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실이 추억으로 바뀌는 시간
엄마가 돌아가시고 나서 한동안 목욕탕에 가지 못했다.
목욕탕은 엄마와의 마지막 추억이 남아 있는 장소였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빨간 목욕탕>이란 바카라을 알게 되었다.
처음에는 스릴러 소설인 줄 알았다.
피가 흥건한 목욕탕에서 벌어지는 살인 사건...
그런데 바카라 표지는 전혀 다른 느낌을 전하고 있었다.
무언가에 끌려 바카라을 구입하기까진 했는데 선뜻 눈이 가지 않았다.
목욕탕은 내게 만지면 아프고 쳐다보면 눈물이 나는 그런 거였기에...
그러다 북토크 소식을 듣게 되었다.
바카라을 읽고 북토크에 참석하는 게 나의 철칙이거늘 이번에는 바카라을 전혀 읽지 않고 무작정 갔다.
무언가 선입견을 갖고 싶지 않았고 작가님 날것 그대로를 느껴보고 싶었다.
당신의 목욕탕 이야기로 나의 목욕탕을 느껴보고 싶었는지도..
엄마가 돌아가시기 전과 돌아가신 후 내게 목욕탕은 전혀 다른 의미가 되었다.
엄마는 89세 생신을 맞아 가족들과 온천 여행을 다녀오시던 길에 뇌동맥 출혈로 두 시간 만에 돌아가셨다.
너무 갑작스러운 일이었기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어제 웃음소리가 가득했던 목욕탕은 오늘은 가장 마음 아픈 장소가 되어버렸다.
그러던 중 빨간 목욕탕이란 걸 접하게 된 것이다.
여전히 엄마가 돌아가신 지 네 계절이 지났건만 아직까지 목욕탕은 편치 않았다.
그러면서도 조금씩 다가가는 마음, 그건 왜인지...
사람 냄새 가득한 빨간 목욕탕에서 만나는 시골 할머니들의 반전 이야기라고 했다.
무엇보다 시골 할머니들의 이야기라는 데 마음이 끌렸다.
북토크를 다녀와서 읽기 시작했는데 평소 같으면 한 번에 다 읽어 내려가는 에세이건만 이 바카라은 그럴 수가 없었다.
조금 읽고 엄마와 나의 목욕탕 이야기 속으로 빠져 들었다가 마음속 물기가 잦아들면, 다시 다음을 읽어 내려가는 식이었다.
그렇게 오랜 시간에 걸쳐 바카라을 다 읽었다.
바카라을 다 읽고 나서 필이 작가에 대해 내적인 친밀감이 생겼다.
같은 50대로서 느끼는 동질감에 나보다 앞서가는 꿈쟁이의 면모가 마음에 들었다.
"전국 팔도 서도밴드 공연 보러 다니는 '아라리(서도밴드 팬명) 여행'을 할 수 있으면, 그것이면 된다'
필이 작가는 이런 꿈을 이루기 위해 재활 치료차 빨간 목욕탕을 다니기 시작했다고 한다.
북토크에서 필이 작가의 서도밴드 아라리 여행 꿈을 들으면서 내게 물었었다.
"너는 어떤 꿈이 있니?"
그때만 해도 방황하던 시기라 뭐라 딱히 말할 꿈이 없었다.
분명한 꿈을 갖고 있는 필이작가가 부러웠다.
그런데 1년이 지난 지금 내게도 삶을 희망차게 만드는 꿈이 생겼다.
60이 되는 내년부터 전개될 <세계 공항에서 만나 시작하는 세 친구의 여행>.
10년 동안 매년 세계 여행을 다니기 위해선 무엇보다 건강해야 한다.
필이작가의 목욕탕 다니기처럼 나 역시 이런 꿈이 생긴 것이다.
두둥~~~
바카라 속에서 빨간 목욕탕 할머니들이 말씀하신 인생 교훈이 떠오른다.
"안달 낸다고 재촉한다고 안 될 일이 빨리 되지 않는다니까"
맞다.
내가 아무리 꿈을 내놓으라고 안달을 해도 안 나타나던 꿈이 시간이 흐르니 모습을 드러낸 것처럼...
1년이 흘러 다시 여름이 되었다.
빨간 목욕탕을 다시 읽어 보았다.
이번에는 쉬지 않고 계속 읽어도 될 만큼 마음이 이전보다 물기가 꽤 말랐다.
엄마와 마지막으로 온천 목욕하던 그 시간으로 돌아가 본다.
엄마는 온천 여행 가던 날 갑자기 한쪽 눈이 감겨 딸에게 모든 걸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여행 다녀온 뒤 병원에 가보기로 하고 일단 온천을 즐기기로 했다.
자연스럽게 엄마를 머리 감겨주고 씻겨 주었다.
엄마가 애기였던 나를 씻겨 주었던 것처럼 나는 엄마를 애기처럼 깨끗하게 씻겨 드렸다.
돌아가시고 나서 이때를 회상해 보니 하늘나라에 가기 전 딸의 손으로 깨끗하게 한 뒤 가고 싶으셨던 게 아닐까? 싶다.
돌아가시던 순간 엄마의 모습은 더할 나위 없이 맑고 깨끗했다.
작가는 목욕탕에 간다는 건 수영장에 놀러 가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
목욕탕 가는 알은 집안 잔치요, 소풍이며 나들이라고도 했다.
온 가족이 함께 하는 신나는 놀이라고 했던 것처럼 우리는 목욕을 신나는 놀이처럼 즐기고 이별을 맞이했다.
그 순간 그것이 이별의 전주곡이란 건 생각도 못했지만 지나고 보니 이미 예정된 스토리가 아니었을까 싶다.
엄마의 마지막 퇴장을 평소 깔끔했던 성격처럼 해 주고 싶은 누군가의 배려...
빨간 목욕탕은 내 모든 걸 받아준다.
빨간 목욕탕은 엄마가 내게 보내준 선물이다.
이곳에서 엄마를 만난다.
작가님의 말이 꼭 내 목소리처럼 들린다.
엄마는 2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빨간 목욕탕에서 나의 슬픔을 씻겨준 셈이다.
이젠 목욕탕이 더 이상 슬픔의 장소가 아니다.
엄마는 내게 새로운 목욕탕을 선물해 주었다.
이젠 더위가 조금 가시고 나면 목욕탕에 가서 즐거움을 회복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빨간 목욕탕_필이작가
@어제의 기록, 오늘의 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