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를 짓는 일

한 사람의 생각이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 공간이 되기까지

by박현정

도면 속에 있던 선들이 조금씩 벽과 바닥, 가구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비어 있던 벽에 돌이 놓이고, 머릿속으로만 그려보던 자리의 윤곽이 드러났다. 공사 현장을 바라볼 때마다 설렘과 걱정이 함께 들었다. 오래 생각해 온 공간이 눈앞에 생겨나는 일은 신기했지만, 그만큼 내가 결정하고 바카라임져야 할 것들도 구체적으로 다가왔다.


고요미학은 스물여섯 평 남짓한 공간이다. 차와 물건을 만나는 자리, 차를 우려내는 티바, 혼자 머물며 차를 마시는 오롯석을 이 안에 담고 싶었다. 처음부터 많은 사람을 수용하는 공간을 생각하지는 않았다. 혼자 찾아온 사람이 자신의 자리에 편안히 앉아, 각자의 방식으로 시간을 보낼 수 있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 바람을 실제 공간으로 옮기는 일은 생각보다 어려웠다. 도심 속 1960년대 후반에 지어진 건물은 층고가 낮았고, 손댈 수 있는 부분에도 제약이 있었다. 도면에서는 괜찮아 보였던 간격이 현장에서는 좁게 느껴졌다. 나누고 싶은 자리와 확보해야 할 동선 사이에서 여러 번 생각을 고쳐야 했다. 한정된 공간에 내가 바라는 것들을 모두 담을 수는 없었다.


낮은 천장도 처음에는 걱정이었다. 하지만 설계를 위해 함께 논의를 해가며, 이 공간이 가진 조건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생각하게 되었다. 높고 탁 트인 공간과는 다른 분위기가 조금씩 보였다. 제약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지만, 그 안에서 만들 수 있는 자리를 찾아가고 있었다.


색과 재료를 고르는 일도 쉽게 끝나지 않았다. 벽의 선 하나, 조명의 위치, 페인트 색의 채도 한 톤이 공간의 인상을 바꾸었다. 이미 정한 색과 재료를 다시 살펴보고, 작업을 되돌려 뜯어내고 다시 할 때도 있었다. 작은 차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현장에서는 작지 않았다.


문제는 그때마다 비용도 뒤따랐다. 더 마음에 드는 것을 고르다 보니 정해진 예산을 이미 초과한 터라 고민이 거듭 이어졌다. 어느 부분에는 조금 더 들이고, 어느 부분에서는 욕심을 덜어야 할지 판단하는 일이 반복되었다. 선택을 마쳤다고 생각한 뒤에도 다시 선택해야 했다.


마음만으로는 풀리지 않는 문제들을 마주하며 막막해질 때가 있었다. 머릿속에서는 분명했던 공간을 현실에서는 왜 이토록 어렵게 설명하고 조율해야 하는지, 내가 생각한 방향이 맞는지 되묻기도 했다. 고요한 자리를 만들고 싶어 시작한 일이었지만, 그 과정의 내 마음은 조급함을 더한 불안한 파동이 이어졌다.


그럴 때마다 함께 도면을 펼쳐보는 사람들이 있었다.

공간을 설계하고 시공하는 분들, 브랜드의 형태를 함께 다듬는 분들과 이야기를 해나갔다. 내가 원하는 느낌을 말로 전하면, 그것을 실제 치수와 재료, 시공 방법으로 옮겨주었다. 가능한 것과 어려운 것을 함께 살피고, 처음 생각한 방법이 맞지 않을 때는 다른 길을 찾아주었다. 그저 돈을 받고 하는 일이 아닌 진심으로 이 일을 대해주신다는 느낌이 전해졌다.


내가 바라는 분위기를 이해하는 일과 그것을 현장에서 구현하는 일 사이에는 많은 수고가 있었다. 다시 확인하고, 조정하고, 손보는 일이 필요했다. 내가 결과로 보게 되는 벽과 가구 뒤에는 각자의 경험과 판단, 시간을 들여 해결한 문제들이 많았다.


늦은 밤까지 현장에서 작업을 이어가던 손길들, 인쇄소 등을 오가며 고요미학에 맞는 소재와 소품들을 찾아주던 발길들, 보이지 않는 곳까지 섬세하게 살피는 눈길들을 모아준 이들에 대한 고마움이 커져갔다.


고요미학은 내가 시작한 공간이지만, 혼자 만드는 공간은 아니었다.

한 사람의 생각이 다른 사람에게 전해지고, 그 사람의 손을 거쳐 조금씩 실제의 모습에 가까워졌다. 내가 미처 알지 못했던 부분을 짚어주는 사람이 있었고, 말로만 설명했던 느낌을 구체적인 형태로 만들어주는 사람이 있었다. 그 도움을 받을 때마다 감사함과 함께 내 몫의 바카라임도 느꼈다. 함께 애쓴 시간이 잘 남을 수 있도록, 필요한 결정을 내리고 끝까지 살피는 일은 내가 해야 했다.


아직 결정하고 손봐야 할 일들이 남아 있다. 그럼에도 어제까지 비어 있던 곳이 채워지고, 도면 속의 자리가 눈앞에 나타나는 모습을 보면 다시 다음 일을 해나갈 힘이 생긴다. 오래 품었던 생각이 이렇게 조금씩 생활의 자리가 되고 있었다.


이 공간을 찾아올 사람들을 생각한다. 자리에 앉아 차를 기다리는 시간, 따뜻한 잔을 손에 쥐는 순간, 혼자 읽거나 쓰다가 잠시 아무것도 하지 않는 때를 떠올린다. 우리가 오래 고민한 간격과 빛, 재료가 그 시간을 편안하게 해주면 좋겠다.


이곳에 머무는 동안 몸과 마음이 조금 편안해지고, 돌아갈 때는 잘 쉬었다는 느낌이 남기를 바란다. 함께한 이들의 시간과 정성이 그런 경험으로 이어진다면 좋겠다.


내가 제주에서 차를 마시며 보냈던 시간이 그랬듯, 누군가에게도 하루의 속도를 잠시 늦출 수 있는 자리를 내어주고 싶다. 이곳을 짓는 데 들인 마음을, 앞으로 이곳에 머무는 사람들의 시간을 살피는 데에도 이어가려 한다.


이를 위해 여러 사람의 노력과 시간을 담아 고요를 짓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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