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걷고, 잠시 올려다본 날들
딸이 한창 대학 입시원서를 준비하던 가을, 숨 쉬는 고래 제주 리트릿 스튜디오에서 아침 요가 수업을 들었다. 수업을 마칠 때 선생님이 건넨 말이 유독 마음에 닿았다.
“인요가의 다정함이 오늘 하루 내내 당신에게 머물기를.”
딸아이의 애씀과 부담감이 온전히 전해져 조바심과 잔걱정이 많았던 때였다. 그 마음을 안고 요가를 하러 갔다가 수업이 끝날 무렵에는 내 몸의 긴장도 조금 풀려 있었다. 걱정이 드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선생님의 말을 마음에 담고 남은 하루를 보내고 싶었다.
추석날에는 딸과 사계해변을 걸었다. 구름이 잔뜩 끼어 그날 보름달은 못 볼 줄 알았는데, 걷는 사이 구름 틈으로 달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딸과 잠시 걸음을 멈추고 각자의 소원을 빌었다.
제주에서는 별과 달을 보려고 밤하늘을 올려다보는 일이 많아졌다. 사계해변에서 본 보름달은 금빛으로 유난히 밝았다. 그 빛에 마음을 모아 보냈다.
겨울에는 강풍과 눈 때문에 동쪽 숙소에서 꼼짝없이 머문 날이 있었다. 그날의 고생은 오래 기억에 남을 만했지만, 덕분에 고요 속 온기를 담은 시간이었다.
눈 쌓인 나무의 그림자가 벽에 드리워지고, 둥근 창 너머 마당에는 눈발이 날렸다. 바깥의 바람을 바라보며 따뜻한 실내에 앉아 있던 자리가 유난히 포근했다. 바람이 지나며, 하늘을 가르는 눈으로 차갑지만 선명한 겨울의 시간 속에서 따뜻함이 무엇인지 느껴졌다.
혼자 걷고 싶을 때는 새미은총의 동산을 찾았다. ‘묵주기도의 호수’를 따라 걷거나 작은 교회인 ‘순례자의 교회’에 들러 잠시 머물렀다. 오롯이 걷고 생각하며 나와 마주하는 길이었다.
종교 활동을 하지는 않지만, 오랫동안 많은 사람의 기도와 염원이 쌓인 장소에서는 마음이 차분해졌다. 나와 가족의 안녕을 빌고, 걱정이 앞설 때는 내 마음이 무엇 때문에 불안한 지도 가만히 살펴봤다.
여름에는 뜨거운 열기를 피해 곶자왈숲으로 들어갔다. 앞만 보며 걷다가 고개를 드니 우거진 나뭇잎 사이로 햇빛이 들어왔다. 잎이 흔들릴 때마다 땅에 닿는 빛의 모양도 달라졌다.
그 모습을 보고 영화 〈퍼펙트 데이즈〉를 본 뒤 오래 기억해 둔 ‘코모레비’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나뭇잎 사이로 일렁이는 햇살을 뜻하는 말로 바로 그 순간에만 존재한다. 나의 일상에 틈새를 비추는 빛을 발견하고, 잠시나마 하늘을 보고 느끼는 찰나의 행복감이 느껴졌다.
제주집에서는 핸드폰 알람보다 새소리에 먼저 눈을 뜨는 날이 많았다. 동트기 전에 일어나 창밖을 보면 한라산 뒤로 저 멀리 해가 떠올랐다. 그 모습을 보고 하루를 시작하면 왠지 기운이 났다. 앞으로 살아갈 날들에서도 이렇게 일출과 일몰을 자주 만나고 싶었다. 하루가 밝아오고 저무는 시간을 알아차리며 그 순간을 음미하는 삶이라면 꽤 잘 살고 있다는 기분이 들 것 같았다.
제주에서의 일상은 비교적 느슨하고 단순했다. 그 안에는 새로운 만남도 있었다. 아이를 키우며 비슷한 걱정을 해온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웃고 마음을 쓰는 시간이 제주 생활을 이어가는 힘이 되었다.
혼자 보내는 시간도 자연스럽게 늘었다. 그즈음 '홀로움'이란 단어를 접했다. 혼자 있기를 스스로 선택하고 그 시간에 나를 돌아본다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혼자의 시간으로 더 깊어지는 법에 관하여>에서 읽은 "잠깐 마음을 재설정하고 혼자만의 시간을 가져라"는 문장도 이런 시간을 기꺼이 내어주게 했다.
딸의 곁에 머물려고 시작한 제주 생활이었다. 그곳에서 바카라을 읽고 운동을 하고, 걷다가 하늘을 올려다보는 시간이 이어졌다. 차분하다, 다정하다, 감사하다고 느끼는 순간들이 얕고 잦은 파동처럼 찾아왔다. 나 자신과 만나는 이 반복되고 고요한 시간들이 나를 키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