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밥

뜸 들이기

by그리고

밥을 짓다 보면 애매하게 밥이 남을 때가 있다. 억지로 더 먹기엔 배가 부르고, 버리기엔 아까워서 밀폐용기에 덜어 냉장고에 넣어둔다.


다음날, 달군 팬에 파를 썰어 넣어 파기름을 내고 냉장고에 넣어 두었던 찬밥을 꺼내 달걀과 함께 볶는다. 참기름과 소금을 살짝 두르면 어제의 찬밥이 훌륭한 달걀볶음밥으로 다시 태어난다. 한 번 차게 식어 단단해진 밥이어야만 센 불과 기름 앞에서도 으깨지지 않고 밥알 사이사이로 양념이 고르게 밴다. 볶음밥을 하기에는 갓 지은 밥보다 찬밥이 좋다.


문득 찬밥이 우리 부부를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애 시절의 우리는 별것 아닌 말에도 웃었고, 헤어진 지 몇 시간 되지 않아 다시 보고 싶다는 말을 주고받았다. 늦은 밤까지 이어지는 통화도, 더 오래 만나기 위해 먼 길을 돌아가는 일도 전혀 수고롭지 않았다. 서로를 향한 마음은 갓 지은 밥처럼 뜨거웠다.


결혼을 하고 신혼을 지나 아이를 낳고 나니, 매일이 뜨거운 불 위에서 ‘지지고 볶는’ 일의 연속이었다. 아이를 먹이고 입히고 재우고 끝없이 밀려드는 집안일을 해내는 동안 연애 시절의 온도는 자연스레 한 김 식어갔다.

하루가 다 지나도록 제대로 눈을 마주치지 못한 날도 있었고, 아이를 겨우 재운 뒤 식탁에 마주 앉아서는 서로의 스케줄을 확인하는 생활 대화만으로도 벅찼다.


그러던 어느 날 친정엄마가 유방암이라는 소식을 들었다. 병원에서 이것저것 검사를 해볼 것을 권할 때 남편 혼자 외벌이로 꾸려가는 집안 살림이 떠올라 나도 모르게 살짝 눈치가 보이고 말았다. 경제적인 걱정과 엄마에 대한 미안함으로 마음이 한없이 작아지던 그때, 남편은 망설임 없이 의사에게 말했다.

“제일 좋은 것으로, 확실하게 다 해주세요.”

돈 걱정이나 계산 따위는 조금도 섞이지 않은 든든한 목소리였다. 내 부모의 아픔까지 자신의 몫으로 고스란히 짊어지고, 내게 힘이 되어 주는 사람이 곁에 있다는 것이 감사했다.


연애 시절의 뜨거움도 닿을 수 없는 마음이 있다. 오래 함께 함으로 서로의 삶은 물론, 그 안에 드리운 그늘까지 기꺼이 끌어안고자 하는 것. 설렘을 지나 바카라임과 신뢰로 깊어진 사랑이다.


어쩌면 사랑은 식는 것이 아니라 다른 온도로 익어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뜨겁고 달콤했던 마음이 시간이 흐르며 한 김 식고, 그 자리에는 쉽게 부서지지 않는 단단한 신뢰가 남는다. 서로에게 온전히 기대지 않아도 괜찮고, 그렇다고 멀리 떨어지지도 않은 채 각자의 자리에서 제 몫을 해내며 나란히 알맞게 익어간다.


살다 보면 어떤 날은 조금 짜고, 어떤 날은 싱겁다. 예상치 못한 일로 계획했던 것과 전혀 다른 하루가 되기도 한다. 오늘도 우리는 지지고 볶으며 살아간다. 세상 어디에도 없는 고소한 우리들만의 맛으로.

수, 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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