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03:29?

이 원고는 뭐지..?

by빨양c

# 소설 소개: 마흔살, 출판사 편집자. 어느 날 20년 전 투고된 미출간 원고를 발견한다.

육아에 지치고, 온라인 게임에 치이고, 사람에게 상처받으며 살아가는 원고 속 여자의 삶이 소름 끼치도록 내 삶과 닮아 있다. 이 여자는 누구일까.

그리고 이 원고에는 내 미래까지 적혀 있을까.



"오늘도 무사히 출근할 수 있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운전석 앞자리에 앉아 대시보드 위에 붙어있던 기도용 십자가를 손에 움켜쥐고,

고개를 운전대에 파묻은 채, 혹시나 클락숀이 울릴까 걱정하는 마음을 애써 감추며

차를 떠나 회사로 향하기 전 기도를 올린다.


루틴이다. 온라인 게임인이라면 누구나 있는 루틴.

지난밤의 피곤함과 아침의 피곤함과 예상되는 하루의 피곤함과 퇴근하고 있을 피곤함과 다시 잠들 밤의 피곤함을 견디기 위한 하루의 시작을 잡는 루틴.


정적.

내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으니 차에는 적막만이 흐른다.

이쯤 되니 역시 소음을 만드는 사람은 나인 게 분명해진다.

어쩌면 나만 가만있으면, 나만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이 세상은 고요한 것 아닐까. 지금 이 적막처럼.


진경이는 어디 갔냐고?

소중한 어린이집 선생님들에 손에 무사히 인계해 주었다.


퇴근은 하신 건지, 퇴근하시고 아침에 출근은 하신 건지,

어제 하원길에 봤던 똑같은 분홍 체크 앞치마를 두르고,

어제보다 더 높은 3옥타브 솔 샵 정도 되는 하이톤 목소리의 어린이집 선생님은 정말 대단한 존재다.

9시부터 16시, 18시, 아니 어쩌면 21시까지 아이들을 내내 돌볼 수 있다니.


누가 그랬던가.

신이 온 세상에 있지 못하기 때문에 엄마라는 존재를 두었다고.

그 말은 틀렸다.

엄마라는 존재가 아니고

어린이집 선생님이라는 존재를 둔 게 맞는 것 같다.


"진경이 얼굴이 왜 그래~ 무슨 일..."

진경이를 마중하는 솔 샵의 목소리를 향해 진경이의 눈길을 피해 내가 황급히 만류의 눈빛을 쏘아댄다.

그 눈빛에는 오전 내내 발생한 수많은 일들이 가득 담겨있다.

당연히 신이 보낸 존재는 그 눈빛을 단번에 알아차린다.


"진경아 엄마 안녕히 다녀오세요 인사하자.~ 공~수!"

결국 새콤달콤을 차 바닥에 양보하고 만 진경이의 입술은 아직도 세상 뿔난 채로 삐쭉 나와있다.

입술이 움직이는 건지 진경이의 고개가 세차게 옆으로 훽 돌아간다. 얄미운.. 아니, 사랑스러운 내 딸.

누구 닮아서 저렇게, 음.. 날 닮았겠지.


"진경이 너 그렇게 계속 인사 안 할 거야?"

평소라면 그래도 하루 잘 보낼 수 있게 화를 풀어서 들여보냈을 텐데 오늘의 나는 너무나 지쳐버렸다.


"엄마 간다? 진짜 갈 거야?"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진경이가 몸을 돌려 어린이집 안으로 쏙 들어가 버린다.

난처해하는 솔 샾의 존재에게 아무런 말도 남기지 못한 채 뒤돌아서 차로 돌아왔다.

원래 같았으면 어린이집 바로 옆에 붙어있는 회사 건물로 뛰어들어갔겠지만, 오늘은 너무 지쳐 차 안으로 돌아와 기도를 올렸다.


뭐라 뭐라 기도를 많이 한 것 같은데, 결국은- 나쁜 엄마가 되지 않게 해 주세요. 진경이를 사랑하는 제 마음의 전부, 아니 절반만이라도 진경이에게 전해지게 해 주세요. 그 정도만으로도 저는 좋은 엄마일 텐데, 자꾸만 나쁜 엄마로 변해가고 있는 것만 같아 너무 힘이 듭니다. 가장 소중한, 사랑하는 저의 아이에게 나쁜 엄마가 되지 않게 해 주세요."


그리고 이어지는 마침 기도.

"오늘도 무사히 출근할 수 있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누군가 그랬다. 삶이 너무 힘들 때는 감사를 올리라고. 그러면 더 큰 행복이 온다고.

신앙심이 그닥 깊진 않지만, 그 누군가의 말을 따라 흉내 내 본다.

행복까지는 바라지도 않고,

그저 나쁜 엄마가 되지 않게 평안한 마음만이라도, 내 안에 티끌만큼의 그 마음만이라도 있다면 제발 나를 잡아달라고. 신은 바라지도 않고, 누구라도.. 내게 나쁜 엄마가 아니고 최선을 다해, 아니할 수 있는 최선보다 더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꽉 안아주길.


"MZ도 아니고 우리 진경이 엄마는 오늘도 9시 땡이야? 원칙인 회사 규정에는 10분 전인 08:50까지 착석해서 업무 준비하라고 돼있던데. 아직도 일일이 말해줘야 하나?"


무사히 출근해서 다행이라는 감사 기도 올린 게 5분도 안된 것 같은데 날아오는 원칙충 팀장의 목소리.

저놈에 원칙 타령. 자기는 얼마나 원칙을 지키길래 규정이며 원칙타령인지. 온라인 게임인이 9시 출근하면 됐지, 50분에 출근하면 10분 치 월급 더 주나? 제.기.랄. 같은 40살인데 나는 그래도 저정도 꼰대는 아닌데, 저 팀장은 뭘 먹고 싸길래 40에 개꼰대가 되있는건지 알 수가 없다.


"죄송합니다. 아침부터 애가 컨디션이 좀 안 좋아서.."


"아이고, 그러시겠지. 애들은 좋겠다~ 누가 내 컨디션은 좀 안 돌봐주나~"


나와.

감사 기도 하면 행복 온다고 한 그 누군가.

당장 나와.

나와서 저 팀장 좀 돌봐줘라 진짜.


아무 말도 못 한 채 분명 내 자리인데 남의 자리라도 된 듯 서있는 나를 팀장이 쏘아본다.


"아 그래! 이번 달에 지하 편집실 창고 정리하기로 한 거 오늘 하면 되겠다. 거기 있는 바카라 다 파쇄할 거니까 1층으로 빼놓으면 된대. 진경 엄마가 좀 해줘야겠다~ 나도 오늘 아침 컨디션이 영 안 좋아서 말야."


제.기.랄.

저 망할 구정물.

저 팀장은 온갖데 구정물 다 튀기고 다녀서 별명이 구정물인 건 알까.

분명 알면서도 저럴 거 같다. 도대체 지각한 것도 아닌데 아침부터 왜 나한테 지랄발광을 하는지 모르겠다.

당장이라도 나도 구정물 앞에 어울리지도 않는 분홍 화분 꽃을 머리에 꽂고 지랄발광을 같이 하고 싶지만,


"네."

세상은 단 한 글자로 현실의 차가움을 내 얼굴에 쏟아붓는다. 차가운 구정물.


"뭐 해? 지금 가라고."


"네? 지금요? 저 오전에 이번 작가님 미팅..."


팀장이 날 쳐다보지도 않은 채 손가락을 앞뒤로 왔다 갔다 하며 어서 꺼지라는 손짓을 한다.

언젠가 내 저 구정물을 변기통 하수구 속으로 밀어 넣고 말리라.


계획은 원대하나, 현실은 지하 창고로 향한다.


"왜 구정물은 멀쩡한 내 이름 냅두고 진경엄마라고 부르는 거야? 온라인 게임에서. 무시도 이렇게 대놓고 해대니 참... 내 인생 참.. 이게 맞나..."

입은 투덜투덜, 걸음은 터덜터덜.


끼이익-


"계세요?"

대낮인데도 이렇게 깜깜할 수 있을까 싶은 지하창고 문을 열고,

으레 해야 할 말 같아 넌지시 속삭여본다.


당연히 돌아오는 답은 없다.


"콜록콜록"

이것도 으레 해야 할 것 같아서 해봤다. 웩- 토하면서 지하 창고 탐험을 시작하는 건 좀 아닌 거 같으니.


딸깍.

오른쪽 손을 뻗어 벽에 엉거주춤 붙어 작동될까 의심되는 전기 스위치를 올려본다. 다행히 불은 켜진다. 지하창고는 처음 내려와 보는데 생각보다 깔끔했다. 계세요? 도, 콜록콜록 도 전혀 어울리지 않는 깔끔한 흰 백색의 작은 공간.


"좋아, 생각보다 나를 바카라이 많지 않군! 어디 해보자!"

순정만화의 여주인공이라면 했을 법한 대사를 슬쩍 남겨본다. 누가 들었으면 상당히 민망했을 대사. 마흔이랑은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말투. 근데 뭐 어쩌라고. 어차피 여기서 혼자 짐 나르는 건 나밖에 없는데 말야.


왜 출판사에는 남자 직원이 없을까.

아니 남자 직원이 있는데 왜 다 내가 닿지 못할 높으신 자리에만 게실까.

그들은 도대체 출근은 하는 걸까. 왜 이 회사에서는 보질 못하는가.


끙끙대며 한참을 바카라을 지하에서 1층으로 날랐다.


"이 박스는 뭐야?"

언제 적 박스인지 먼지가 수북하게 쌓인 박스가 눈에 들어온다.

영화에서 이런 거 함부로 만지면 귀신 들리고 그러던데. 좋아. 모른척하자. 이건 국룰아냐?


나는 먼지 쌓인 박스는 영원히 못 본 체 하겠다는 심산으로 뒤쪽에 있는 바카라을 차곡차곡 쌓아 양팔에 얹어 들어 올린다. 앞이 잘 안 보이지만 괜찮을 거다. 이미 수차례 왔다 갔다 했으므로.


쾅.

까만 머리 짐승은 거두지 말라고 했다.

왜 갑자기 이 말이 떠오른지 모르겠지만, 높게 높게 쌓았지만 순식간에 무너져 흰 백색의 바닥에 널브러진 바카라들과 함께 나는 바닥에 넘어져 나 뒹굴어졌다.


퍽.

"이 망할 박스"

박스에 발이 걸려 넘어지진 않았지만, 어디에라도 분풀이하고 싶었는지 내 발이 아까 귀신 들릴 거 같은 박스를 걷어차버린다. 제법 묵직했지만 역시 튼튼한 내 다리 힘에 박스가 3센치 정도 움직였다.


"이건 뭐야?"

박스 아래로 누렇게 변할락 말락 한 A4 종이 뭉텅이가 눈에 들어온다. 꽤 오랜 세월 바닥에 깔려있었는지 군데군데 까맣게 변해있는 종이 뭉텅이.


"원고?"

편집자의 직업병이다. 원고를 보면 일단 환장하고 달려드는.

그게 세상을 개벽시킬 놀라운 원고일지, 그냥 빨간 휴지 줄까 파란 휴지줄까에 나올 종이쪼가리일지 모르지만 일단 원고라면 환장하고 달려들어보는 병.


어디 보자. 이 위대한 편집자님께서 세상을 개벽시킬 원고인지 판가름해 주지.

나는 아무렇게나 바닥에 주저앉아 박스 밑에 낑겨있는 원고를 들어 올려 읽기 시작한다.


첫 문장을 읽는데 느낌이 쎄하다.


"03:29."


시간인가?


"어제도. 그제도. 그전날에도. 그렇게 언젠가부터 계속."


두 번째 문장을 읽는다. 소름이 올라온다. 발가락 끝에서부터 머리끝까지 소름이 올라온다는 게 이 느낌이겠다 싶다.


그리고 이어지는 세 번째 문장에 숨이 턱 막힌다.


"새벽 3시 29분. 그 시간만 되면 잠에서 깨고 만다."



<다음 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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