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랑한 제주 2

맑은 향기는 스스로 멀리 간다

by박현정

제주의 겨울은 바람이 매서웠다. 회색빛 풍경 속에서 붉은 꽃망울을 피운 동백은 그래서 더 눈에 띄었다. 겨울의 추위와 바람을 온전히 받으며 피는 꽃. 겹겹이 펼쳐진 꽃잎을 보고 있으면 동백을 가슴에 품고 봄을 기다리는 마음이 어떤 것인지 알 것 같았다.

진실한 사랑과 겸손한 마음의 꽃말을 품은 동백나무


꽃샘추위가 채 가시지 않은 날에는 대정읍 제주추사관을 찾았다. 마당 앞에 수선화가 촘촘히 피어 있었다. 곧게 뻗은 초록 잎 위에 하얀 꽃받침과 노란 잔을 올려놓은 듯한 모습이 청초하면서도 고고한 기품이 느껴진다. 차가운 공기 속에서 조용히 피어 있는 꽃을 보며, 추사 김정희가 유배지인 제주에서 홀로 보냈을 시간도 생각했다.


수선화의 향기는 이미 알고 있었다. 농민장터에서 신문지에 둘둘 말린 수선화 한 단을 사 온 적이 있다. 집에 두었더니 맑은 향기가 거실 가득 퍼졌다. 추사관 마당에서 다시 만난 수선화 앞에서 한동안 떠나질 못했다. 외로움과 혹독한 시련 속에서도 향기를 잃지 않고 곧게 피어난 수선화는 추사 자신의 모습이기도 했다.


봄이 깊어지자 상효원에서는 왕벚나무가 꽃을 피웠다. 나무를 보자마자 “와, 이토록 아름다운 꽃나무라니!” 하는 말이 절로 나왔다. 일 년 중 이 꽃을 볼 수 있는 날은 길지 않지만 그 어떤 날보다 화려하고 아름다운 순간을 남긴다. 이를 위해 일 년을 준비했을 벚나무들의 기다림과 비로소 봄의 절정을 누리게 해주는 자연의 순리에 감탄한다.

상효원의 왕벚나무

제주의 봄꽃을 보러 이름난 곳만 찾아간 것은 아니다. 고요하고 평화로운 골목길을 걷고 싶을 때면 조수리를 찾았다. 한적한 농가와 연못이 있는 이 동네에는 계절마다 길가에 꽃이 피었다. 5월에는 붉은 덩굴장미가 담장과 길가를 채웠다. 조용한 골목에서 제주 사투리가 크게 들려 돌아보니, 밭일을 하던 할머니 세 분이 새참을 드시며 이야기를 나누고 계셨다. 파란 하늘 아래 선홍빛 장미와 그 곁의 정겨운 모습이 함께 기억에 남았다. 가을에 코스모스가 피면 다시 걷고 싶은 길이기도 했다.

연못이 아름다운 동네, 조수리


화려한 봄꽃이 지나간 뒤에도 제주에는 향기로 먼저 알아차리는 꽃들이 있었다. 산바카라하다 달콤한 냄새를 따라 고개를 돌렸더니 때죽나무에 작은 흰 꽃들이 달려 있었다. ‘스노벨’이라는 이름처럼 아래로 매달린 모양이 꼭 작은 종 같았다.


완연한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가는 길목에는 달리기를 하다가도 코끝을 스치는 향기에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달큰한 냄새가 가시고 나면 이번에는 새콤한 향기가 났다. 귤꽃이었다. 얼마 지나 아기 주먹만 한 열매가 주렁주렁 달릴 귤나무지만, 내게는 5월의 꽃향기도 오래 남았다. ‘맑은 향기는 스스로 멀리 간다’는 말이 떠오르는 계절이었다.

때죽나무와 귤꽃나무

6월이 되면 제주는 그 어디보다 풍성하고 화려해진다. 형형색색으로 피워낸 수국 꽃송이들은 보는 것만으로도 부푼 행복감으로 가득 차게 만든다. 수국의 이 다채로운 색감은 뿌리내린 토양에 따라 피어나는 것이라고 한다. 자기가 뿌리내린 환경에 적응해 나가는 작은 존재들이 함께 보여 거대하고 탐스러운 아름다움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동광리 수국길과 마노르블랑의 수국

제주에서는 계절이 바뀔 때마다 다시 보고 싶은 꽃이 생겼다. 길에서 마주치면 걸음을 멈추고, 향기가 좋으면 조금 더 가까이 갔다. 때로는 꽃 한 단을 사서 집으로 돌아왔다.


매년 피어나는 꽃이지만 그 감동은 언제나 새롭다. 사계절 지천에 피고 지는 꽃들이 있어 제주에서는 잔잔한 활기와 기운을 얻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피어나는 회복력과 그 존재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답고 의미 있다는 것을 가르쳐준다. 그런 꽃을 옆에 두고 사는 것이 어울리는 인생을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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