뜸 들이기
아이가 조금 자랐나 보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제대로 불지 못하던 풍선을 이제 곧잘 불어낸다. 칭찬했더니 더 큰 풍선을 불겠다며 애를 쓴다. 그러다 한껏 부푼 풍선이 펑하고 터져 버렸다. 얼굴이 시뻘게진 아이는 씩씩거리며 터진 풍선 조각을 내던졌다.
“실망이야.”
나도 불고 있던 풍선에 힘껏 바람을 불어넣어 일부러 터뜨렸다. 그리고 아이의 말을 따라 했다.
“실망이네.”
화가 났던 아이의 얼굴에 금세 웃음이 번진다. 나의 육아도 아이와 함께 조금 자란 모양이다. 창밖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풍선들이 살랑살랑 흔들리는 주말 오후. 유난히 아이가 내뱉은 ‘실망’이라는 단어가 마음에 남는다.
나에게도 터질 듯한 풍선처럼 큰 꿈을 품었던 시절이 있었다. 다큐멘터리 작가를 꿈꾸며,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도록 열정을 불어넣었던 시절. 하지만 어느 순간 팽팽해진 풍선이 터져 버릴까 두려워졌다. 결국 꿈을 포기하고 취업이라는 안전한 선택을 하고 결혼을 하고 한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
오랫동안 나는 그 선택을 꿈에서 멀어진 일이라고만 생각했다. 상처받지 않기 위해, 스스로를 보호한다는 이유로 적당히 부풀리다 만 꿈은 마음 한구석에 쭈그러진 채 남아 있었다. 그 미완의 풍선이 문득 발끝에 채일 때면 한 번도 온전히 부풀려보지 못한 아쉬움이 가슴을 쳤다.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밥은 불을 끈 뒤에도 뜸을 들이는 동안 속까지 익어간다. 솥 안에 남은 열이 쌀알 깊숙이 스며들고, 겉돌던 물기가 천천히 잦아든다. 서둘러 뚜껑을 열면 설익은 밥이 되지만 조금 더 기다리고 나면 비로소 한 끼가 완성된다.
어쩌면 꿈을 접어두었던 시간은 긴 뜸 들이기였는지 모른다. 아이를 낳아 기르며 엄마가 되고, 아내가 되어 살아가는 평범한 하루가 글의 재료가 된다.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다고 생각했지만, 나는 일상의 온기 속에서 이전과는 다른 모습으로 천천히 익어가고 있었다.
아이의 순수하고 무모한 기대가 울컥할 만큼 부러운 날이다. 이제는 터질까 봐 두려워 꿈을 적당히 부풀리다 내려놓고 싶지 않다. 언젠가 내 꿈도 한 번쯤은 펑하고 터뜨려 보고 싶다. 그리고 지독하게 실망해보고 싶다.
창가의 풍선들이 바람에 살랑살랑 흔들린다. 오래 뜸을 들인 내 꿈에도 작은 바람이 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