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숙주 2 ㅡ 우리가 몰랐던 신숙주
초롱초롱 박철홍의 조선사도 흐른다! 36
ㅡ 신숙주 2 ㅡ
(우리가 몰랐던 신숙주)
역사 속에서 한번 굳어진 인물의 이미지를 다시 복원한다는 것은 쉽지 않다. 특히 대중성 있는 소설이나 드라마, 영화 등을 통해 한쪽 모습이 강하게 각인된 인물이라면 더욱 그렇다.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중국의 '조조'일 것이다. 조조를 간웅과 악인의 대명사처럼 바라보는 이미지는 오래전부터 형성되어 있었지만, 조조가 활동했던 시대보다 거의 천 년 뒤 원말명초에 쓰인 '나관중' 소설 '삼국지연의'가 대중적으로 널리 읽히면서 그런 이미지는 더욱 강하게 굳어졌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조조의 정치력과 군사적 능력, 현실적 통치능력을 높이 평가하는 시각도 적지 않다. 혼란한 시대를 냉철하게 헤쳐나간 중국 역사 속 가장 뛰어난 실용주의 정치가라는 평가도 함께 존재한다.
역사는 그런 것이다.
한 시대가 만들어놓은 인물평이 영원한 진실이 되는 것은 아니다.
앞 편에서 나는 '신숙주'가 오랫동안 '변절자'라는 한 단어로 기억되어 온 과정을 이야기했다. 신숙주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는 조선시대부터 존재했지만 근대에 들어 '박종화'와 '이광수' 등의 역사소설, 그리고 이후 수많은 사극과 대중문화가 더해지면서 <'성삼문'과 대비되는 배신자 '신숙주'>라는 이미지는 더욱 강하게 굳어졌다.
특히 신숙주 부인이 남편의 변절을 부끄러워해 목을 매어 죽었다는 이야기는 한동안 역사적 사실처럼 널리 알려졌지만, 앞 편에서 살펴보았듯 전혀 사실이 아니다.
아마도 사람들이 신숙주에게 유독 더 큰 배신감을 느꼈던 것은 '설마 신숙주가...'라는 기대가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세종대왕'에게 총애받았고 성삼문과 함께 집현전에서 학문을 했으며 훈민정음과 음운연구에도 깊이 참여했던 사람이 '수양대군' 편에 섰다는 사실 자체가 후대 사람들에게 더욱 큰 배신으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계유정난과 '단종' 죽음은 조선왕조 역사에서도 손꼽히는 비극적인 사건이었다.
그러나 한 인물이 잘못된 권력과 함께 걸었다고 해서 그 사람이 평생 쌓은 능력과 업적까지 모두 지워버려야 하는지는 또 다른 문제이다.
앞 편 내 글에 어떤 분이 이런 댓글을 달았다.
“신숙주는 5공 '전두환' 시절 '김재익' 같은 사람이다. 김재익이 있었기에 5 공시절 대한민국 경제가 살아났다.”
그 댓글을 읽으며 나는 한동안 생각했다.
나는 1980년 당시 광주 소재 대학 2학년 학생이었다. 그 혼란 한복판에서 나 역시 총을 들고 하루 정도 거리를 헤맨 적이 있다. 그래서 내 기억 속 5·18은 단순히 '민주화운동'이라는 공식명칭만 으로는 모두 담기지 않는다. 나에게 그날은 지금도 '학살'이라는 기억으로 남아 있다.
12·12 군사반란과 이어진 신군부의 권력장악 과정, 그리고 5·18에 대해서는 이후 사법적 판단도 내려졌다. 대법원은 1997년 12·12를 군사반란으로, 5·17과 5·18 과정의 행위를 내란과 내란목적살인 등으로 판단했다.
그렇다고 그 시대에 이루어진 모든 경제정바카라과 관료들 역할까지 하나의 잣대로만 평가해야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나는 1981년 군대에 입대해 3년 뒤 전역했다. 입대하기 전 내 기억 속 세상은 온통 흑백에 가까웠다. 텔레비전도 그랬고 거리 풍경과 사람들 옷차림까지 빛바랜 사진처럼 기억에 남아 있다. 그런데 불과 3년 뒤 전역하고 돌아와 보니 세상이 몰라보게 달라져 있었다. 텔레비전 화면만 컬러로 바뀐 것이 아니라 거리와 광고판, 사람들 생활 모습까지 빠른 속도로 변하고 있었다. 나는 겨우 3년 군대에 있었을 뿐인데 마치 흑백시대에서 컬러시대로 건너온 사람처럼 낯선 세상을 바라보았다.
그 무렵 경제수석을 지낸 '김재익'은 물가안정과 시장기능 확대, 개방을 중심으로 경제정바카라 방향을 바꾸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물론 1980년대 경제성과를 김재익 한 사람 공으로 돌릴 수는 없다. 국제경제환경과 기존 정바카라의 누적효과, 긴축정바카라 등 여러 요인이 함께 작용했다. 다만 KDI 역시 당시 '안정·자율·개방'을 중심으로 경제운영 틀이 바뀌는 과정에서 김재익의 역할을 중요하게 설명하고 있다.
결국 한 정권에 대한 역사적 평가와 그 정권 안에서 일한 한 관료의 능력과 업적이 반드시 똑같은 것은 아닐 수 있다.
나는 신숙주 역시 그런 시선으로 한번 바라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신숙주의 정치적 선택을 변명하자는 이야기는 아니다.
여기에서 한 가지는 정확히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신숙주는 1453년 계유정난이 벌어졌을 당시 외직에 나가 있어 정변 현장에 직접 참여한 인물은 아니었다. 실제로 뒤에 신숙주 자신도 정난 때 자신에게는 '조그마한 공효도 없었다'며 공신호를 삭제해 달라고 청했다. 그럼에도 그는 정난공신 2등에 바카라록 되었고 곧 수양대군 정권 핵심으로 들어갔다. 이후 세조정권에서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고 단종과 '금성대군' 문제에서도 강력하게 처벌을 주장했고, 그 정권의 선택에 함께했다. 그러므로 계유정난 현장에 없었다는 사실과 이후 세조정권 중심인물로 살아간 정치적 바카라임은 구분해서 볼 필요가 있다.
그러나 그것이 신숙주 59년 인생 전부는 아니다.
사실 나는 오래전에도 신숙주에 대해 이런 변명 아닌 변명을 하는 글을 쓴 적이 있다.
그 글을 쓴 얼마 뒤 '신숙주 직계후손'이라고 소개받은 분과 점심을 같이했다. 내 친구인 전 KBC 앵커 '신선호'가 마련한 자리였는데 신선호 친구의 갑장 사촌으로, 신숙주 가문 기념사업회에서도 중요한 일을 맡고 있다고 했다.
식사를 하던 중 그분이 내게 말했다.
“신숙주 어르신에 관해 쓰신 글을 읽었습니다. 그동안 잘못 알려진 부분들을 바로잡아주신 것은 고맙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는 아쉽습니다. 우리 할아버지를 너무 나약한 지식인으로만 그리셨습니다. 그분은 문무를 겸비한 장군 스타일 지식인이었습니다.”
그러더니 집안에서 내려오는 이야기라면서 이런 말까지 했다.
“신숙주 할아버지는 말을 탈 때 말에 손도 대지 않고 뛰어올라 탔고, 소 아홉 마리를 일렬로 세워놓아도 뛰어넘을 정도로 몸이 날랬다고 합니다.”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건 조금 무협지 같은데...'^^
가문에서 내려오는 이야기이니 어디까지 사실인지는 알 수 없다. 소 아홉 마리를 뛰어넘었다는 이야기를 역사적 사실이라고 써버릴 수는 더더욱 없다.
하지만 맛있는 점심까지 얻어먹었는데 그냥 넘어갈 수도 없었다.^^
그래서 집에 돌아와 신숙주에 관한 기록들을 다시 한번 뒤져보았다. 그런데 자료를 찾아볼수록 한 가지는 분명해졌다.
소 아홉 마리를 뛰어넘었다는 이야기는 몰라도 우리가 사극과 소설에서 흔히 보아온 '나약하고 줏대 없는 바카라상물림 신숙주' 이미지는 실제 기록 속 신숙주와 상당한 거리가 있었다.
'성종실록'에 실린 신숙주 졸기를 보면 그는 어려서부터 글을 한번 읽으면 곧 기억할 정도로 총명했고 성품은 '관후하고 활달했으며', 경사에 두루 밝고 큰일을 결정할 때 자질구레한 것에 얽매이지 않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친척에게는 은혜로 대하고 동료에게는 성심으로 대했으며 집안 종들에게까지 은의를 베풀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이것은 신숙주 후손이 만들어낸 가문 전설이 아니라 그가 세상을 떠난 뒤 조정에서 남긴 공식기록이다.
신숙주는 1417년 전라도 나주에서 태어났다. 증조부는 '신덕린', 할아버지는 '신포시', 아버지는 집현전 부제학 등을 지낸 '신장'이었다.
어려서부터 머리가 뛰어났던 그는 1438년 진사시 초시와 복시에서 연이어 장원을 하고 이듬해 문과에서도 제3인으로 뽑혀 관직에 들어갔다.
흔히 천재라는 말을 쉽게 쓰지만 이 정도면 당시 기준으로도 보통 머리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세종은 이런 신숙주를 일찍부터 눈여겨보았다.
신숙주는 성삼문 등과 함께 훈민정음과 음운연구에 깊이 참여했고 중국 한자음을 연구했다. '성종실록'은 그가 정음에 밝고 중국어에 능통했으며 사대교린 외교문서 작성에도 뛰어났다고 평가한다. 훗날 일본의 정치와 지리, 외교관계와 풍속 등을 정리한 '해동제국기'까지 남겼으니 오늘날 식으로 표현하면 학자이자 외교관이고 언어전문가이며 국제정보분석가 역할까지 했던 사람이다.
신숙주의 담대한 성품을 보여주는 일화도 실록에 그대로 남아 있다.
1443년 세종이 일본에 사신을 보낼 때 신숙주는 서장관으로 따라갔다. 당시 일본을 오가는 뱃길은 지금처럼 몇 시간 비행기를 타고 다녀오는 길이 아니었다. 배 한번 잘못 만나면 그대로 바다에서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위험한 여정이었다.
더구나 신숙주는 당시 병을 앓다가 막 회복한 상태였다. 세종이 먼 길을 갈 수 있겠느냐고 걱정하자 그는 병이 이미 나았는데 어찌 감히 사양하겠느냐며 길을 떠났다.
일본에서 돌아오던 길에 거센 풍랑을 만났다. 배 안 사람들이 모두 겁에 질렸지만 신숙주는 태연했다.
'사내가 마땅히 사방을 멀리 돌아다녀야 하는데 이미 일본도 보았으니 이 바람을 타고 중국 금릉까지 가서 그곳 문물까지 볼 수 있다면 그것도 즐겁지 않겠느냐'는 뜻으로 말했다고 실록은 전한다.
그런데 더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배에는 왜구에게 붙잡혀갔다가 돌아오던 임신한 조선 여인이 타고 있었다. 풍랑이 계속되자 일부 사람들이 임신한 여자가 배에 탔기 때문에 이런 일이 생겼다며 그 여인을 바다에 던지려 했다.
지금 생각하면 어처구니없는 미신이지만 당시 사람들에게는 생사가 걸린 순간이었다.
그때 신숙주가 막아섰다.
“사람을 죽이고 내가 살기를 구하는 것은 차마 할 일이 아니다.”
얼마 뒤 실제로 바람이 잦아들었고 일행은 무사히 돌아왔다.
이 이야기는 후대에 꾸며낸 야담이 아니라 '성종실록' 신숙주 졸기에 그대로 남아 있다.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나약한 지식인 신숙주'와는 상당히 다른 모습이다.
수양대군 역시 신숙주의 이런 능력을 일찍 알아본 듯하다.
1452년 수양대군이 명나라에 사신으로 갈 때 신숙주가 서장관으로 동행했고 이 여행을 계기로 두 사람은 더욱 가까워졌다.
그런데 세조가 신숙주를 어떻게 보았는지를 보여주는 아주 흥미로운 기록이 '세조실록'에 있다.
1457년 '양녕대군'이 신숙주를 가리켜 말했다.
“신숙주는 서생이지만 현명하고 재능이 많습니다.”
그러자 세조가 대답했다.
“다만 서생일뿐 아니라 곧 지장(智將)입니다. 신숙주는 나의 위징입니다.”
세조는 사관에게 이 말을 기록하라고까지 명했다.
'지장.'
이 한마디가 내가 신숙주 후손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다시 떠올리게 만들었다.
소 아홉 마리를 뛰어넘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적어도 당시 사람들이 신숙주를 바카라상 앞에만 앉아 있는 문약한 선비로만 바라보지는 않았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실제로 신숙주에게는 우리가 잘 알지 못했던 또 하나의 얼굴이 있었다.
군사전략가 신숙주이다.
1460년 북방 여진세력과 충돌이 이어지자 세조는 대규모 북방정벌을 결정했다. 이른바 '경진북정(庚辰北征)'이다.
조정에서는 정벌을 두고 여러 의견이 엇갈렸지만 '성종실록' 신숙주 졸기는 신숙주가 적극적으로 정벌을 주장했다고 기록한다. 세조는 그를 강원도·함길도 도체찰사로 삼아 직접 북방으로 보냈고 신숙주는 여러 갈래로 군사를 나누어 북방작전을 총괄했다. '세조실록'에도 세조가 신숙주를 불러 북정을 의논하고 정벌대바카라을 세운 사실이 남아 있다.
내 소설 '조선의 아이돌'에서도 이 북방전쟁을 비교적 자세하게 다루었다. 여기에서 몇 명을 죽이고 몇 명을 사로잡았느냐는 숫자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신숙주가 한양에 앉아 군사들에게 명령서나 써 보내던 문신이 아니라 직접 북방으로 올라가 군사작전을 총괄했던 지휘관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때 신숙주의 담대한 모습을 보여주는 유명한 이야기가 전한다.
조선 후기에 그려진 '북관유적도' 가운데 '야전부시도'
(夜戰賦詩圖)'라는 그림이 있다.
북방에 나가 있던 신숙주 진영을 여진군이 밤중에 기습하자 군사들이 놀라 진영이 흔들리려 했는데 신숙주는 소란을 피우기는커녕 오히려 누운 채 막료를 불러 시를 읊었다는 이야기이다.
그때 지었다고 전하는 시가 있다.
[오랑캐 땅에 서리 내리니 변방은 차갑고 철갑기병 백 리 사이를 내달리네. 밤 싸움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새벽은 오고 누워 바라보니 별들이 비껴 있구나.]
장수들과 군사들은 총사령관이 태연하게 누워 시를 읊는 모습을 보고 마음을 가라앉혔다고 한다. 이 일화는 실록 현장기록이라기보다 후대 기록과 그림으로 전해오는 이야기인 만큼 그대로 역사적 사실이라고 단정할 필요는 없다. 다만 후대 사람들이 신숙주를 어떤 지휘관으로 기억했는지를 보여주는 흥미로운 자료임은 분명하다.
적이 야습해 온 한밤중에 총사령관까지 벌떡 뛰어다니며 호들갑을 떨면 부하들은 더욱 불안해질 수밖에 없다. 후대 사람들이 기억한 신숙주는 그런 순간 오히려 자신이 태연한 모습을 보이며 군사들의 동요를 막는 장수였다.
소 아홉 마리를 뛰어넘었다는 가문의 이야기는 확인할 수 없지만 적어도 북방전쟁을 직접 총괄하고 군사작전을 지휘했던 사람을 단순히 '나약한 문신' 이라고만 묘사하는 것도 실제 모습과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신숙주는 외교에서도 당대 최고 수준의 전문가였다.
그는 젊은 시절 직접 일본에 다녀왔고 대마도를 거쳐 일본의 지리와 정치·풍속을 살폈다. 이런 경험과 오랜 외교 실무를 바탕으로 1471년 왕명을 받아 '해동제국기'를 편찬했다.
일본 본토와 구주, 대마도, 일기도, 유구국 등 지리와 정치·외교관계, 사신접대 방식과 풍속 등을 정리한 바카라으로 오늘날까지도 15세기 동아시아와 한일관계를 연구하는 중요한 자료로 남아 있다.
대여진 외교와 명나라 외교에서도 신숙주는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성종실록'은 그가 오랫동안 예조 일을 맡아 사대교린을 자신의 소임으로 삼았고 국가 외교문서 상당수가 그의 손에서 나왔다고 기록하고 있다.
한마디로 조선 초기 외교현장에서 신숙주 이름을 빼고 이야기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그런데 이렇게 학문과 외교, 군사에 모두 능했던 신숙주 실제 성품은 우리가 생각하는 근엄한 대학자 모습과도 조금 달랐던 모양이다.
신숙주는 술을 좋아했고 상당히 호방한 인물이었다는 일화가 여러 기록에 전한다.
세조 역시 신하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는 것을 좋아했던 왕이라 두 사람이 만나면 술자리도 꽤 길어졌던 모양이다.
술을 마시다가 신숙주가 세조 팔을 비틀어 세조가 비명까지 질렀다는 일화는 앞 편에서 이미 이야기했다.
또 다른 재미있는 이야기도 있다.
세조가 신숙주와 구치관을 놓고 벌였다는 유명한 '신정승, 구정승' 이야기이다.
세조가 새로 정승이 된 '구치관'과 기존 정승 신숙주를 불러 술을 마시다가 “신정승”이라고 불렀다. 신숙주가 대답하자 세조는 “나는 새 신(新)정승을 불렀는데 왜 신(申)정승이 대답하느냐”며 벌주를 먹였다. 이번에는 “구정승”이라고 부르자 구치관이 대답했다. 그러자 세조는 또 “나는 옛 구(舊)정승을 불렀는데 왜 구(具)정승이 대답하느냐”며 벌주를 내렸다. 다음에는 둘이 눈치를 보며 아무 대답도 하지 않자 이번에는 임금이 부르는데 신하들이 대답하지 않는다며 또 벌주를 먹였다고 한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왕이 정승들을 앉혀놓고 '아재개그'를 하며 술을 먹인 셈이다.^^
이런 이야기는 조선 전기 '서거정' '필원 잡기'처럼 당시 사대부 슬롯 일화와 견문을 담은 필기류를 통해 전해졌다. 세세한 장면 하나하나를 정치사의 엄밀한 기록처럼 받아들일 필요는 없지만 세조와 신숙주를 비롯한 대신들이 얼마나 가까운 관계 속에서 지냈는지를 엿보는 데에는 흥미로운 자료가 된다.
이런 일화들을 보면 세조라는 인물 역시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것처럼 냉혹한 모습 하나로만 설명하기는 어렵다. 신하들과 술을 마시며 농을 주고받고 가까운 사람들과 인간적인 정을 나누는 모습도 있었다. 그러나 그런 모습을 보고 있으면 오히려 계유정난이나 사육신 사건에서 보여준 냉혹함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다시 생각하게 된다.
어쩌면 어느 시대나 정치와 권력에는 한 사람 안에서도 쉽게 설명하기 어려운 여러 얼굴이 함께 얽혀 있는지도 모른다.
신숙주와 '김시습' 사이에 전하는 이야기도 흥미롭다.
김시습은 세조정권을 받아들이지 않고 세상 밖을 떠돌았던 사람이고 신숙주는 그 정권 한가운데로 들어간 사람이었다.
후대에는 김시습이 한양에 와도 자신을 찾아오지 않자 신숙주가 김시습이 자주 들르는 집에 부탁해 술을 잔뜩 먹인 뒤 자신의 집으로 데려오게 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술이 깬 김시습이 그곳이 신숙주 집이라는 것을 알고 나가려 하자 신숙주가 붙잡고 “왜 나에게 말 한마디 하지 않느냐”며 안타까워했지만 김시습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은 채 소매를 뿌리치고 나가버렸다는 것이다.
사실 여부를 그대로 믿기보다는 후대에 전해진 일화로 받아들이는 것이 좋겠지만 두 사람이 걸었던 서로 다른 길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이야기이기는 하다.
한 사람은 세조의 세상을 거부하고 떠돌았고 한 사람은 그 세상 한가운데로 들어가 나라를 운영했다.
나는 이런 이야기를 읽을 때마다 신숙주가 자신의 선택에 대해 아무런 고민도 하지 않았던 사람은 아니었겠다는 생각도 해본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내 생각이다.
역사가는 사람 마음속까지 들어갈 수는 없다.
신숙주가 정말 죄바카라감을 느꼈는지 자신 선택을 끝까지 옳다고 믿었는지는 우리가 알 수 없다. 그래서 역사에서는 기록으로 확인되는 행동과 후대 사람들이 덧붙인 해석을 구별해야 한다.
신숙주의 호는 '보한재(保閑齋)'였다. '한가로움을 지킨다'는 뜻이다.
신숙주가 남원 광한루에 올라지었다고 전하는 시 가운데 이런 내용도 있다.
[뜬 구름 같은 부귀공명 따질 것이 못되니 임천의 흥취 아직 버리지 못하겠노라. 인생에 천명 있음 이제야 믿겠노니 공명은 물리치기도 어렵고 구하기도 어려워.]
수십 년 동안 권력 가장 가까운 곳에서 살아온 사람이 부귀와 공명이 뜬구름 같다고 노래했으니 묘한 느낌이 든다.
현대사 권력 한복판을 관통하며 살아온 JP '김종필'도 말년에 “정치는 허업(虛業)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평생 정치를 하고 권력을 만들고 움직이는 자리에 있었던 사람이 노년에 이르러 정치 허망함을 이야기한 것이다.
사람은 권력을 쥐고 있을 때는 좀처럼 그 속성을 보지 못하고 모든 것을 내려놓을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그 허망함을 깨닫게 되는 것일까?
권력을 누릴 만큼 누린 뒤에야 그런 말을 한다고 비꼬아 볼 수도 있고 정말 인생 말년에 권력과 명예의 허망함을 느꼈다고 볼 수도 있다.
판단은 독자의 몫이다.
1475년 신숙주는 5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마지막 유언도 신숙주답다.
장례를 검소하게 치르고 불교식 의례를 쓰지 말 것이며 자신 관 에는 바카라을 함께 묻어달라고 했다. 평생 바카라을 읽고 글을 쓰며 살아온 사람다운 마지막이었다.
이 내용 역시 '성종실록' 신숙주 졸기에 남아 있다.
그런데 나는 여기에서 '성종실록'에 적힌 사관의 평가를 하나 더 이야기하고 싶다.
실록 사관은 신숙주 능력을 칭찬하기만 하지 않았다.
세종이 문종에게 “신숙주는 국사를 맡길 만한 사람”이라고 했고 세조가 큰일이 있을 때마다 신숙주의 의견을 물었으며 “나의 위징”이라고 했던 사실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동시에 신숙주가 세조를 섬길 때에는 임금 뜻을 따르는 데 치우쳤고 '예종' 때 형정이 공정을 잃었는데도 이를 바로잡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그리고 그것을 신숙주의 '단점'이라고 분명히 기록했다.
여기에서 말하는 '예종 때 형정이 공정을 잃었다'는 대목을 보면 특히 신숙주가 직접 처리에 관여했던 '남이 역모사건'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다만 사관이 이 한 문장으로 남이 사건만을 특정해 지적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으므로 남이 사건을 포함한 예종대 형정 전반에 대한 비판으로 보는 것이 더 조심스러울 것이다.
내가 쓴 소설 '조선의 아이돌'에서도 이 부분을 매우 중요하게 각색했다.
남이의 죽음을 회상하던 소설 속 화자는 끝내 울음을 터뜨리며 이렇게 말한다.
“한명회나 다른 사람은 몰라도 신숙주 대감까지 남이의 죽음을 모른 체할 줄은 몰랐다.”
물론 이것은 어디까지나 내가 쓴 소설 속 인물의 말이다.
그러나 '성종실록'의 사관이 예종 때 형정이 공정을 잃었는데도 신숙주가 이를 바로잡지 못했다고 비판한 대목과 겹쳐놓고 보면 묘한 여운이 남는다.
신숙주는 뛰어난 학자였고 외교관이었으며 나라를 운영할 능력이 탁월한 재상이었다. 그러나 권력과 정면으로 맞서 자신 뜻을 끝까지 관철하는 사람은 아니었던 듯하다. 그런 점에서 보면 신숙주는 이상이나 명분만을 좇기보다는 현실 권력 안으로 들어가 그 안에서 자신 역할을 다하려 했던 사람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오히려 이 기록이 마음에 든다.
신숙주를 무조건 훌륭한 사람이라고 칭송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그가 세운 수많은 공적과 능력을 모두 지워버리지도 않았다.
장점은 장점대로 기록하고 단점은 단점대로 남겼다.
'어쩌면 역사를 바라보는 태도도 그래야 하지 않을까?'
우리는 오랫동안 신숙주를 '숙주나물'과 '변절자'라는 두 단어로 기억해 왔다.
물론 그가 세조정권을 선택한 정치적 바카라임까지 지워서는 안 된다. 계유정난 당시 정변 현장에 직접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정난공신으로 바카라록 되었고 이후 세조정권 핵심에서 권력을 행사했으며 단종과 금성대군 문제에서도 그 정권과 길을 함께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신숙주의 59년 인생 전체를 설명할 수도 없다.
그는 세종에게 '국사를 맡길 만한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았던 학자였고 세조에게는 '서생이 아니라 지장'이며 당태종의 '위징'과 같은 사람이라는 말을 들었던 재상이었다. 일본을 직접 다녀온 외교관이었고 훈민정음과 음운연구에 참여한 언어학자였으며 '해동제국기'를 남긴 국제전문가였다. 북방으로 직접 나가 군사를 총괄했던 지휘관이기도 했다.
집안 종들에게까지 은의로 대했다는 기록이 있고 죽는 순간까지 바카라을 놓지 않았던 사람이기도 했다.
동시에 세조정권 가장 깊숙한 곳에서 권력을 행사했고 단종을 지키는 길을 선택하지 않았으며 권력 앞에서 지나치게 순응했다는 비판까지 받은 사람이었다.
나는 그래서 신숙주를 '충신'이라고 새롭게 포장하고 싶은 생각도 없고, '변절자'라는 이름을 억지로 지워주고 싶은 생각도 없다.
다만 역사를 볼 때 사람 하나를 단어 하나로만 기억하는 것은 위험하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
성삼문을 높이 평가한다고 해서 신숙주 모든 업적을 지워야 하는 것도 아니며 신숙주 능력과 업적을 인정한다고 해서 성삼문과 사육신 죽음을 가볍게 볼 이유도 없다.
두 사람은 같은 시대를 살았지만 서로 다른 길을 택했다.
한 사람은 죽음으로 자신 신념을 증명했고 다른 한 사람은 살아남아 자신이 선택한 정권 한가운데에서 나라를 운영했다.
그리고 57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난 지금도 우리는 그 두 사람이 선택한 길을 놓고 이야기하고 있다.
그만큼 신숙주는 단순하지 않은 사람이다.
'변절자 신숙주.'
그것도 신숙주 얼굴이다.
그러나 그것이 신숙주 얼굴 전부는 아니다.
역사는 한 사람에게도 여러 얼굴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때 조금 더 재미있어지고, 조금 더 진실에 가까워진다.
오늘 이야기는 조금 길어졌다. 신숙주 한 사람 이야기에 그치지 않고 그와 닮은 역사 속 여러 인물과 권력 속성까지 함께 들여다보다 보니 자연스럽게 이야기가 길어졌다.
그래도 여기까지 읽어주신 분들이라면 역사 속 인물은 어떻게 기억되는지 또 소설과 드라마 같은 대중문화가 한 사람 이미지를 얼마나 강하게 만들어낼 수 있는지 한 번쯤 생각해 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한다.
다음 화에서는 세조와 그 시대 권신들이 남긴 치적을 살펴보겠습니다.
ㅡ 초롱박철홍 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