뜸 들이기
자주 만나지는 못하지만 계절이 바뀔 때마다 안부를 주고받는 친구가 있다. 스무 살 무렵, 나와 같은 꿈을 꾸던 친구다. 우리는 늦은 밤까지 소주잔을 기울이며 언젠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게 될 우리의 미래를 이야기했다. 그때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었기에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청춘이었다. 시간이 충분하다고 믿었고, 꿈은 노력하면 언젠가 닿을 수 있는 목적지 같은 것이었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아직 그곳에 도착하지 못했다. 아니, 어쩌면 가는 길이 아주 많이 달라졌는지도 모르겠다. 각자의 자리에서 제법 치열하게 살아가는 중이다. ‘잘 지내?’라는 한마디에 그동안 밀린 생존 신고가 시작된다.
나는 요즘 방구석에서 글을 쓰며 딱히 대단할 것 없는 하루를 보낸다. 한국으로 돌아갈지는 아직 결정하지 못했다. 친구는 얼마 전 승진을 했다. 한바탕 축하를 건넸더니 남편 회사 사정은 그리 좋지 않다는 이야기가 돌아왔다. 좋은 일 하나에 걱정 하나, 다행인 일 하나에 또 다른 불안 하나.
우리는 늘 그랬듯 과거를 추억하고, 현재를 걱정하고, 아직 오지도 않은 미래를 미리 걱정한다. 우리는 잘 지내고 있는 걸까? 스무 살의 우리에게 물었다면 아마 지금과는 다른 대답을 했을 것이다. 꿈꾸던 일을 하고 있는지, 원하는 만큼 이루었는지, 어디까지 왔는지를 따져보았을지도 모른다. 그때의 나는 잘 산다는 것이 앞으로 계속 나아가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긴 수다가 끝날 무렵 친구가 말했다.
“다시 만날 때까지 잘 지내. 아프지 말고, 밥 잘 챙겨 먹고. 잘 자고 좋은 꿈 꿔.”
우리가 이제 바라는 것이 고작 밥 잘 먹고, 아프지 않고, 푹 자는 일이 되었다. 매일 제때 밥을 챙겨 먹는 일. 몸이 굳지 않게 조금이라도 움직이는 일. 피곤한 날에는 미련 없이 잠드는 일. 마음이 힘든 날에는 괜찮은 척하지 않는 일. 좋아하는 일을 조금씩이라도 계속해 나가는 일. 한 사람의 하루를 무너지지 않게 붙들어주는 것은 대개 이런 사소한 것들이다.
남편의 셔츠를 잘 다려 옷장에 걸어 두었다. 잘 다려진 셔츠 한 장이 중요한 날 그의 어깨를 조금은 반듯하게 펴줄지도 모른다. 아이의 준비물을 확인하고 가방을 살핀다. 아직은 물건 챙기는 것에 미숙한 아이가 학교에서 난처한 하루를 보내지 않도록 미리 마음을 써두는 일이다.
내가 집안에서 하는 일은 별것 아닌 일들이다. 누구에게 자랑할 만한 성취도 아니고, 눈에 보이는 결과가 남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잘 지낸다는 것은 원래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다. 누군가의 하루가 크게 흔들리지 않도록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작은 일들을 반복하는 것. 나는 매일 가족들의 밥을 짓고, 셔츠를 다리고, 이불을 펴고, 집을 정리한다. 말로는 하지 않아도, 그 모든 일이 결국 같은 마음을 전하고 있다.
잘 지내라고.
무언가를 꼭 이룬 하루가 아닐지라도 오늘 먹을 밥을 챙겨 먹고, 걱정이 있어도 한숨 푹 자고 일어나 다시 하루를 살아낼 수 있다면 그것도 충분히 잘 지내는 삶일지도 모른다.
당신은 잘 지내나요?
당신이 잘 지내면, 나도 잘 지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