니라 가족의 운명까지 달라지기도 했다.
시대는 달라도 사람은 끊임없이 선택의 갈림길 앞에 선다.
그런 의미에서 솔직히 말하면 나는 '사육신' 사건만 놓고 보았을 때 그들의 선택 앞에 무조건 서고 싶지도 않고 무조건 크게 손뼉 치며 그들을 찬양하고 싶지도 않다.
앞 편에서 보았듯 그들은 훗날 충절과 의리를 지킨 인물로 추앙받았다. 그러나 나는 자꾸 그들 뒤에 남겨진 가족들을 생각하게 된다.
'그들의 아내와 어린 자식들은 무슨 죄인가?'
과연 '단종복위운동'은 자신들이 참혹하게 죽는 것은 물론 아무 죄 없는 가족과 어린 자식들까지 죽거나 노비가 되어야 할 만큼 반드시 해야만 했던 일이었을까?
오늘 글은 바로 그 질문에서 시작한다.
지난번 오늘과 비슷한 글을 올렸을 때도 여러 다른 의견의 댓글들이 올라왔고 비난도 적지 않게 받았다. 그만큼 오늘 글은 논란이 있을 수 있는 이야기다.
지금까지 역사 글을 써오면서 현재 시각으로 보았을 때 우리 선조들이 했던 일들이 이해하기 어렵고 답답하게 느껴지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수백 년 전 사람들의 행동을 오직 오늘 가치관만으로 재단하여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것 역시 조심해야 한다.
그들에게는 그 시대의 슬롯적 분위기와 가치관이 있었고 오늘을 사는 우리 역시 쉽게 벗어나지 못하는 시대적 한계가 있듯이 그들에게도 그 시대의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늘 글은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하되 나 주관적인 생각이 상당히 많이 들어가 있다. 어디까지나 역사를 바라보는 내 자신 하나의 시각이라는 점을 먼저 밝힌다.
현재를 살아가는 내 시각에서 보았을 때 단종을 향한 '사육신'의 충절은 때로 지나치게 고지식하고 어리석어 보이기까지 한다. 그렇다고 그들을 오늘 내 자신의 잣대만으로 평가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내 생각을 조심스럽게 밝혀 보고자 한다.
조선은 건국할 때부터 성리학을 국가 통치이념으로 삼았다. 그러나 조선초 성리학 세력을 처음부터 오늘날 우리가 익숙하게 알고 있는 '훈구'와 '사림'이라는 두 갈래로 나누어 보는 것은 조심할 필요가 있다.
특히 '성삼문'과 '신숙주'가 살았던 15세기 조선 정치와 성리학계를 '훈구'와 '사림'이라는 구도로 그대로 설명하기는 어렵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사림세력'이 하나의 정치세력으로 중앙정계에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성종 때 '김종직'과 그 문인들이 진출하면서부터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세조 이전 인물들을 훗날 형성된 훈구와 사림 구도에 그대로 끼워 맞추는 것은 당시 시대상을 지나치게 단순화할 수 있다. 다만 계유정난과 세조 즉위 과정에서 형성된 공신세력이 이후 훈구세력의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고 보는 것이 보다 자연스럽다.
이 시대 인물들의 선택을 바라보면 훗날 조선정치에서 끊임없이 반복되는 하나의 갈등을 미리 엿볼 수 있다.
'명분'과 '현실'이다.
'성삼문'과 '박팽년'을 비롯한 단종복위운동 참여자들은 왕위의 정통성과 군신의 의리, 한번 섬긴 임금에 대한 절개를 목숨보다 중요하게 여기는 충절의 길을 선택했다.
반면 '신숙주'와 '정인지' 등은 수양대군과 함께 새로운 정치질서를 만들어가는 현실의 길을 선택했다.
그리고 '김질'은 또 다른 길을 선택했다. 처음에는 '성삼문' 등과 뜻을 함께했지만 거사 당일 계획이 틀어지고 실행이 다시 미뤄지자 마음이 크게 흔들렸던 것으로 보인다. 거사가 탄로 났을 때 자신과 가족에게 닥칠 참혹한 결과도 두려웠을 것이다. 결국 그는 장인 '정창손'에게 계획을 알렸고 세조에게 고변함으로써 단종복위운동을 무너뜨렸다.
결과적으로 동료들과 함께 꾸몄던 계획을 세조에게 고변해 거사를 무너뜨린 배신의 길 선택이었다.
죽음을 각오하고 끝까지 자신의 신념을 지킨 '성삼문', 수양대군의 집권과 새로운 정치질서에 적극 참여한 '신숙주', 그리고 같은 거사에 발을 들였다가 마지막 순간 돌아선 '김질'.
이 세 사람이 왜 서로 다른 길을 걸었는지는 다음 편에서 좀 더 자세히 살펴보려 한다.
이번 글에서는 다만 하나만 묻고 싶다.
'우리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과연 어떤 길을 선택했을까?'
한 가지는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한다. '사육신'들이 처음부터 수양대군을 강하게 반대했던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계유정난에 적극적으로 가담해 수양대군을 도왔다고 보기도 어렵다.
특히 '성삼문'은 계유정난 뒤 공신명단에 이름이 올라가기도 했지만 이를 사양했던 기록도 남아 있다.
그렇다면 더욱 궁금해진다.
'성삼문'과 '박팽년' 등은 계유정난으로 '김종서', '황보인' 등이 제거되고 수양대군이 권력을 장악해 가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노회 한 대신들이 어린 단종을 둘러싸고 권력을 좌지우지한다고 생각해 수양의 행동을 어느 정도 받아들였던 것일까?
아니면 수양이 중국 주나라의 '주공'처럼 어린 조카를 보좌하다 단종이 성장하면 권력을 돌려주기를 기대했던 것일까?
'주공'은 어린 조카가 왕위에 오르자 섭정을 맡아 나라를 다스리다가 조카가 성장한 뒤 권력을 돌려준 인물로 유교슬롯에서 이상적인 섭정의 상징처럼 받아들여졌다.
수양대군 역시 계유정난 뒤 자신을 '주공'에 빗대며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했다.
사육신 가운데 일부도 처음에는 수양이 왕위까지 차지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가능성은 있다. 물론 그들 속마음을 정확히 알 수는 없다.
분명한 것은 수양이 결국 단종에게서 왕위를 넘겨받아 '세조'가 된 뒤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성원', '유응부' 등을 중심으로 단종을 다시 왕위에 올리려는 계획이 구체화됐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나는 다시 생각한다.
왕위의 정통성을 중요하게 여겼던 당시 사대부들에게 수양대군이 조카의 왕위를 차지한 일은 결코 작은 문제가 아니었다. 군신관계와 왕위계승의 정당성은 그들이 생각하는 국가질서의 중요한 원칙이었다.
하지만 하루하루 먹고살아야 했던 당시 백성의 자리에서 바라보면 이야기는 조금 달라질 수도 있다.
어린 '단종'이 왕위에 있느냐, 숙부 '수양대군'이 왕이 되느냐가 당시 평범한 백성들의 삶에서 과연 가장 절박한 문제였을까?
백성들에게 더 중요한 것은 누가 왕이냐보다 그 왕이 세금을 어떻게 거두고 흉년이 들었을 때 어떻게 구휼하며 외적의 침입에서 나라를 얼마나 잘 지키고 억울한 일을 얼마나 줄여주는가 아니었을까?
왕조의 정통성을 중요하게 생각한 사대부들 시각과 먹고사는 문제가 절박했던 백성들의 시각은 반드시 같았다고 볼 수 없다.
그래서 나는 단종복위운동을 바라보며 묻는다.
'그들이 목숨을 걸고 지키려 했던 충절은 누구를 향해 있었던 것일까?'
나라였을까?
백성이었을까?
아니면 자신들이 평생 배워온 군신의 의리와 왕위 정통성이었을까?
적어도 단종복위운동의 직접적인 목적은 백성을 위해 토지제도를 고치거나 세금을 줄이고 새로운 제도를 만들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폐위된 '단종'을 다시 왕위에 올리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사육신의 충절이 위대하다는 평가와 별개로 그 선택이 과연 나라와 백성을 위해 반드시 필요했던 일이었는가에 대해서는 다른 질문을 던질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당시는 '이씨 왕조시대'였다.
물론 왕위계승의 정통성은 당시 사람들에게 대단히 중요한 문제였다. 그것은 단순히 왕실 내부의 권력다툼이 아니라 나라의 질서와 명분을 바로 세우는 일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그들은 자신의 선택이 결국 나라와 백성을 위한 길이라고 믿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한 걸음 떨어져서 보면 같은 왕실혈통 안에서 벌어진 권력쟁탈이라는 측면 역시 분명히 존재한다.
단종의 증조할아버지인 태종 '이방원'도 왕위로 가는 과정에서 형제들과 피를 흘리는 '왕자의 난'을 벌였고 조선 사대부들이 하늘처럼 떠받들었던 명나라에서도 '영락제'가 조카 '건문제'를 몰아내고 황제 자리를 차지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왕조시대 왕실에서는 왕위를 둘러싸고 형제와 숙질이 서로 죽고 죽이는 일이 끊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러한 일들이 정당했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왕조시대 권력세계가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냉혹했고 그 속에서 사육신의 단종복위운동 역시 군신 의리와 명분을 품고 있었지만 다른 한편에서 보면 왕위를 둘러싼 권력투쟁 연장선이라고 볼 여지도 있다는 뜻이다.
왕조시대 권력투쟁에는 거의 언제나 명분이 따라붙었다.
계유정난을 일으킨 사람들에게는 '김종서'와 '황보인'을 제거해야 한다는 명분이 있었고 단종복위운동을 일으킨 사람들에게는 세조를 몰아내고 정당한 임금을 다시 세워야 한다는 명분이 있었다.
그리고 당대 그들의 운명을 결정한 것은 명분의 옳고 그름만이 아니라 '성공'과 '실패'였다.
성공하면 '공신'이 되고 실패하면 '역적'이 되었다.
'한명회'와 '신숙주'는 계유정난이 성공하면서 공신이 되어 자신들과 후손까지 부귀영화를 누렸고 단종복위운동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실패하면서 역적으로 죽고 가족들까지 연좌의 굴레 속으로 끌려들어 갔다.
성공과 실패가 정의와 불의를 가르는 절대적인 기준일 수는 없지만 적어도 당대 정치현실에서는 성공한 사람이 충신과 공신이 되고 실패한 사람이 역적이 되는 일이 너무나 많았다.
현대 대한민국에서도 한때 이와 비슷한 논리가 등장한 적이 있다.
1995년 검찰이 12·12와 5·18 관련 사건을 처리하면서 이른바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취지의 논리를 내놓아 거센 논란을 불러일으켰고 이후 특별법 제정과 재수사를 거쳐 전혀 다른 결과로 이어졌다.
당대의 승패가 역사의 마지막 판결은 아니라는 뜻이다.
'사육신'도 그랬다.
1456년 단종복위운동이 실패한 뒤 그들은 오랫동안 역적으로 취급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조금씩 재평가가 이루어졌고 결국 숙종 때 공식적으로 복관 되었다.
사건이 일어난 지 200년이 훨씬 지난 뒤였다.
처음에는 역적이었던 사람들이 훗날 만고의 충신으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또 하나의 질문이 생긴다.
'왜 조선은 후에 사육신을 그렇게까지 높이 떠받들었을까?'
물론 가장 중요한 이유는 단종에 대한 충절이었다. 그러나 왕조국가 입장에서 한번 섬긴 임금을 목숨을 걸고 지키며 죽음 앞에서도 마음을 바꾸지 않는 신하는 더없이 훌륭한 신하의 본보기이기도 했다.
권력을 빼앗으려는 사람 입장에서 '정몽주'나 '사육신' 같은 인물은 가장 위험한 존재다.
그러나 권력을 차지한 뒤에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자신이 섬기는 왕에게 목숨까지 바치는 '정몽주'나 '사육신' 같은 신하가 많으면 많을수록 왕조를 유지하는 데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없다.
참으로 역사가 아이러니한 것은 조선을 세우는 과정에서 제거됐던 '정몽주'가 훗날 조선왕조가 안정된 뒤에는 만고의 충신으로 떠받들어졌다는 사실이다.
'정몽주' 역시 단순히 낡은 질서를 붙들고 있던 인물은 아니었다. 그 또한 고려를 개혁하고 바로 세우려 했던 당대의 뛰어난 정치가였다. 다만 '정도전'과 '조준', 이성계 세력이 고려라는 왕조의 틀을 넘어 새로운 국가를 만들려 했다면 '정몽주'는 끝까지 고려왕조의 틀 안에서 개혁하려 했다.
그 차이는 결국 왕조를 바꿀 것인가, 기존 왕조를 지킬 것인가라는 문제에서 결정적인 충돌로 이어졌다.
그렇다면 후대가 '정몽주'를 오직 '충절'이라는 한 단어로만 기억하는 것이 그의 복잡한 정치적 선택을 모두 설명할 수 있을까?
자신들의 왕조를 세울 때는 제거해야 했던 인물이 왕조가 안정된 뒤에는 신하들이 본받아야 할 최고의 충신으로 다시 태어났다.
얼마나 역설적인가?
'사육신'도 비슷하다.
세조에게는 역적이었지만 훗날 왕조가 안정된 뒤에는 목숨을 걸고 한번 섬긴 군주에게 충성한 그들의 모습이 신하들이 본받아야 할 최고의 도덕적 본보기가 되었다.
그래서 나는 사육신이 후대에 추앙된 과정에는 순수한 역사적 평가뿐 아니라 조선왕조가 신하들에게 요구했던 충성과 절개의 가치도 함께 작용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나는 '정몽주'와 '사육신'의 신념과 용기를 폄훼하려는 것은 아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이 믿는 것을 끝까지 지켰다는 점은 분명 존경할 만하다.
하지만 우리 역사에는 그들 못지않게 다른 의미에서 처절하게 나라와 백성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내놓은 사람들이 수도 없이 많다.
임진왜란 때 이름조차 제대로 남기지 못한 채 왜군과 싸우다 죽은 의병들, 자기 고향과 가족을 지키기 위해 칼과 농기구를 들었던 이름 없는 백성들, 구한말 나라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내놓은 의병장과 구국의 인물들, 일제강점기에 가족과 재산과 젊음을 버리고 독립운동에 뛰어든 독립투사들이 있었다.
독립군들은 만주와 연해주의 차가운 벌판에서 풍숙노찬 했고 '안중근'은 젊은 나이에 일제에 의해 사형당했으며 '윤동주'는 해방을 불과 몇 달 앞두고 일본 감옥에서 젊은 생을 마쳤다.
그들이 지키려 했던 것은 군왕 한 사람이 아니었다.
나라와 민족이었다.
그래서 나는 '사육신'의 충절을 임진왜란의 의병이나 독립운동가들의 희생보다 언제나 더 높은 정신적 가치인 것처럼 가르쳐온 우리의 역사인식에도 한 번쯤 질문을 던져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어느 희생이 더 높고 어느 희생이 더 낮다고 줄을 세울 필요는 없다.
그러나 그 충성이 누구를 향한 것이었는지는 물어볼 수 있다.
군왕을 향한 충성인가?
나라를 향한 충성인가?
백성을 향한 충성인가?
이 세 가지는 언제나 같은 것이 아니다.
더욱 씁쓸한 것은 조선 사대부들이 입으로는 그렇게 '정몽주'와 '사육신'의 충절과 의리를 강조했지만 실제 역사에서는 말과 행동 사이에 큰 거리가 있었던 경우도 적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임진왜란을 앞두고 조선은 일본의 동향을 살피고 군사적 대비를 전혀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일본군의 대규모 침략에 충분히 대비하지 못했고 전쟁이 시작된 뒤에는 백성과 고을을 버리고 달아난 관리들도 적지 않았다. 물론 끝까지 자리를 지키고 싸운 관리와 선비들도 있었지만 입으로 외친 충절과 실제 행동이 언제나 같았던 것은 아니었다.
병자호란 때도 수많은 백성이 청군에게 죽거나 끌려가는 가운데 조정에서는 끝까지 명분과 현실을 둘러싼 논쟁이 이어졌다.
명분은 중요하다.
그러나 백성이 죽어가는데도 명분만을 붙잡고 있다면 우리는 다시 묻게 된다.
'그 명분은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가?'
구한말에도 나라를 바카라임져야 했던 지배층 가운데 일부는 국권침탈 과정에서 일본에 협력하고 작위와 은사금을 받았다.
독립운동가들은 만주와 연해주에서 굶주리고 얼어 죽었지만 다른 한쪽에서는 일본이 내민 돈과 작위를 받아들이며 자신의 재산과 지위를 지킨 사람들도 있었다.
그 가운데 일부는 식민지 시기 얻은 재산과 슬롯적 기반을 해방 이후까지 이어갔고 친일재산을 둘러싼 논란 역시 오랫동안 우리 슬롯에 남았다.
입으로는 충절과 의리를 이야기하면서 실제 자신의 삶에서는 전혀 다른 선택을 하는 모습은 과거에만 있었던 일은 아니다.
나는 조 선 중 후기 사대부 슬롯가 만들어놓은 충절과 명분의 문화에도 분명한 이중성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겉으로는 '정몽주'와 '사육신'의 삶을 최고의 가치라고 가르쳤지만 정작 자신들의 삶에서는 그렇게 살지 않는 사람들도 많았다.
어쩌면 오늘날까지도 우리는 그 모습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입으로는 의리와 원칙을 말한다. 그러나 자신의 자리와 재산, 가족과 미래가 걸리면 전혀 다른 선택을 하기도 한다.
나는 그것을 무조건 비난하고 싶지는 않다.
사람은 누구나 살고 싶고 가족을 지키고 싶기 때문이다.
문제는 자신은 현실과 타협하면서 다른 사람에게만 목숨을 건 충절과 희생을 요구할 때다.
바로 그때 위선이 시작된다.
우리가 역사교육을 통해 배워온 충절과 의리의 세계와 실제 사람들이 살아온 현실은 너무나 달랐다. 그래서 막상 우리 자신이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은 선택의 갈림길에 선다면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이 목숨과 가족운명까지 걸고 명분의 길을 선택할 수 있을까 생각하게 된다. 아마 많은 사람은 결국 현실의 길을 선택할 것이다.
특히 역사 글을 쓰면서 수없이 많은 사람들 선택과 그 결과를 들여다보다 보면 나는 이런 순간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더욱 고민스러워진다.
신념을 끝까지 지킨 사람에게 무조건 박수를 보낼 수도 없고, 살아남기 위해 현실을 선택한 사람을 무조건 비겁하다고 손가락질하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때때로 이런 생각을 한다.
그저 내 삶에서는 목숨과 가족, 신념과 현실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만 하는 그런 잔인한 갈림길에 서지 않기를.
그리고 나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가 목숨과 가족, 신념과 현실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만 하는 그런 잔인한 시대를 살지 않도록 나라를 이끄는 사람들이 국민의 삶을 지키고 나라를 올바르게 이끌어주기를 바랄 뿐이다.
그래서 나는 다시 처음 질문으로 돌아간다.
내가 1456년 그날 '성삼문' 옆에 앉아 있었다면 나는 과연 어떤 선택을 했을까?
세조를 죽이고 단종을 다시 왕으로 세우려는 거사가 실패하면 나만 죽는 것이 아니라 내 아내와 어린 자식들까지 죽거나 노비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면 나는 끝까지 거사에 참여했을까?
솔직히 나는 지금 생각으로는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다.
나는 참여하지 않았을 것이다.
단종을 다시 왕위에 올리는 일이 내 목숨은 물론 아무 죄 없는 가족들의 삶까지 걸어야 할 만큼 절대적인 명분이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정말 1456년 그 시대에 태어나 '성삼문'과 같은 교육을 받고 같은 가치관 속에서 살았다면 그때도 지금과 똑같은 판단을 했을지는 알 수 없다.
역사에서 가장 쉬운 일은 결과를 알고 난 뒤 죽은 사람에게 '이렇게 했어야 한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가장 어려운 일은 아무것도 모른 채 내가 그 사람의 자리에 서보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사육신'의 충절을 존중은 하지만 그들을 무조건 숭배하지 않으려 한다.
그리고 다른 길을 선택했던 '신숙주'와 '김질' 역시 '변절자'와 '배신자'라는 한두 마디로 쉽게 끝내지 않으려 한다.
그들이 왜 서로 다른 길을 선택했고 그 선택 이후 어떤 삶을 살았는지는 다음 편에서 자세히 살펴보려 한다.
그러나 그 이야기에 들어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독자들에게도 같은 질문을 던지고 싶다.
'그대가 1456년 그 자리에 있었다면 과연 어떤 선택을 했겠는가?'
이어서 '신숙주와 김질, 살아남은 사람들의 선택' 편이 이어집니다.
ㅡ 초롱박철홍 ㅡ
사진은 순서대로 성삼문 박팽년 신숙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