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롱초롱 박철홍의 조선사도 흐른다! 33

ㅡ 세조와 사육신 2 ㅡ 사육신 가족들 처참함

초롱초롱 박철홍의 조선사도 흐른다! 33

ㅡ 세조와 사육신 2 ㅡ


'성삼문'과 '박팽년'을 중심으로 추진됐던 단종복위운동은 '김질' 고변으로 실패로 끝났다.


단종복위 모의에 참여했던 김질은 결국 장인 '정창손'에게 거사 계획을 알렸고, 정창손은 김질을 데리고 '세조'에게 달려가 모든 사실을 고변했다. 세조 입장에서 성삼문과 박팽년 등은 자신을 죽이고 이미 왕위를 넘긴 '단종'을 다시 왕으로 세우려 했던 역도들이었다.


세조는 직접 국문에 나섰다. '세조실록'에도 세조가 이들을 직접 국문하고 <성삼문·박팽년· 이개·하위지·유응부·김문기> 등 여러 연루자들을 끌어내 형장을 가하며 공모자를 추궁했던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다만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사육신은 '남효온'의 <육신전>을 통해 굳어진 성삼문·박팽년·이개· 하위지·유성원·유응부 여섯 사람이며 '김문기'는 단종복위운동에 깊숙이 참여했던 또 다른 핵심 인물로 보는 것이 맞다.


후대에 전해지는 <육신전> 등의 기록에는 세조와 성삼문의 처절한 대화가 남아 있다.


세조가 성삼문에게 묻는다.


“너희들이 어찌하여 나를 배반하는가.”


성삼문은 물러서지 않는다.


“옛 임금을 복위하려 함이라. 천하에 누가 자기 임금을 사랑하지 않는 자가 있는가. 어찌 이를 모반이라 말하는가. 내가 이 일을 하는 것은 하늘에 두 해가 없고 백성에게 두 임금이 없기 때문이라.”


성삼문이 세조를 끝까지 임금으로 인정하지 않고 ‘나으리’라고 불렀다는 이야기도 여기서 나온다.


다만 여기서 한 가지는 구별해서 볼 필요가 있다. 세조가 이들을 혹독하게 국문하고 형장을 가했다는 사실은 실록에서도 확인되지만 시뻘겋게 달군 쇠로 온몸을 지졌다거나 팔을 잘라내면서도 태연하게 세조를 조롱했다는 식의 극적인 장면들은 대부분 후대 기록을 통해 전해진 이야기다.


사육신의 절개를 강조하는 과정에서 어느 정도 과장되거나 극적으로 다듬어졌을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하기는 어렵다.


그렇다고 이들이 당한 고문이 가벼웠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당시 반역죄인을 국문할 때는 낙형(烙刑), 흔히 말하는 단근질 같은 끔찍한 고문까지 사용됐다. 낙형은 불에 달군 쇠붙이로 사람 피부를 지지는 고문으로, 놀랍게도 정식 법전에 규정된 형벌조차 아니었다. 단종복위운동 관련자들을 국문하는 과정에서도 사용됐고 이후 역모사건에서 대표적인 악형으로 자리 잡았다고 전해지지만 실록에는 나오지 않는다. 실록에는 장을 치며 혹독하게 국문한 사실만 확인된다. 다만 달군 쇠를 이용한 낙형의 구체적인 장면은 주로 후대 기록 <육신전>을 통해 전해진다.


아무리 강한 사람이라 해도 그런 고문을 당하면서 멀쩡한 정신으로 계속 세조를 조롱할 수 있었을까?


나는 솔직히 의문이 든다.


사람의 신념이 아무리 강해도 몸이 견딜 수 있는 고통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적어도 이들이 자신들 선택을 쉽게 번복하지 않았고 그 대가로 처참한 죽음을 맞았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사육신 하면 흔히 성삼문을 가장 먼저 떠올리지만 나는 박팽년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박팽년'(朴彭年)은 집현전 학사로 '세종'과 '문종' 시대 여러 국가사업에 참여했고 문장과 학문에 뛰어났던 인물이다. 명나라 사신 '예겸'도 박팽년과 성삼문 재주를 높이 평가했다고 전한다. 그러나 단종복위운동으로 집안이 거의 멸문을 당하면서 그의 개인 저술 대부분은 후세에 제대로 전해지지 못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후대 기록에 따르면 수양대군이 단종의 왕위를 빼앗자 박팽년은 울분을 참지 못해 경회루 연못에 뛰어들어 죽으려 했고, 성삼문이 훗날을 도모하자며 만류해 그 뜻을 접었다고 한다.


그때부터 박팽년은 이미 죽음을 각오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세조는 그런 박팽년 속마음까지는 알지 못했을 것이다. 세조 때에도 박팽년은 형조참판이라는 높은 자리에 올랐다. 세조 정권 안에서도 그의 능력은 계속 필요했던 것이다.


<육신전>과 <국조인물고> 등 후대 기록에는 세조가 박팽년을 살려보려고 회유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박팽년에게 사람을 보내 자신에게 항복하고 역모에 참여하지 않았다고 하면 살려주겠다는 뜻을 전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박팽년은 대답하지 않았다.


결국 그도 끌려와 국문을 받았다.


후대 기록에 따르면 국문장에서도 박팽년은 세조를 왕으로 부르지 않고 계속 ‘나으리’라고 했다고 한다. 세조가 분노하며 말했다.


“네가 이미 나에게 신하라 일컬었고 내게서 녹을 먹었으니 지금 비록 신하라 일컫지 않더라도 소용이 없다.”


그러자 박팽년이 맞섰다고 한다.


“나는 상왕의 신하로 충청감사가 되었고 나으리에게 올린 장계에도 한 번도 신(臣)이라 하지 않았으며 녹 또한 먹지 않았다.”


그리고 실제로 장계를 가져다 살펴보니 신하 신(臣) 자를 쓰지 않고 비슷하게 생긴 클 거(巨) 자를 썼으며 받은 녹봉도 먹지 않고 쌓아두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러나 녹을 먹지 않고 쌓아두었다는 이야기는 '육신전'에 박팽년이 아니라 '하위지'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어쨌든 이야기는 여러 갈래로 전해지지만 사육신 사건은 참으로 극적인 이야기다.


다만 이 이야기 역시 세조 당시 실록에서 직접 확인되는 것은 아니며 '육신전'과 '국조인물고' 같은 후대 기록을 통해 전해진다.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도 이 이야기를 소개하면서 사실 여부를 정확하게 확인하기 어렵고 후대에 덧붙여졌을 가능성이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따라서 나는 이 이야기를 전적으로 사실이라고 믿기보다는 후대 사람들이 사육신들 절개를 어떻게 기억하고 싶어 했는지를 보여주는 이야기로 받아들이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박팽년이 당한 마지막만큼은 실록 기록부터 처참하다.


박팽년은 혹독한 국문을 견디다가 결국 옥중에서 죽었다. 후대에는 박팽년 절개를 상징하는 시조로 다음 노래가 전해진다.


[까마귀 눈비 맞아 흰 듯 검노매라.

야광명월(夜光明月)이 밤인들 어두우랴.

님 향한 일편단심이야 고칠 줄이 있으랴.]


이 시조를 정말 박팽년이 죽기 직전에 직접 읊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적어도 후대 사람들이 박팽년을 어떻게 기억했는지는 이 세 줄이면 충분히 알 수 있다.


그런데 박팽년이 죽었다고 모든 것이 끝난 것이 아니었다.


더 끔찍한 일이 남아 있었다.


<세조실록>에는 박팽년이 옥중에서 죽자 의금부가 이미 죽은 박팽년과 유성원 등 시체를 거열하고 목을 베어 효수한 뒤 시체를 팔도에 돌려 보일 것을 청했고 세조가 이를 허락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죽은 사람에게 까지 다시 형벌을 가한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성삼문·이개· 하위지·유응부를 비롯한 다른 단종복위운동 관련자들도 처형됐다.


성삼문에게도 죽음을 앞둔 절개를 상징하는 유명한 시조가 전해진다.


[이 몸이 죽어 가서 무엇이 될고 하니,

봉래산 제일봉에 낙락장송되어 있어,

백설이 만건곤(滿乾坤)할 제 독야청청하리라.]


그러나 죽은 것은 그들만이 아니었다. 사육신사건이 더욱 처참한 이유는 그들의 선택에 아무 죄도 없었던 가족들까지 함께 끌려 들어갔기 때문이다.


아들과 가까운 남자혈족들이 죽고 아내와 딸들은 노비가 됐다.


여기서 요즘 사람들 입장에서는 당연히 의문이 생긴다.


도대체 사육신의 아내와 딸들을 왜 세조의 공신들에게 노비로 나누어 주었을까?


혹시 가까이 두고 돌보라는 뜻이었을까?


그런 것이 아니었다. 당시 조선이 형법의 일반법으로 사용하던 '대명률'에서는 모반·대역죄인의 본인만 처벌한 것이 아니라 가족에게까지 연좌제를 적용했다. 모반대역죄인의 처첩과 일정 범위의 자녀와 친족을 노비로 삼고 재산을 몰수하도록 규정했으며 그 가운데 일부는 공신가 노비로 주도록 돼 있었다.

즉 사육신 가족을 공신들에게 준 것은 보호가 아니라 처벌이었다.

한 집안을 정치적으로 뿐만 아니라 슬롯적으로 완전히 무너뜨리는 형벌이었던 것이다. 동시에 몰수한 사람과 재산을 공신들에게 나누어주는 것은 승리한 권력세력에 대한 보상의 성격도 가지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세조실록'에는 누구의 아내와 딸을 누구에게 주었는지가 놀라울 정도로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성삼문의 아내 '차산'과 딸 '효옥'은 '박종우'에게, 박팽년의 아내 '옥금'은 '정인지'에게 '이개'의 아내 '가지'는 '강맹경'에게, '유성원'의 아내 '미치'와 딸 '백대'는 '한명회'에게, '하위지'의 아내 '귀금'과 딸 '목금'은 '권언'에게, '유응부'의 아내 '약비'는 '권반'에게 주었다.


오늘날 시각으로 보면 한 인간의 아내와 딸을 다른 사람에게 재산처럼 나누어주었다는 사실 자체가 참혹하기 이를 데 없다. 그러나 이것이 당시 역모죄에 적용되던 연좌 처벌의 현실이었다.


'정인지'나 '신숙주', '김질' 같은 사람들은 한때 함께 학문을 논하고 웃고 술잔을 기울이며 동고동락했던 동료들이 하루아침에 역적으로 몰려 잔혹하게 처형당하고, 그 아내와 딸들까지 자신들의 노비로 내려오는 모습을 보며 과연 어떤 심정이었을까?


왕이 내려준 노비였으니 겉으로는 포상이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매일 집 안에서 그 얼굴을 마주해야 했던 사람들에게 그것이 과연 상이기만 했을까?


어쩌면 그것은 세조가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살아남은 사람들에게 평생 옛 동료의 죽음을 바라보게 만드는 또 다른 형태의 고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 기록도 남아 있다. 후대 기록에 따르면 박팽년 부인 '옥금'이 처음 정인지 집으로 끌려갔을 때 정인지와 마주치는 장면이 전한다.


정인지는 옥금을 바라보며 그동안 고생이 많았다는 뜻의 짧은 말 한마디만 건넨 뒤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자리를 떠났다고 한다. 옥금은 이후 정인지 집의 노비로 살면서도 무려 십 년 훨씬 넘게 남몰래 남편 박팽년의 제사를 지냈고, 세월이 흐른 뒤에는 마침내 노비 신분에서도 풀려났다고 전해진다.


이 대목에서 한 가지 잘못 알려진 이야기도 바로잡을 필요가 있다.


흔히 '신숙주'가 단종의 비였던 '정순왕후 송씨'의 미모를 탐내 자신의 노비나 첩으로 달라고 세조에게 요청했다는 이야기가 널리 전해진다. 그러나 적어도 '세조실록'에서는 신숙주가 그런 요청을 했다는 기록을 찾기 어렵다.


실록에 실제로 등장하는 사람은 '윤사로'다. 1457년 송현수 집안 여자들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를 논의하는 과정에서 윤사로는 송현수의 아내는 노산군의 아내, 즉 정순왕후를 위해 용서하되 다른 딸들은 공신들에게 나누어 주어야 한다는 취지로 말하면서, 그렇게 된다면 자신에게도 송현수의 딸 하나를 달라는 뜻을 밝혔다. 여기에서 말하는 송현수의 딸은 문맥상 정순왕후가 아니라 그 자매 가운데 한 사람을 뜻한다.


따라서 신숙주가 정순왕후의 뛰어난 미모를 탐내 자신의 노비나 첩으로 달라고 했다는 이야기를 역사적 사실로 단정하는 것은 곤란하다. 후대 야담과 소설을 거치면서 세조 편에 섰던 신숙주의 부정적인 이미지에 덧붙여진 이야기일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


설령 후대에 전해지는 이야기 속에 어떤 실제 사연의 흔적이 남아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곧바로 정순왕후의 미모를 탐냈다는 뜻이었다고 단정할 수도 없다. 어쩌면 가까이 두고 돌보려는 다른 뜻이 있었을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 뒤에 '신숙주' 편에서도 다시 이야기하겠지만 신숙주는 세상과 거리를 두고 살아가던 '김시습'을 자신의 집으로 데려와 보살피려 했다는 일화도 전한다. 적어도 여러 기록을 통해 드러나는 신숙주의 성품을 생각하면 단순히 여인의 미모를 탐해 정순왕후를 달라고 했다고 쉽게 단정하기에는 조심스러운 부분이 있다.


물론 정순왕후 송씨가 뛰어난 미인이었다는 이야기는 후대까지 널리 전해진다. 조선 왕비 가운데서도 손꼽힐 만큼 미모가 뛰어났다는 전승이 있을 정도다. 그러나 한 사람의 미모에 관한 전승과 신숙주가 그 미모를 탐냈다는 이야기는 전혀 다른 문제다. 역사는 재미있는 이야기일수록 더욱 기록과 전승을 구분해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그러나 사육신 가족들이 실제로 노비로 흩어진 비극 자체는 조금도 과장이 아니다.


그 가운데 박팽년 집안에서는 기적과도 같은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박팽년 아들들도 모두 죽임을 당했다.


그런데 둘째 아들 '박순'의 아내 성주 이씨가 당시 임신하고 있었다. 묘골마을에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이씨 부인은 친정인 지금의 대구 달성군 하빈면 묘골에 머물며 아이를 낳았는데 아들이었다.


남자아이이면 죽임을 당할 운명이었다.


그 무렵 집안의 여종도 아이를 낳았는데 딸이었다. 전승에 따르면 두 아이를 바꾸었다.

박팽년의 손자는 그렇게 여종의 자식으로 살아남았다. 이름도 ‘박씨 집안의 종’이라는 뜻에서 '박비(朴婢 또는 朴斐)'라고 불렸다고 전한다.


한 사람의 혈통을 살리기 위해 자신의 아이와 주인집 아이를 바꾼 여종.


박팽년의 손자 박비가 유복자로 살아남아 후손을 이어간 사실 자체는 전해지는 기록에서도 확인된다. 묘골마을에는 오늘날까지 이 이야기가 전승되고 있다.


세월이 흘러 박비가 장성하자 박순의 동서였던 '이극균'이 경상도관찰사로 내려왔다가 이 사실을 알게 됐다고 한다.


이극균은 박비에게 이제 장성했으니 더 이상 자신의 신분을 숨기지 말고 사실을 밝히라고 권했다. 박비는 결국 조정에 자신이 박팽년 손자임을 밝혔다.


묘골마을에 전해지는 이야기에서는 '성종'이 그 사실을 알고 오히려 귀하게 여겨 사면하고 '박일산'이라는 이름을 내려주었다고 전한다.


멸문한 집안에서 살아남은 한 줄기 혈손. 그렇게 박일산의 후손들이 묘골에 정착하면서 순천박씨 충정공파의 혈통이 이어지게 되었다.


사육신사건은 단종에게도 엄청난 악재가 되었다. 다만 시간관계는 조금 정확하게 볼 필요가 있다.


사육신의 단종복위운동이 실패한 것은 1456년이었다. 그리고 단종이 상왕에서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영월로 유배된 것은 그 이듬해인 1457년, '금성대군'과 단종비 '정순왕후 송씨'의 아버지 '송현수' 등이 연루된 또 다른 역모사건이 일어난 뒤였다.


세조정권 입장에서는 단종이 살아 있는 한 계속해서 반대세력이 모여들 수 있는 구심점이 될 수 있다는 두려움이 컸을 것이다. 결국 단종은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영월'로 유배되었고, 그곳에서 영화 <왕과 사는 남자>에서도 그려지듯 비극적인 최후를 맞게 된다.


다만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단종 죽음과 실록 기록에는 차이가 있다. 후대에는 단종이 사약을 받았거나 목이 졸려 죽었다는 이야기가 널리 전해졌지만, '세조실록'에는 단종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바로 이 지점에서도 실록의 공식기록과 후대에 전해진 이야기 사이에는 분명한 간극이 존재한다.


문종의 비이자 단종의 어머니였던 '현덕왕후 권씨' 역시 사후 폐출되는 수난을 겪었다.


그리고 사육신 집안은 산산이 흩어졌다. 그러나 권력은 사람을 죽일 수 있어도 기억까지 완전히 죽이지는 못했다.


사육신이라는 이름이 후세에 널리 알려지는 데에는 생육신의 역할이 컸다. 생육신은 단종이 왕위를 잃은 뒤 세조정권에 나아가지 않거나 벼슬을 버리고 절의를 지킨 사람들을 말한다.


일반적으로 '김시습'·'원호'·'이맹전'· '조려'· '성담수'·'남효온' 여섯 사람을 생육신이라 부른다. 경우에 따라 남효온 대신 '권을 넣기도 한다.


그 가운데 '남효온'은 <육신전>을 지어 성삼문·박팽년·이개·하위지· 유성원·유응부 여섯 사람의 이야기를 후세에 남겼다.


흥미롭게도 남효온은 사육신사건 당시 겨우 두 살이었다.


따라서 '육신전'에 기록된 모든 대화와 장면을 사건 당시의 현장기록처럼 받아들일 수는 없다. 그러나 당시 세조정권 아래에서 역적으로 죽은 사람들을 훗날 충신으로 기억하게 만든 결정적인 기록 가운데 하나였다는 점은 부정하기 어렵다.


그 뒤 사육신을 신원하려는 움직임은 오랜 세월 계속됐고 마침내 1691년 숙종 때 이들의 관작과 명예가 공식적으로 회복됐다.


1456년 사건이 일어난 뒤 무려 약 235년 만이었다.


오늘 우리는 사육신을 고려의 정몽주와 함께 대표적인 충절의 상징으로 기억한다. 그러나 그들이 죽던 순간에는 충신이 아니었다.


역적이었다.


그들의 아들과 형제는 죽었고 아내와 딸은 노비가 됐으며 가문의 재산은 몰수되고 이름조차 함부로 입에 올리기 어려운 세월이 이어졌다.


그래서 나는 이 역사를 바라볼 때마다 한 가지 고민에 빠진다.


오늘날 사육신은 이미 범접하기 어려운 만고충신의 반열에 올라 있다. 그러다 보니 그들의 선택 자체를 냉정하게 다시 묻는 것조차 불경스럽게 생각하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지금부터 내가 쓰는 글에 거부감을 느끼는 분들도 계실 수 있다.


하지만 욕을 먹더라도 한 번쯤은 묻고 싶었다.


이 이야기는 다음 편에서 그 반대편에 섰던 사람들 이야기와 함께 자세히 풀어가겠다.


ㅡ 초롱박철홍 ㅡ


아래 사진은 '성삼문'과 '박팽년'의 영정입니다.


물론 두 사람이 살았던 15세기에는 사진이 없었으니 실제 얼굴 그대로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후대에 제작된 영정을 통해 그 모습을 상상해 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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