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와 오롯, 나만의 찻자리

차가 우러나는 동안, 나에게 남기는 한 문장

by박현정

제주에서는 혼자 보내는 시간이 많았다. 길을 걷고, 바카라을 읽고, 차를 마셨다. 그 시간을 지나며 내가 어떤 자리를 좋아하는지 조금씩 알게 되었다. 오래 앉아 있어도 서두르게 하지 않는 곳, 바카라을 덮은 뒤에도 잠시 더 머물 수 있는 곳. 그런 자리에서는 평소 뒤로 미뤄 두었던 생각을 천천히 살펴볼 수 있었다.


서울에서 공간을 만들기로 했을 때에도 그 시간을 먼저 떠올렸다. 혼자 찾아온 사람이 자기 속도로 차를 마시고, 자신에게 조금 더 주의를 기울일 수 있기를 바랐다. 어떤 잔과 차를 놓을지 고민하는 동안, 그 안에서 사람이 어떻게 머물지를 함께 생각했다.


고요미학에는 두 가지 찻자리를 마련했다. ‘고요’와 ‘오롯’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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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테리어 랜더링 이미지


고요는 티바에서 한 잔씩 알맞게 우려낸 차와 다과를 즐기는 자리다. 누군가 정성껏 준비한 잔을 받아 마시며, 가까이에서 차를 내리는 모습을 바라볼 수 있다. 바깥에서 하던 일을 잠시 내려놓고 가볍게 기대어 쉬고 싶은 날을 생각했다.


오롯은 직접 차를 우리는 자리다. 조용히 구획된 한 사람의 공간에서 잎차를 고르고, 차의 성격에 맞는 작가의 다기로 여러 번 우려 마신다. 따뜻한 물과 작은 다식, 기록 도구를 곁에 두고 백 분 동안 머문다.


찻잎에 물을 붓고 기다리는 동안에는 손이 잠시 멈춘다. 차를 잔에 옮기고, 향을 맡고, 한 모금을 마신 뒤 다시 물을 붓는다. 같은 찻잎에서도 처음과 다음의 맛이 조금씩 달라진다. 그 차이를 느끼려면 잔을 가까이하고, 입안에 남은 감각을 잠시 살펴야 한다.


나는 그 작고 사소한 동작들로 차분해지는 마음을 전하고 싶었다. 물을 붓는 손, 잔에 담긴 빛깔, 손끝에 닿는 온도에 주의를 기울이는 일. 머릿속에 여러 생각이 오가는 날에도 차를 마시는 동안만큼은 지금 눈앞에 있는 것을 천천히 바라볼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생각하는 리추얼은 그런 시간이었다. 익숙한 행동에 마음을 조금 더 쓰는 일. 매일 마시는 차도 물을 기다리고 향을 살피며 마시면, 내가 나에게 내어주는 시간이 될 수 있다. 오래 지속해야 한다는 다짐에 앞서, 오늘 잠시 그렇게 해 보는 마음을 생각했다.


그 시간 곁에 짧은 글과 작은 수첩을 놓는다. 고요문과 고요록이다.


오롯석에서 건네는 고요문은 차와 함께 읽는 작은 글이다. 그 이름에는 글 문(文)과 드나드는 문(門)의 뜻을 함께 담았다. 고요미학이 건네는 한 편의 글이 읽는 사람에게는 자신의 생각과 감각을 살피는 문이 되기를 바랐다. 그 짧은 틈을 통해 자기 안으로 들어갔다가, 차를 마신 뒤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는 모습을 생각했다.


"따뜻한 잔을 쥐고서야 손이 차가웠다는 것을 압니다.
내게 필요한 것을
이렇게 뒤늦게 알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 자리에 앉아 자신의 말을 남길 자리도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고요록의 ‘록’은 기록할 록(錄)이다. 고요미학에서 차를 마시며 만난 감각과 생각을 적어두는 작은 수첩을 제작해 그 이름을 붙였다. 영문 이름은 GOYO LOG이다. 날짜를 따라 기록이 쌓이는 log의 의미처럼, 서로 다른 날의 찻자리가 한 권 안에 이어지기를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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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쪽에는 그날의 차와 향, 입안에 남은 맛을 적고, 다른 쪽에는 떠오른 생각을 남긴다. 지금 필요한 것, 기분이 좋아지는 장면, 앞으로 더 자주 하고 싶은 일을 묻는 짧은 질문도 곁에 두었다. 나는 오랫동안 블로그에 일상과 여행, 마음에 남은 공간들을 기록해왔다. 그날 본 것과 느낀 것을 글로 옮기려면, 잠시 그 시간을 되짚어 보게 된다. 무엇이 좋았는지, 왜 오래 바라보았는지, 어떤 생각이 남았는지. 문장을 고르는 동안 지나간 경험이 조금 더 구체적인 모습으로 남는다.


내게 기록의 의미는 그곳에 있었다. 분명히 느꼈지만 아직 말로 옮기지 못한 것에 잠시 머무는 일. 머릿속에서 맴돌던 생각을 종이 위에 놓고, 내가 쓴 말을 다시 읽어 보는 일이다. 막연히 피곤하다고 느낀 하루에도 마음을 쓴 장면은 서로 다를 수 있다. 한 줄을 적다 보면 그날 무엇이 나를 지치게 했고, 무엇이 잠시 편안하게 했는지 조금 더 자세히 바라보게 된다.


차의 향을 적는 일도 그러할 것이다. ‘구수했다’는 말 하나를 고르기 위해 다시 한 모금을 마실 수 있다. ‘따뜻했다’고 쓴 뒤에는 잔의 온도와 그 자리에 머물던 느낌을 함께 떠올릴 수 있다. 쓰려고 살피는 동안 감각에 조금 더 오래 머물게 된다. 기록에는 시간이 지난 뒤에야 보이는 것도 있다. 내가 지나온 시간과 지금의 마음 사이에 생긴 차이를 살피면서 말이다.


이곳에서 적은 한 줄이 돌아간 뒤의 생활에도 작은 자리를 얻으면 좋겠다. 하고 싶은 일을 적었다면 그 일에 잠시 시간을 내어보고, 편안했던 순간을 남겼다면 바쁜 날에 다시 떠올려 보는 것. 차를 마시며 자신에게 기울였던 주의가 일상에서도 조금 이어지기를 바란다.


고요와 오롯은 차를 마시는 방식이 서로 다르지만, 그 안에서 내어주고 싶은 시간은 같다. 오늘의 감각을 느끼고, 지금의 마음을 살피며, 자기 속도로 머무는 시간이다.


언젠가 고요록을 다시 펼친 사람이 그날의 차와 함께 자신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기를 바란다. 차 한 잔을 마신 사소한 순간이지만 그 씨앗이 어느 틈엔가 자기 삶의 일부로 남아 싹이 움트길 바라는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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