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식물
오랜만에 백합을 산다. 칠월이 되었다는 뜻이다. 일 년 내내 꽃시장에서 볼 수 있는 꽃이지만 에어컨을 켜야 하는 더위가 오면 백합에 손이 간다. 장마가 시작되는 유월 말부터 나의 백합계절이 시작된다. 한 단에 다섯 대인 백합은 다른 꽃보다 비싸다. 그러나 이 시기만큼은 수업 재료로 쓰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분위기를 주도하는 꽃향기와 여름 실내온도에도 거뜬히 버티는 단단한 줄기 때문이다.
장마철엔 공기 중에 수분이 많아 냄새가 잘 퍼진다. 건조할 때 숨어 있던 냄새가 축축한 수분을 따라 올라온다. 비 오는 날 부침개 굽는 냄새나 커피 향이 더 멀리 퍼지는 것과 같은 이치다. 원예치료수업은 오감을 자극할 수 있도록 한다. 식물과 꽃을 통해 느끼는 감각에서 백합은 후각을 자극하는 좋은 소재가 된다. 에어컨이 돌아가는 실내에 백합이 꽃을 피우기 시작하면 공기가 회전하면서 멀리까지 향이 퍼진다. 비가 오거나 습기가 많은 날은 향이 더 오래 지속된다.
칠월 초 백합향은 장마와 더위로 지친 공기를 신선하게 한다. 어디에서 향이 나는지 고개를 돌리게 하고 심신을 평온하게 한다. 백합꽃장식을 하고 나면 어르신이 머무는 공간은 새로운 곳이 된다. 어르신들을 도와주는 요양보호사 선생님과 복지사 선생님도 향을 즐기고 복도 너머 지나가는 사람까지 향을 궁금하게 한다.
수업 준비하면서 나를 위해서도 한 단 샀다. 한 대는 줄기 끝을 비스듬히 잘라 꽃병에 꽂고 나머지 네 대는 물병에 담아 김치냉장고에 넣어 둔다. 한 줄기에 꽃봉오리가 서너 개 달려 차례로 피기에 꽃 향기 맡기에 충분하다. 꽃이 시들면 두 번째 꽃대를 꺼내고 또 꺼내다 보면 백합 한 단을 오랜 시간 즐길 수 있다. 성당 제대에서 나는 향이기도 하고 호텔 로비에서 맡은 향이기도 하다. 집안에 꽃향기가 나면 습하고 더운 바깥공기에 지쳐 집으로 탈출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진다.
꽃시장에서 만나는 백합은 하얀색 시베리아, 노란 엘로윈, 핑크 메듀사, 또 다른 핑크의 르네브가 있다. 꽃의 모양이 대부분 홑겹이지만 최근 개량종도 나오고 있다. 빨리 시드는 홑겹의 꽃을 오래 감상할 수 있도록 겹꽃으로 만들었다. 꽃잎이 많아 빨리 시들지 않는 대신 수술 암술이 퇴화되어 버렸다. 그 모습은 식물의 생식기인 꽃의 정의에 어긋나 있다. 사람들 위해 개량되어 생식능력이 사라진 백합을 꽃이라고 해야 할지 난감하다.
꽃집에서는 백합의 꽃봉오리가 열릴 때쯤 고동빛의 어린 수술을 핀셋으로 따서 없앤다. 수술이 성숙해지면 수술가루가 생긴다. 갈색의 수술가루는 옷에 묻거나 꽃 장식할 때 주변에 번지면 지워지지 않는다. 기름보다 더 흡착력이 있어 그대로 착색이 되어 미리 제거하지 않으면 낭패를 본다. 꽃집에서 산 백합은 대부분 수술이 제거된 경우가 많다.
백합의 뿌리는 구근이다. 둥근 알뿌리에서 자라 꽃을 피운다. 꽃시장에서 보는 백합은 작은 종구를 2년간 키워서 판매된 백합 알뿌리에서 핀 꽃들이다. 백합의 백은 흰 백 백 자가 아니고 일백백의 백자이다. 구근에 작은 종구가 백개는 붙어 있다는 데서 붙인 이름이다. 사실 백개는 아니다. 그만큼 많다는 뜻이다.
속도는 느리지만 해마다 화분에서 백합을 보고 싶다면 삼월에 구근을 사서 심으면 유월 말부터 꽃을 볼 수 있다. 깊이가 있는 화분에 10cm 이상 깊게 심어야 뿌리가 잘 내려 큰 꽃을 볼 수 있다. 삼월에 산 구근은 대부분 꽃의 개화상태가 결정되어 있기에 어디에서나 잘 자라 꽃을 볼 수 있다.
백합구근은 봄에 심기에 춘식구근에 속한다. 꽃이 피고 진 후 잎이 50% 정도 시들 때가 되면 상부를 자른 후 베란다 구석에 두면 된다. 한 달에 한 번 정도 물 주며 해를 넘기고 나면 다음 봄에 싹이 다시 올라온다. 싹 난 후 햇볕 드는 곳에 두면 7월에 다시 백합꽃이 핀다.
어느 날 장례식장에 문상을 하러 갔다 나의 장례식에는 국화가 아니라 백합으로 꾸미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백합향이 좋아 백합 종류 르네브, 시베리아를 닉네임으로 쓰기도 했다. 백합처럼 좋은 향이 나는 사람이 되고 싶다.
칠월, 꽃시장에서 백합 한 단 사보자. 더위와 습기로 가득한 공간에 향기로 틈을 만들어 보면 어떨까. 향기가 만들어 준 틈으로 더위가 빠져나가길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