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죽나무 축제에 가다

오늘의 식물

by조이 영


이년 전, 수국을 그리고 싶어 여행을 계획했다. 식물 그림 그릴 때 필요한 사진을 찍기 위해서이다. 그림이나 사진 전문가는 아니지만 나만의 그림을 그리려면 직접 찍은 식물 사진이 필요하다. 많은 사진을 찍어도 막상 그리려 하면 쓸 만한 사진이 없어 난감할 때 있다. 그림만큼 사진이 중요하다. 어설픈 사진들 중에 어렵게 고른 것을 그림으로 옮기다 보면 3개월이라는 시간이 훅 넘어가기도 한다. 하지만 장소와 시간과 그림이 공존하는 기쁨을 느끼며 열심히 찍고 그린다,


5월 말 남쪽에서 올라오는 수국 축제 소식에 제주도로 떠났다. 들뜬 마음으로 축제 중인 자연농원으로 향했다. 화려한 수국이 여기저기 피어 있었다. 사진을 찍으며 수국의 모습이 자연스럽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꽃줄기들을 헤집어 보니 노지에서 핀 수국이 아니라 온실에서 키운 분화들을 옮겨 배열해 장식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야말로 자연산이 아니라 양식수국이라 해야 할까. 어렵게 찾아간 자연 개화된 수국은 아직 꽃봉오리만 겨우 맺혀 있었다.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는 곳들은 대부분 화분으로 장식한 상황이었다. 다음날도 찾아다녔지만 노지에 핀 수국은 볼 수 없었다. 농원마다 수국축제를 하고 있었는데 제주도는 아직 수국철이 아니었다.


실망하는 나와 달리 입장객들은 수국 꽃길 앞에서 사진을 찍느라 분주하였다. 화분에 심긴 수국들이지만 엄청난 양이 모여 있다 보니 꽃밭으로 손색이 없었다. 행사장에서 준비해 놓은 포토존에는 사진을 찍기 위해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 있었다. SNS에 올리는 인증사진으로 충분했지만 그림을 그리고 싶은 수국은 없었다.


며칠 밤을 묵으며 친숙해진 숙소 주인에게, 수국꽃을 제대로 못 본 아쉬움을 하소연했다. 사장님은 장마 질 때쯤 수국이 제대로 핀다고 하였다. 그랬다. 수국은 비와 함께 하는 꽃이었다. 꽃장식 하다 수국이 시들면 꽃줄기 끝을 자르고 둥근 꽃 얼굴을 통째로 양동이에 넣어 밤새 재우면 다시 활짝 피게 하였으면서 수국의 제철을 몰랐다. 장마가 되려면 아직도 보름 넘게 남았는데.


목적을 상실한 아쉬운 여행은 그렇게 지나가고 있었다. 여행의 마지막 여정으로 사려니 숲길을 찾았다. 여러 번 제주여행 중 다른 일정에 밀려가보지 못한 숲길이 었다. 제주의 사계절을 봐 왔고 익숙해진 도로와 한라산 등반까지 했지만 어떤 이유인지 인연이 닿지 않았다. 사려니 숲길은 한라산 둘레길답게 산바카라로가 잘 되어 있었다. 삼나무의 긴 높이에 놀라 하늘로 향해 눈을 두리번거리며 걸어야 했다. 원시적이지만 포근한 느낌의 숲길을 걸었다. 촉성재배된 화분으로 꾸며진 수국축제장에서 생긴 아쉬움이 깨끗한 공기에 씻겨 나갔다.


깊은숨을 쉬며 한참 걷는데 어디선가 단내가 났다. 숲길로 들어갈수록 향이 진했다. 코를 이리저리 돌리다 방울처럼 조롱조롱 달려있는 꽃과 마주쳤다. 때죽나무 꽃이었다. 일부는 땅에 떨어져 하얀 별처럼 흩어져 있었다. 나무줄기와 가지마다 다닥다닥 성실하게 꽃을 달고 있는 모습이 무거워 보일정도다. 땅 위에도 꽃 그림을 그려 놓은 때죽나무는 셀 수 없을 정도로 이어졌다. 인적 드문 숲길에 달달한 향을 풍기며 풍성하게 핀 흰 때죽나무 꽃송이는 이제야 왔냐고 하얀 버선발로 뛰어 내려오던 외할머니 같았다.


수국축제를 찾아서 왔는데 5월 중순 제주에서는 때죽나무들이 꽃 축제를 하고 있었다. 절정의 시간을 눈앞에서 보고 있다는 기쁨에 카메라 셔터를 누르고 또 눌렀다. 밀도 높게 핀 꽃들의 무게로 늘어진 가지가 한 둘이 아니다. 높은 가지에 줄지어 달려있는 꽃 얼굴이 땅을 향해 있어 올려다보는 나와 시선을 마주했다. 냄새를 잘 맡아 개코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는 나에게 처음 맡는 이 묘한 향은 더 이상 걷지 못하게 발을 잡았다.


꽃에 시선을 두고 우왕좌왕하다 나무 사이 작은 공간에서 꿀을 파는 할머니를 보았다. 때죽나무 꿀을 팔고 계셨다. 때죽나무 꿀도 있다니. 할머니께 때죽나무 꽃을 이렇게 많이 보는 것은 처음이라고 인사를 했다. 지금이 제일 좋을 때라고 하며 이번 주 지나면 재미없다고 웃으셨다. 제때에 잘 찾아왔다며 꿀을 떠 맛보라 주는데 얼마나 위로가 되던지. 수국 때를 놓친 나는 선물처럼 때죽나무 때를 만났다.


한라산은 때죽나무 자생군락지가 있어 꽃꿀을 채집할 수 있다고 한다. 때죽꽃꿀은 상큼한 레몬향이 짙게 났다. 새로운 향을 맡고 새로운 꿀맛도 보니 지역 축제장에서 먹은 막걸리들이 생각났다. 구절초 막걸리, 잣막걸리, 메밀막걸리처럼 입안을 자극했다. 입안에 남은 단맛을 음미하였다. 검은 봉지에 때죽꽃꿀 두 통을 담아 들고 이어지는 꽃길을 걸었다. 맛으로 향으로 느끼는 전경은 여행을 달콤한 기억으로 남겼다.


사려니 숲길의 때죽나무꽃 군락은 선물이었다. 생동감 있는 사진으로 그 해 여름 수국이 아닌 때죽나무 꽃 그림을 완성하였다. 다른 관광지에 밀려 늦은 만남이었지만 사려니 숲은 특별한 시간과 장소였다. 계획한 일이 제대로 되지 않을 때 5월의 사려니 숲을 생각한다. 내가 기대한 것이 잘못된 걸 빠르게 인정하고, 또 다른 길이 있지 않을까 살핀다. 내가 아는 것이 전부가 아니기 때문이다. 5월의 제주 여행은,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도 절망하거나 상기되지 않고, 새로운 길을 발견하게 해 준 색다른 경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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