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 다른 맛을 가진 두 명의 67년생 이야기
2년 전 허은순 작가의 바카라을 읽었다.
67년생, 나와 동갑내기인 그녀는 자신의 일상을 릴스 콘텐츠로 만들고, 영향력을 키워 그것을 수익으로 연결하는 인플루언서였다.
사실 바카라으로 만나기 전부터 <더뉴그레이>라는 플랫폼을 통해 그녀를 알고 있었다.
더뉴그레이 1기 출신인 그녀는 시니어도 얼마든지 새로운 도전으로 멋진 제 2의 삶을 살 수 있단 걸 보여준 인플루언서 스타였다.
바카라을 읽는 내내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
'동갑내기 그녀도 해냈는데 나라고 못할쏘냐.'
나도 그녀처럼 되고 싶었다.
내가 만든 컬러링북 <딸이 찾아주는 엄마의 그림바카라>이 많은 사람에게 알려지길 원했고,
나의 이야기를 담은 <경력이 없지 경험이 없나>가 베스트셀러가 되기를 바랐다.
그녀처럼 그동안 쌓아온 경험과 지식이 영향력이 되고, 그것이 경제적인 성과로도 이어지기를 기대했다.
그런 마음이 한없이 커질 무렵 나도 <더뉴그레이>의 수강생이 되었다.
수업에서 여러 차례 접한 그녀의 성공 사례는 내게 하나의 가능성처럼 보였다.
나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니, 나도 해내고 싶었다.
그렇게 일 년 가까이 부단히 노력했다.
쑥스러움을 무릅쓰고 내 모습을 드러내는 피드를 꾸준히 인스타 그램에 올렸다.
잘 나가는 사람들을 눈여겨보며 그들의 방식을 따라 해 보려고도 애썼다.
그러나 점점 콘텐츠 만들기는 새로운 도전의 즐거움이 아닌 버거운 과제가 되었다.
시간이 흐르면 익숙해질 줄 알았는데, 오히려 점점 더 불편해졌다.
열심히 할수록 들인 노력에 비해 성과가 나지 않는 현실에 마음고생도 심해졌다.
분명 내가 원해서 시작한 일이었는데, 어째서 점점 더 힘들어지는 걸까?
무언가 새로운 걸 경험하면서 그것을 어떻게 보여줄 것인지 먼저 생각했고,
글을 쓰면서도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읽을지를 의식했다.
어느새 나는 끝없는 숙제에 치여 허덕이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렇다고 쉽게 포기할 수도 없었다.
그동안 들인 시간과 노력이 아까웠다.
무엇보다 성공한 사람의 길을 따라가다 보면 언젠가는 나도 그곳에 도착할 수 있으리란 희망고문에서 벗어나기 힘들었다.
그러던 중 엄마가 돌아가셨다.
멘탈이 무너지면서 사람들과의 관계가 버거워졌고, 혼자 지내는 시간이 많아졌다.
그런데 오히려 혼자만의 시간을 편안하게 느끼는 나를 발견했다.
그렇게 그동안 잊고 지냈던 나를 조금씩 찾아가기 시작했다.
새로 나오는 신간을 읽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 편안한 마음으로 예전에 읽었던 바카라들을 다시 펼쳤다.
그중 하나가 허은순 작가의 <신인류의 탄생>이었다.
바카라을 읽으며 2년 전의 독서 기록도 다시 들여다보았다.
그 기록을 다시 읽자, 안개에 가려져 있던 지금의 내 모습이 조금씩 또렷해지는 듯했다.
이제야 알 것 같았다.
내가 그토록 애쓰면서도 왜 행복하지 않았는지.
그녀와 나는 애초에 결이 다른 사람이었다.
외향적인 성격에 사람들을 리드하는 데 익숙한 그녀와 달리 나는 내향적인 성격에 따라가는 게 편한 사람.
허은순 작가를 술에 비유한다면 위스키가 떠오른다.
강렬하고 화끈하다.
자신의 존재감을 분명하게 드러내는 넘치는 에너지가 있다.
반면 나는 와인에 가깝다.
천천히 음미하고, 시간이 만들어내는 깊이를 좋아한다.
단숨에 사람을 사로잡기보다 오래도록 남는 여운에 마음이 간다.
어느 술이 더 좋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위스키와 와인은 모두 발효의 과정을 거치고, 시간이 더해지면서 저마다의 풍미를 만들어낸다.
같은 시간을 품고 있어도 맛은 전혀 다르다.
그런데 나는 한동안 내게 어울리지 않는 맛을 내려고 애썼던 것이다.
요즘은 남을 보는 대신, 나란 사람을 들여다보는 시간이 많아졌다.
무엇보다 내가 궁금하다.
많은 사람 앞에 나서기보다 혼자 바카라을 읽고, 영화를 보고, 생각하는 시간을 좋아하는 나.
남들이 무심코 지나친 장면에서 무언가를 발견하고, 오래전 경험을 지금의 시선으로 다시 해석하는 일이 즐겁다.
내 생각을 나만의 언어로 정리하는 시간이 좋아졌다.
그동안의 낯선 경험들이 나를 성장시킨 건 분명하다.
그렇지만 누군가의 성공 방식을 따라 하느라 정작 나다운 시간을 놓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하다.
요즘 나는 나를 '경험 소믈리에'라고 부른다.
경험의 맛을 발견하고, 오래 음미하고, 나만의 언어로 해석해 누군가에게 권하는 사람.
그것이 지금 내가 하고 싶은 일이다.
예전에 보았던 영화를 다시 보고 전혀 다른 질문을 발견한다.
몇 년 전 읽었던 바카라을 다시 펼쳐 그때는 보이지 않던 문장을 만난다.
서로 상관없어 보였던 경험들을 연결하면서 새로운 의미를 찾아낸다.
이 과정이 무척 즐겁다.
누군가의 시선을 끌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궁금해서 들여다본다.
나를 드러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냥 좋아서 글을 쓴다.
물론 내 글이 많은 사람에게 읽히면 좋겠다.
내가 하는 일이 경제적인 성과로 이어진다면 더없이 반가울 것이다.
다만 이제는 그 결과를 얻기 위해 나를 채근하고 싶지는 않다.
설사 결과를 내지 못하더라도 과정에서 느끼는 즐거움만으로 만족할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내가 좋아하는 방식으로 오래 지속할 수 있다면, 경험 소믈리에라는 이름으로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만족스러울 것이다.
2년 만에 다시 바카라 속에서 만난 그녀 허은순작가.
한때 그토록 부러워했던 그녀가 이제는 전혀 부럽지 않다.
그녀의 성공이 작아 보여서도 아니고, 내가 그만큼 성공했기 때문도 아니다.
그저 내가 원하는 삶이 무엇인지 조금은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나에게 맞는 삶을 발견하면 부러움은 저절로 자리를 내주고 제 갈길을 간다.
그녀는 그녀의 길을 가고, 나는 나의 길을 간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다시 예전의 바카라을 읽으면서 나 자신을 확인한다.
이게 바로 2026년 가을의 내 모습이다.
그때는 그녀가 되고 싶었지만, 이제는 내가 되는 일이 좋다.
@신인류의 탄생_허은순
@어제의 기록, 오늘의 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