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로 가져온 시간

제주에서 익힌 고요가 찻자리가 되기까지

by박현정

불이 꺼졌다. 나지막한 선생님의 목소리에 맞춰 자세를 잡고 눈을 감았다. 두 시간 동안 진행될 몰입명상의 시간이다. 천천히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며 나의 호흡을 느껴 보았다. 어느 순간 숨이 얕아져 다시 깊게 들이마시고, 길고 천천히 내뱉었다. 스무 명 남짓한 사람들이 모인 공간에 들리는 것은 창밖으로 지나가는 차 소리와 숨소리뿐이었다. 그 적막함이 신기했다.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들을 알아차리다가 입안에 고인 침을 꼴깍 삼켰다. 이 소리가 옆 사람의 수련을 방해할까 봐 조심스럽게 넘기는 나도 보였다. 얼마쯤 지났을까. 다리의 감각이 무뎌지고 발끝이 저려왔다. 선생님은 그 불편함을 나만 느끼는 것이 아니며, 함께 앉아 있는 사람들도 비슷한 감각을 지나고 있을 거라고 알려주셨다. 나는 움직이지 않고 조금 더 그 자리에 머물렀다.


잔잔한 호수에 조약돌이 떨어지면 수면에는 물결이 인다. 그때 내 다리의 저림도 그런 물결 같았다. 몸의 감각은 그대로였는데, 그것을 바라보는 마음은 어느 순간 평온해졌다. 입가에 미소가 지어지더니 눈물이 흘렀다. 그동안 찾아 헤매던 고요한 마음이 바로 여기에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찰나였다.


그저 흘러가는 일상적인 크로노스의 시간이 아닌, 지금 여기에 있는 나에게 온전히 마음을 쓰는 시간. 내게는 그 순간이 ‘카이로스’였다. 고통과 불편함이 곧 내 전부가 아니며, 지나가는 것들을 알아차리고 다시 돌아올 힘이 내게도 있다는 사실을 몸으로 배웠다. 바카라을 읽으며 머리로 이해했던 말들이 그날은 온몸으로 전해지는 듯했다.


제주에 머문 이 년 동안 가장 잘한 일 중 하나로 숨 쉬는 고래의 명상지도자과정을 꼽는 이유다. 그 수련 과정을 마치며 나는 ‘나를 찾고, 나누고, 즐기는 삶’을 만들어 가고 싶다고 적었다. 이제 막 명상이라는 세계에 발을 디딘 때였고, 앞으로 변화해 갈 나 자신이 기대됐다.


나를 찾는다는 것은 꾸준한 수련을 통해 내면의 지혜에 귀를 기울이고, 내 삶을 조금 더 이로운 방향으로 이끌어가는 일이었다.


나눈다는 것은 배우고 경험한 것을 혼자 간직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다른 사람도 자신을 바라볼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보고 싶다는 마음이었다.


즐긴다는 것은 내가 마주한 순간을 정성껏 대하는 것. 맛있는 음식을 먹고, 자연과 예술의 아름다움에 감탄하고, 좋은 사람들과 함께하는 시간을 기쁘게 누리고 싶었다.


딸의 곁에 머물기 위해 시작한 제주 생활에서 그런 시간들이 하나씩 쌓였다. 딸을 학교에 보내고 걷던 길, 비 온 뒤 숲의 냄새, 바카라을 읽다 오래 머문 문장, 따뜻한 차 한 잔. 물론 제주에서의 하루가 늘 평온했던 것은 아니다.


딸의 일로 마음이 조급해질 때도 있었고, 서울에 두고 온 일과 앞으로의 생활을 생각하면 머릿속이 산란했다. 그럴 때면 잠시 앉아 내 숨을 살피거나 밖으로 나가 걸었다. 걱정이 사라지지는 않아도, 그 마음에 휩쓸린 채 하루를 보내지 않을 방법을 조금씩 익혔다.


제주를 떠날 무렵, 익숙한 풍경들이 유난히 선명하게 다가왔다. 바람과 숲, 꽃과 새, 새벽 공기와 창으로 들어오던 햇살. 그곳에 사는 동안 자주 보았던 것들인데 서울로 돌아가는 날이 다가올수록 더욱 하나하나 눈에 담고 싶었다. 떠남이 남기는 또렷한 선물 같았다.


짧은 여행이 아니라 다른 도시에서 이렇게 살아볼 수 있었음이 감사했다. 시작은 딸을 위한 선택이었지만, 지나고 보니 나에게도 필요한 시간이었다. 좋아하는 것이 선명해졌고, 삶을 한 가지 모습으로만 생각하지 않게 됐다.


하루의 속도를 조금 늦추고 순간에 머무르는 경험이 많아질수록 마음속 여백이 생겼다. 돌이켜보면 여전히 삶의 무게는 줄어들지 않았지만, 그 무게를 견디는 법을 배우며 단단하게 빚어낸 일상이 제주가 내게 준 선물이었다.


제주에서 머물렀던 이 시간이 내 삶의 다음 장을 여는 열쇠가 될지 모르겠다. 수련 노트에 적었던 ‘나눈다’는 말은 서울로 돌아와 고요미학을 준비하며 조금씩 구체적인 일이 됐다. 제주에서 내가 좋아하게 된 시간을 다른 이들도 자기 방식으로 누릴 수 있는 자리를 만들고 싶었다. 혼자 앉아 차를 우리고, 잔의 온기와 향을 느끼며, 잠시 자기 마음을 살필 수 있는 자리. 그 자기다움을 회복하는 순간의 여정을 찻자리를 매개로 담아보고 싶었다.


제주에서 선물 받은 벨집의 제비 잔을 떠올리는 것도 그래서다. 그 잔을 쥐고 차를 마시던 시간에는 만든 사람의 손길과 건네준 사람의 마음이 함께 있었다.


서두르지 않고 사람과 물건을 대하며, 내게 주어진 한때를 충분히 누리는 일. 제주에서 사랑했던 고요의 조각들이 서울에서 이어지기를 바라며, 이제 그 시간을 담을 자리를 정성껏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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