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미학이라는 이름

소란을 덜어내고 나로 머무는 자리

by박현정

제주에서 지내는 동안 ‘고요’라는 말을 자주 떠올렸다. 숲을 걷고, 바다를 바라보고, 혼자 바카라을 읽거나 차를 마시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자연스럽게 가까워진 단어였다.


처음에는 그저 조용해서 좋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바다 앞에는 파도 소리가 있었고, 숲에는 새와 바람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명상을 하던 방에도 창밖을 지나는 차 소리와 함께 앉은 사람들의 숨소리가 들렸다. 그 안에서 나는 오히려 내 발걸음과 호흡에 집중할 수 있었다. 고요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을 때보다, 지금 무엇을 느끼고 있는지 알아차릴 때 가까워졌다.


수평선을 오래 바라보고 있으면 복잡했던 생각이 조금씩 가라앉았다. 바카라을 읽다가 마음에 남는 문장 앞에서 멈추면, 미처 정리하지 못한 내 생각을 되짚어보게 됐다. 혼자 보내는 시간도 좋아졌다. 누구의 말에 답하거나 다음 일을 서두르지 않고,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걱정하는지 살필 수 있어서였다.


차를 마실 때에도 비슷한 시간이 찾아왔다. 물을 끓이고, 잔을 데우고, 찻잎이 우러나기를 기다렸다. 먼저 향을 맡고 따뜻한 잔을 손에 쥐어 천천히 마셨다. 다기를 만지고 차의 온도를 느끼는 사이 마음도 조금씩 차분해졌다. 나를 위해 잔을 꺼내고 그 시간을 충분히 쓰는 일이 좋았다. 누군가와 마실 때에는 같은 손길로 그 사람의 잔도 준비했다.


차를 마신 뒤에도 해야 할 일은 남아 있었다. 다만 한동안 내 몸과 마음에 주의를 기울이고 나면 무엇부터 할지 차분히 생각할 수 있었다. 제주에서 내가 좋아하게 된 고요는 그런 시간이었다. 잠시 멈추어 흐트러진 것을 살피고, 다시 하루로 돌아오는 일. 한 번의 쉼으로 완성되는 상태라기보다 생활 속에서 거듭 익혀가는 태도에 가까웠다.


그렇게 보내는 시간이 늘자 평범한 하루를 소홀히 여기고 싶지 않았다. 바카라장을 넘기고, 마음에 드는 그릇을 꺼내고, 날씨에 맞는 차를 고르는 일들이 하루를 이룬다. 좋아하는 것을 오래 누리고 싶다면 그것들이 놓이는 생활도 잘 가꾸어야 했다. 내게 고요한 시간은 하루에서 따로 떼어놓은 특별한 시간이 아니라, 매일의 선택에 조금 더 마음을 쓰게 하는 시간이었다.


내게 고요의 울림은 그 시간이 지난 뒤에도 남는 생각이었다. 오늘은 무엇 때문에 조급했는지, 어떤 순간에 기분이 좋아졌는지 스스로 묻게 됐다. 걷고, 읽고, 차를 마시는 일을 반복하면서 나를 살피는 일이 조금씩 생활에 배어들었다. 마음이 흔들리는 날에도 다시 찾을 수 있는 나만의 순서가 생긴 셈이었다.


내가 만들 공간에도 그 시간을 담고 싶었다. 그래서 ‘고요’에 ‘미학’을 붙였다.


내가 생각하는 미학은 아름다운 것을 보고 감탄하는 데서 생활로 이어진다. 무엇을 곁에 두고 무엇을 덜어낼지, 어떤 속도로 걷고 어디에서 잠시 멈출지, 사람과 물건을 어떤 태도로 대할지. 그런 선택들이 쌓여 한 사람의 삶의 모습을 만든다고 생각한다. ‘고요미학’은 고요를 삶을 다듬는 하나의 미학으로 바라보고 싶다는 뜻에서 정한 이름이다.


이름을 붙이고 공간을 준비하자 생각은 구체적인 질문이 됐다. 혼자 온 사람이 어느 자리에 앉으면 편안할지, 오래 머무는 동안 의자는 불편하지 않을지, 잔은 손에 쥐었을 때 어떤지. 차를 직접 우리고 싶은 사람에게는 그 시간을 어떻게 내어줄지도 생각했다. 공간의 아름다움은 그곳에서 보내는 시간과 떨어져 있지 않았다. 사람을 맞이하고 차를 내는 방식까지 살피며 고요미학이라는 이름을 만들어가고 있다.


상표 등록을 마친 뒤에는 머릿속에 있던 네 글자가 조금씩 현실의 일이 되어가는 것을 느꼈다. 아직 고르고 고쳐야 할 것이 많다. 바쁜 하루에 자신을 위한 시간을 내어주는 데에는 작은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도 안다. 혼자 와서 편히 앉아 차를 마시고, 잔을 내려놓은 뒤에도 조금 더 머물 수 있는 자리였으면 한다. 서울의 일상 속에서 누군가 잠시 소란을 덜어내고 자기 자신으로 머무는 시간을 마련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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