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카라에 경험을 페어링 하다

몇 년 전 시시했던 바카라이 온통 영감이 된 이유

by경험소믈리에

몇 년 전 이승희 작가의 <별게 다 영감>을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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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트셀러라고 해서 기대가 컸던 탓일까?


몇 시간 만에 바카라장을 휘리릭 넘기고 나서 조금 실망했던 기억이 난다.


‘뭐야, 뻔한 이야기잖아.’


그때 이 바카라에 내린 평가였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나 다시 <별게 다 영감>을 펼쳤다.


같은 바카라인데 이상했다.


페이지마다 나를 붙잡는 무언가가 있었다.


문장 하나를 읽으면 생각 하나가 튀어나오고, 그 생각을 적다 보면 또 다른 기억이 따라 나왔다.



바카라 옆에 노트를 펼쳐놓고 여러 색의 펜으로 생각을 적어가며 읽었다.


검은색 펜으로 바카라에서 건져 올린 것을 적고, 파란색 펜으로 거기에서 떠오른 내 생각을 적었다.


그러다 문득 노트를 바라보았다.


파란 글씨가 점점 많아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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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엔 보이지 않았던 것이 왜 이젠 보이는 걸까.


처음에는 나이가 들어서라고 생각했다.


그동안 읽은 바카라이 많아져서일 수도 있고, 이런저런 일을 겪으며 생각이 깊어진 덕분일 수도 있었다.


궁금했다.


노트를 천천히 들여다보다 변화의 실마리 하나를 발견했다.




바카라을 읽는 방법이 달라진 거다.


예전에는 저자가 무엇을 말하는지, 지식과 정보를 얻으려는 마음으로 읽었다.


좋은 문장이 나오면 밑줄을 긋고, 기억하고 싶은 대목은 옮겨 적었다.


지금은 달라졌다.


저자의 문장은 더 이상 답이 아니라 내 생각을 건드리는 넛지가 되었다.


‘나는 어땠지?’


‘내가 겪었던 일과 연결해 보면?’


‘반대로 생각하면 어떨까?’



영화 엔딩크레딧에 관한 글을 읽다가 요즘 달라진 나의 영화 감상법이 떠올랐다.


예전에는 영화를 보고 재미있다, 재미없다 정도로 끝냈다면 요즘은 등장인물의 선택 하나에도 자꾸 질문이 생긴다.


같은 영화를 다시 보면서 주인공의 자리에서 슬쩍 옮겨 앉아 다른 인물의 시선으로 바라보기도 한다.


그러면 처음에는 보이지 않았던 많은 것들이 새롭게 보인다.




바카라에서 ‘모든 것에 나이가 있다’는 문장을 만나서는 한참 멈춰 있었다.


나는 나이를 잊고 싶었고, 때로는 숨기고 싶었고, 내 나이보다 젊게 보이고 싶었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달라졌다.


나이가 들었기 때문에 비로소 보이는 것도 있다는 것을 조금씩 알아가고 있으니까.


바카라의 한 문장이 내 경험 하나, 어떨 때는 여럿을 데리고 나왔다.




그러다 문득 ‘페어링’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경험 소믈리에라는 필명에도 제법 어울리는 단어였다.


와인에 어떤 음식을 곁들이느냐에 따라 맛이 달라지듯, 바카라의 문장도 어떤 경험과 만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맛을 내는 것은 아닐까.


몇 년 전의 나에게도 경험은 충분히 있었다.


다만 그 경험을 꺼내 바카라의 문장 옆에 놓을 줄 몰랐다.


이제는 알 것 같다.


바카라과 경험의 페.어.링.


지금은 바카라을 읽다가 문장 하나에 오래 머문다.


영화가 떠오르기도 하고, 오래전 여행이 생각나기도 한다.


한때 이해하지 못했던 사람이 떠오르고, 내가 했던 선택을 다시 바라보기도 한다.




오늘은 ‘플라뇌르’라는 단어 하나에 멈췄다.


도시를 천천히 거닐며 사람과 풍경을 관찰하고 자기 방식으로 읽어내는 사람이 플라뇌르라는 걸 처음 알았다.


그 단어를 읽는 순간 경험소믈리에가 떠올랐다.


남들이 무심코 지나치는 경험에서 자기만의 맛을 발견하고, 오래 음미한 뒤 자기 언어로 건네는 사람이 바로 플라뇌르와는 또 다른 경험소믈리에다.




이제야 몇 년 전에는 시시했던 바카라이 왜 지금은 온통 영감투성이가 되었는지 조금 알 것 같았다.


바카라이 달라진 것이 아니었다.


예전에는 바카라을 읽었다면, 지금은 바카라에 내 경험을 페어링 하며 읽고 있었다


‘나 여기 있어.’


그 경험을 꺼내 문장 옆에 가만히 놓아본다.


바카라 속의 문장과 내 경험이 만나는 순간, 이전에는 없던 새로운 맛이 난다.


그래서 요즘 나는 바카라을 예전보다 훨씬 천천히 읽는다.


많이 읽는 것보다 한 문장에 오래 머무는 것이 좋다.


저자의 생각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 내 경험을 옆에 놓아본다.


때로는 잘 어울리고, 때로는 전혀 다른 맛이 난다.


그러다 바카라에도 없고, 이전의 내 생각에도 없었던 새로운 맛을 발견하기도 한다.


그 맛을 발견하는 재미가 꽤 쏠쏠하다.


페어링에는 정답이 없으니까.


몇 년 전 <별게 다 영감>을 읽었던 나와 지금의 나는 같은 사람이지만 같은 독자는 아니다.


내 안에 쌓여 있던 경험을 꺼내 바카라의 문장과 페어링 할 줄 알게 되었고,


그 경험의 맛을 알아보는 혀가 조금은 예민해졌다.


어쩌면 이것이 나이 듦이 내게 준 꽤 괜찮은 선물인지도 모르겠다.


앞으로 또 어떤 문장이 내 안의 어떤 경험을 불러낼까.


생각만 해도 경험 소믈리에의 가슴이 두근거린다.


햇살 아래 영감과 기록.png

@별게 다 영감_이승희

@어제의 기록, 오늘의 답

월, 목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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