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누구 편인지 정해. 당장!

강강강강 Vs. 약강강슈퍼약

by빨양c

# 소설 소개: 마흔 살, 출판사 편집자. 어느 날 20년 전 투고된 미출간 원고를 발견한다.

육아에 지치고, 온라인 게임에 치이고, 사람에게 상처받으며 살아가는 원고 속 여자의 삶이 소름 끼치도록 내 삶과 닮아 있다. 이 여자는 누구일까.

그리고 이 원고에는 내 미래까지 적혀 있을까.



"제가 여기 인사팀장이랑 친하거든요. 어제도 같이 밥 먹었고. 아니, 조직팀장이 나을까요? 예전에 출간작업 같이 했던 적이 있어갖고 친한데. 팀장이 바뀐 경우가 있긴 있죠? 아닌가요?"


"아.. 음.. 그런 경우가 있었나.. 하하..;; 잘 모르겠어요."

나는 서둘러 마 과장과의 대화를 마무리 짓는 애매한 웃음을 던진다. 이쯤 하면 그만 말하라는 아주아주 완곡한 표현이다. 무협소설이었으면 옷깃 속에서 비수를 꺼내 당장 저 입을 봉했겠지만, 현실은 비수가 날아드는 무협 소설이 아니다. 그것보다 더한 보이지 않는 말이라는 비수가 날아드는 현실이긴 하지만.


"아침에도 진경이? 아이 데려다주고 온 걸로 팀장님 뭐라 하시는 거 보세요. 제가 시계 보니까 9시 땡 늦지도 않게 왔더구만, 무슨 원칙이 10분 전 출근이니 어쩌니~ 그러면서 본인도 9시 넘어서 온 적도 있으면서 말이죠. 적반하장. 웃기지도 않아요. 앞에서도 그러는데 뒤에서는 얼마나 더할까. 참. 제 얘기도 분명하겠죠? 뭐 들은 거 없으세요?"


"아.. 뭐.. 팀장님이 좀 그러시긴 하는데.. 음.. 늘상 있는 일이라. 아, 마 과장님 뒷담 말고요. 그냥 대놓고 그런 식으로 얘기하는 경우가 좀 있긴 하시는데.. 마 과장님 얘기는.. 뭐 별말씀 없으셨던 거 같아요. 그냥 아는 사람이 많은 것 같다. 뭐 그런 얘기 정도 하셨나.. 하하;"


나도 사람은 사람인가 보다. 절대 내편이라 믿는 남편 말고는 팀장에 대해서 말을 아끼려 노력하는데, 오늘 아침 진경엄마라 불러대던 구정물 팀장의 모습과 아직도 잠금화면에 떠있는 18번 숫자가 잔상처럼 남았는지, 마 과장의 작은 낚싯줄에 걸려 올라가고 마는 연어 꼴이라니. 팀장의 뒷담화에 동조한 것 같은 마음이 들어 영 찝찝한 마음으로 지하 창고를 나와 1층 엘리베이터에 탄다.


"아무튼, 인사팀이랑 조직팀 다 찾아가야겠어요. 저는 진경 엄마도 마음에 들고, 업무도 딱 맞거든요? 근데 팀장만 바뀌었으면 좋겠어요. 아니 왜 이유도 없이 사람을 싫어하는 거야 대체? 외모만 보고 딱 선 긋는 부류제가 잘 알거든요. 참나. 그래서 말인데, 진경 엄마도 이따 인사팀장 만나러 갈 때 같이 갈래요? 아무래도 혼자 가는 것보다 팀원이 다 가서 어필하는 게 좋지 않겠어요? 팀원도 달랑 나랑 진경엄마 둘밖에 없는 팀장이 뭐 대수라고 참."


나를 다 건져 올린 연어 대가리 하나일 뿐이라고 생각했는지, 마 과장도 나를 진경 엄마라 부르기 시작한다. 자존심이 상하지만, 내 높은 자존감이 그저 못 들은 척 넘어가라 조언한다. 딱 6년만 젊었어도 개같이 싸댔을 텐데, 거지 같은 작가 원고 작업하라고 던져주면 개같이 싸웠던 내 성질인데, 딱 6년 사이에 그럴 기운도 없어진 상태가 되었다. 아, 6년 전에는 진경 엄마라는 호칭도 없을 때라 개로 변하진 않았으려나.


띵-

도착. 엘리베이터 소리가 마 과장이 원하는 대답을 피할 기회를 주었다.

그리고 하나 더 준 게 있다.


"왜 전화 안 받아? 앙? 니 담당 작가 아까부터 저기 앉아서 열불내고 있는 거 보이지? 뭐라뭐라 꼬부랑 외국어 섞어 말라는데 머리가 빠개지는 줄 알았다. 너 때문에 말야. 수습해. 난 못하니까. 니 담당이니까 바카라임지고 저 꼬부랑 열불 알아서 꺼."


양쪽 문이 열리는 너머로 딱 봐도 본인 열불이 터지기 직전인 팀장이 삐딱한 자세로 나를 올려다보며 소리친다.


"마 과장님은 내려간 지가 언젠데 이제서야 올라와요? 할 말 전했으면 재깍재깍 올라와야지. 팀장인 저 혼자 저 열불 다 얻어맞으라는 건가. 쯧. 아니, 눈치라도 있던가."


내 뒤에 숨겨지지 않은 실루엣으로 서있던 마 과장을 향해서도 구정물이 튄다.


"죄... 죄송합니다 팀.. 팀장님.."

일부러다. 10년 차 경력인 편집자인 내 귀에 들린 15년 차 경력의 마 과장의 저 말 더듬는 문장은 일부러다. 이유는 죄송하지 않지만 죄송함을 보여야 하는 마음과, 같잔은 팀장을 팀장이라 불러야 하는 것을 티 내기 위한 문장. 약강강슈퍼약. 없는자리에선 남험담과 자기 자랑이 일상인 사람. 거기에 동조하면 자기편, 동조하지 않으면 자기편이 아닌 편. 딱 그 사이에 서서 누구 편인지 정하라고 늘 말하고 다니는 사람.


"팀장님, 그래서 제가 아까 작가님 오전에 오실 거라고 말씀드렸잖아요."

응. 이 문장의 주인공은 나다. 나는 마 과장과 다르다. 강약약강? 6년 전 기존쎄였던 내가? 나는 강강강강. 그냥 다 강이었다. 강자에게도 강. 약자에게는 더 강. 진경엄마인 지금은, 약약약약에 조금 강이긴 하지만, 예전 가닥이 조금은 남아있지.


"뭐?"

마 과장의 죄송을 이어받아 내게도 뭔가를 기대했던 구정물은 놀라지도 않았으면서 놀란 척을 한다. 육아휴직 후 3년. 이 구 팀장과 일한 지는 이제 2년 차. 그동안 나름 많은 일이 있었다. 육아도, 헬 출근도, 진경이도. 다 나를 힘들게 해서 많이 꺾였지만, 내 업무 기준은 명확하다.


아닌 건 아닌 거다.

불합리한 것에는 목소리를 낸다.

목소리를 안내면 착한 사람이 아니라 호구 소리를 듣는다.

난 자존감이 높으며, 호구가 아니므로,

할 말은 한다.

내가 이해될 때까지 아닌 건 아닌 거다.


여기에 하나 더 그럴싸한 포장을 한 겹,

"진경이, 그 세대가 사는 세상은 지금 이 구정물 사방에 튀는 곳보다는 조금이라도 나아야 한다."는 삐까뻔쩍 사명감이라는 포장까지.


"오전에 분명 말씀드렸잖아요. 그 작가님 오실 거라고. 그 작가님 저 열불낼 거 모르셨어요? 알고 창고 정리 시키신 건 줄 알고 먼지 켁켁 먹으면서 창고 정리 열심히 하고 있었는데, 이러시니 저도 참 속상하네요."


난 자존감이 높다. 구정물 너와 달리.

참지 않는다. 호구가 아니므로.

왜?

진경이가 일하는 환경에는 썩은 내 나는 구정물이 조금이라도 덜 하길 빌기에.

진경아 엄마가 널 위해서 이렇게 열심히 산단다.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절뚝절뚝 아니아니,

뚜벅뚜벅 걸어가는 자존감 높은 호구.

아니, 호구는 아니고.


"하! 진경엄마.. 지금 나랑 싸우자는 거야? 어? 마 과장, 들었어? 얘 지금 나랑 싸우자는 거지? 어? 팀장인 나한테.. 여기 얘 좀 봐요. 얘 말하는 것 좀 봐. 기가 막히네 진짜. 팀 꼬라지 참.."


그 꼬라지 만드는 게 팀장인 자신이라는 걸 왜 모를까. 2년이나 이 팀에 있었으면서, 마 과장 전임자가 왜 회사를 때려치우고 나갔는지, 저 작가는 와서 왜 화를 내고 있는지. 온 지 한 달밖에 안된 마 과장은 친하지도 않은 내게 누구 편인지 정하라고 하는지, 왜 모를까.

아니 모를 리가 없다. 구 팀장의 문장들엔 그 모든 걸 알고 있으면서도 빌붙어서 살아야 하는 자격지심의 단어가 모여 낮은 자존감의 완성을 보여준다. 10년 차 편집자의 직업병으로 내린 결론은, "별 볼일 없는 사람." 일곱 글자.


6년이 지났고, 진경이가 있으니 이쯤 해야지.

마흔이 되니 이런 게 좀 된다. 6년 전에는 개같이 짖었던 나였지만,

마흔이 되니 내 문장에 쉼표의 호흡을 조금은 담게 되었고,

그 호흡 틈에서 상대방의 기분이 눈에 선명하게 보인다.

그 호흡의 한 텀 쉬는 순간에 '이쯤 해야겠다'는 작은 들숨이 파고든다.

그러면 그 들숨이 내 문장을 닫아준다.


꼬라지를 찾던 팀장의 말에 내 닫힌 문장은 더 이상 나오지 않는다.

그저 아닌 건 아닌 거라는, 순백의 결백을 담은 눈빛으로 팀장을 내려다볼 뿐.


"아무튼, 나중에 다시 얘기해. 저 작가 처리하고. 난 점심 약속 있으니까 알아서들 해."

씩씩 거리며 엘리베이터 문을 닫는 팀장. 엘리베이터 문 밖에 다 튀겨놓은 구정물도 좀 닦고 가시지. 쯧. 별 볼일 없는 사람.


마 과장은 그런 내가 신기한 건지 눈치만 살핀다. 본인과 달리 죄송은커녕 할 말을 하는 나를 보며, 아니 내 문장들에서 15년 차 경력의 편집자는 무엇을 보았을까. 궁금하지만 묻기는 싫다. 아니, 그냥 말을 안 걸었으면 좋겠다. 6년 전 나와 6년이 지난 나의 가장 큰 변화. 사무실에서 꼭 필요한 말이 아니면 하지 않는다. 내 문장을 들키지 않는다. 마흔의 편집자에게 그것은 큰 깨달음이자, 용기였다.


사무실에서

말하지 않기.

내 문장 들키지 말기.



<다음 편 계속>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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