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고도비만 마 과장.

마운자로라도 맞아야 살 수 있어서 마 과장인 거 아냐?

by빨양c

# 소설 소개: 마흔살, 출판사 편집자. 어느 날 20년 전 투고된 미출간 원고를 발견한다.

육아에 지치고, 온라인 게임에 치이고, 사람에게 상처받으며 살아가는 원고 속 여자의 삶이 소름 끼치도록 내 삶과 닮아 있다. 이 여자는 누구일까.

그리고 이 원고에는 내 미래까지 적혀 있을까.



"03:29..? 이 원고.. 내가 어제 새벽에 했던.. 이게 어떻게..?"


'혼잣말 중얼거리는 건 좀 가식적이지 않아요? 작가님?'

나는 편집자로서 작가님들의 글을 보며

혼자 중얼거리는 등장인물은 영 어색하다며 퇴짜 놓기 일쑤였다.


애정이 가는 원고일수록 치열하게 수정해야 할 부분에 대해서 거침없이 작가님의 글에 손을 댔다.

애정이 아예 안 가는 원고는 밑도 끝도 없이 까댔다.

그것이 편집자의 의무이고 바카라임이고, 또 권리라고 믿었다.

젊은 날에는.

마흔이 되고 보니, 육아를 해서인지 업무에 그 정도 몰입할 에너지가 없어서인지 좀 덜하긴 하지만..


그런데 정작 내가 작가님들의 그 글 속 등장인물처럼 혼잣말을 하고 있다.

아무도 없는 지하 창고. 그곳에서 발견된 낡은 원고에 내가 오늘 새벽 겪은 것들이 가득 적혀있는 상황에선

정말 혼잣말이 육성으로 나오기도 하는구나- 새삼 느낀다.

느끼고 그만이어야 하는데, 작가님들에게 치열에 달궈진 칼로 서걱서걱 글을 베어내고만 젊은 날의 내 모습이 떠오른다.


앞으론 그러지 말아야지.

마흔은 포기가 빠르다. 할지 말지 고민하는 것보다, 그냥 결정을 빨리 내리고 밀고 나가는 게 낫다.

고민할 에너지도 없다. 마흔의 워킹맘에게 그런 건 사치다.


"계세요?~"

놀란 마음의 확증을 찾고 싶은 마음에 서둘러 원고의 아랫 문장으로 눈길을 돌리는 찰나, 낡은 지하창고 던전의 입구에서 묵직한 여성의 목소리가 들린다. 여성의 목소리도 충분히 묵직할 수 있다. 점잖은 것과는 또 다른 묵직함의 정체.


"아! 저 여기 있어요! 여기 폐기 원고들이 좀 이.. 아니 창고 정리 열심히 하고 있어요!!"

왜인지 입밖에 내면 안될 단어들이 섞여나가는 것 같아 황급히 말을 바꾼다.


"아! 여기 계셨구나! 지하 창고가 꽤 큰데도 으슥하네요? 팀장님이 찾으시는데 전화를 안 받으신다고 내려가보라 하셔 갖고 왔어요!"


얼마 전 경력직으로 입사해 내 옆자리를 차지한 중고 경력직 마 과장이 나를 애타게 찾고 있었다. 그녀는 나와 같은 40살이고, 경력은 비슷하다. 그래도 나름 중견 기업정도의 규모가 있는 이 출판사에 오기 전, 미국 무슨 출판사에서 편집자로 10년 정도 일하다가 그 출판사가 망하기 전에 이직을 해왔다고, 본인은 주장한다. 소문은 그 출판사는 진즉에 망한 것으로 파다하지만. 그녀의 특이한 점은 두 가지다. 하나는 고도 비만. 흔히 오타쿠로 비유되는 그런 캐릭터다. 요즘 유행하는 위고비와 마운자로가 시급해 보이는, 건강이 위협받을 듯한 몸매의 소유자. 뭐, 별 관심은 없지만. 특이점 두 번째는 팀장이 대놓고 무시하는 존재라는 점이다. 예를 들면 입사한 지 한 달이 넘어가건만, 팀장이 점심을 피한다. 에이, 팀장이 바쁘니까 잘 못 먹는 거 아니야?라는 의심이 무색하게, 정말 매일같이 마 과장과의 점심을 피한다.


"마운자로라도 맞아야 살 수 있어서 마 과장인 거 아냐?"

마 과장이 처음 온 날, 팀장이 내게 실제로 했던 말이다. 저게 정말 인간 새끼가 할 말인가 싶었다.

아무 이유 없이 사람의 보이는 외모로만 무지성 비난을 아무렇지 않게 퍼붓는 구정물. 본인은 교양 있는 역할을 맡고 싶어 하지만, 자격지심에 자존감이라고는 바닥이라 남을 뭐라도 까내려야만 본인의 존재 가치가 있다고 믿는 사람.

어떤 사람이야?라는 질문에, 음... "별볼 일 없는 사람" 일곱 글자도 아까운 사람. 아니, 공백 포함 10글자네. 이런 편집자 병. 이 병은 마흔이 돼도 바뀌질 않는다. 오히려 더 짙어지는 불길한 기분.


'그럼 본인은 구정물이 어서 구 팀장인 건가.'

물론 나는 팀장과 다르게 자격지심도 없고, 자존감도 다분한 사람이니 육성으로 내뱉진 않는다. 그저 생각만 할 뿐. 아니, 남편과 험담 할 때는 하긴 하지만.


"아, 전화요? 제가 올해 핸드폰을 바꿨는데 이게 영 설정이 뭐- 잠금모드인가 집중모드인가 어휴. 그게 설정이 어렵더라고요."

나는 마 과장의 물음에 서둘러 주머니 속 핸드폰을 꺼내본다.


18.

부재중 전화 18.

노렸네 이 구정물 같은 팀장.

그렇지 않고서야 열여덟 번의 부재중 전화를 남겼을 리가.

부들거리는 내 손에 쎄함을 느꼈는지 마 과장이 옆에서 머뭇거린다.


"후."

나는 바로 콜백을 눌러 팀장에게 전화를 할까 싶다가도 전화해 봤자 이 분노를 쏟아내기는커녕 뉘예뉘예~ 굽신거릴 걸 뻔히 알기에 다시 핸드폰을 주머니에 욱여넣는다. 그런 나를 마 과장이 재밌는 거라도 봤다는 듯 사뭇 음흉한 눈으로 살핀다.


"올라가야겠네요. 팀장님이 찾으시는 걸 보니. 에휴."

나는 힘없이 소리를 쥐어짜 낸다. 황급히 원고를 쑤셔 넣었던 작은 상자를 두 손에 바쳐 든 채 벌떡 일어나 지하 던전 출구를 향해 앞장선다.


"그거 무거우시면 제가 같이 들까요? 제가 이래 봬도 통뼈라 여자치고 힘은 좀 쓰거든요."

뒤따르던 마 과장이 묵직한 목소리로 작게 속삭인다. 속삭이는 목소리도 묵직할 수 있다는 게 신기하다.


"아, 아니요 괜찮아요. 저도 애를 하도 들어갖고 팔힘은 한 힘 하죠 하하!"

이 원고는 뺏길 수 없다. 적어도 03:29. 새벽부터 이어진 나의 오늘이 적혀있는 원고의 진실을 알 때까지는.

도대체 뭘까. 어떻게 내 생각이 그대로 적혀있을 수 있는 거지. 흥미로운 글이라면 물을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는 연어 꼬리마냥 파닥거리는 내 성미상 지금 당장이라도 저 마 과장을 올려 보내고 이 지하창고에 처박혀 읽어보고 싶지만, 18 십팔 거리는 구정물이 열여덟 번 튈까 봐 걱정되고, 무엇보다 묵직한 목소리의 마 과장을 밀어 올리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아 일단 박스만 꾹 움켜쥐고 걸음을 재촉한다.


"근데 팀장님은 왜 저랑 점심을 안 드실까요? 제가 너무 살쪄서 같이 밥 먹기 싫어하시는 건 아니겠죠?"

두 문장을 말하는데 두 문장 다 '안 드실까요. 아니겠죠.' 부정어로 끝난다. 10년이 넘은 편집자는 이런 게 참 별로다. 그 사람이 하는 말, 뱉은 문장, 써 놓은 표현들만 봐도 어떤 사람일지 지레짐작하게 된다. 마 과장은 꽤나 부정적이고 어쩌면 비관적인 면이 있지만 자기 고집은 있고, 대놓고 상대방을 훅 찌르는 묵직함이 있는 사람정도인 듯하다.


"에이~ 설마요. 바쁘셔서 그러신 걸 거예요. 설마 마 과장님 때문에 점심 안 드실 리가.. 원래 그런 분이셔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진짜."

나보다 경력이 더 긴 15년 차 편집자인 마 과장도 지금 내 문장에서 내가 어떤 스타일인지 읽었을 게 분명하다. 진실을 알지만, 네가 마음의 상처를 받을까 봐 나이 어린 내가 널 다독여주려는 말을 한 후배. 정도로 잘 전달되었어야 할 텐데.


"아니에요. 분명해. 팀장님은 저를 고도 비만. 그리고 전 온라인 게임에서 적응 못하고 운빨로 들어온 중고 경력직으로 생각하고 계신 거 같아요. 맞죠? 아닌가.."

역시. 정확하다. 바둑판 위 고수들이 깜장 돌과 하얀 돌을 번갈아 두며 상대의 패를 읽는 듯한 대화가 오간다.

그녀가 내뱉은 고도 비만, 네 글자에 흠칫 놀라 걸음이 꼬여 넘어질 뻔했다. 팀장의 생각을 정확히 읽고 있고, 그것을 감추지 않고 입 밖으로 거침없이 내뱉는다. 훅 찌르는 묵직함.

이쯤 되면 혹시 진짜로 첫날 팀장이 내뱉은 마운자로 네 글자도 마 과장의 입 밖으로 나올지 궁금해진다.


"에이~ 외모로 그렇게 사람 판단하는 사람이 진짜 있을까요? 아무도 신경 안 써요 마 과장님, 제가 알기로는"

굳이 뒤에 제가 알기로는 여섯 글자를 붙였다. 이 말은 알지 못하는 곳에선 그런 일이 벌어질 수 있다는 아주 1차원적인 완곡한 표현. 15년 차 편집자인 마 과장이라며 눈치챘을..


"아냐 아냐. 분명해. 제가 사람 보는 눈이 있거든요. 아- 이런 팀장 밑에서 어떻게 일하죠? 안 되겠어요. 인사팀이나 조직팀 아는 분한테 이야기해서 팀을 바꿔달라고, 아니 팀장님을 바꿔 줄 수 있냐고 면담 좀 해봐야겠어요. 제가 여기 인사팀장님이랑 친하거든요. 어제도 같이 밥 먹었고. 아니, 조직팀장이 나을까요? 예전에 출간작업 같이 했던 적이 있어갖고 친한데. 팀장이 바뀐 경우가 있긴 있죠? 아닌가요?"


이럴 때 보면 업계의 소문은 참 정확하다. 같은 회사가 아니어도, 그저 동종의 회사들이 묶여있는 업계. 그곳에 떠도는 마 과장의 소문은 딱 두 가지였다. 하나는 고도 비만. 두 번째는 남 험담+자기 자랑이 쩐다.


업계에서의 내 소문은 어떨까?

총매출액은 중견 출판사 나부랭이지만, 복지는 좆소기업만도 못한 회사에서 처음으로 출산휴가 90일을 쓴 편집자? 아니, 2년이나 육아휴직을 낸 편집자? 육아 휴직 후 원래 있던 팀 전원이 잘리고 바카라상의자컴퓨터 다 사라졌는데 꾸역꾸역 복직해서 6개월 동안 일하고 육아휴직 때 못 받은 30% 월급 추가로 챙겨 받은 편집자? 그리고 때려치울 줄 알았는데 꾸역꾸역 회사 건물 옆 어린이집에 애를 출근시키면서도 월급을 빌어먹고 있는 편집자.

아니면 그냥 진경이 엄마, 다섯 글자일지도.



<다음 편 계속>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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