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

byAnima

막내가 방문을 여는 소리에 눈을 떴다.

시계는 4시 44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오후 4시 44분!

4가 셋이 겹친다. 무슨 일이냐, 불길하게!


요즘 뒷다리가 당기기도 하고 날도 더워서 매일 나가던 길을 이틀 간격으로 줄였다.

매일 공지를 하던 아니마가 안 보이니 길벗들은 무슨 일이 났나 궁금하기도 하겠지만 며칠 있으면 적응할 것이다.

매일 걷는 아니마가 아니라 이틀에 한 번 공지하는 아니마로 정착을 할 것이다.


매일 나가서 ‘9988 손목 닥터’로 100원을 벌었는데 쉰다고 안 벌 수 없어 밖으로 나갔다.

9시 50분 마을버스를 타기 위해 현관을 나서면 항상 몇 걸음 안 가서 마주치는 네 명의 여자들이 있다.

오늘도 두 명이 가면 알맞은 길을 네 명이 일렬횡대로 나란히 서서 걸어온다.

두 명씩 걸어오면 서로 편할 텐데 한쪽으로 비켜가는 것은 마주 오는 내가 할 일이다.


돌아서 반대방향으로 난 산길로 접어들려다가 단지 바깥쪽으로 돌기로 했다.

아파트 뒷산이지만 혼자 가기가 꺼려진다.

인적 없는 평일 오전이기도 하고 데리고 다닐 강아지도 없고 가끔 들개가 출몰한다고도 하니 단지 안에서 100원 버는 8,000보 정도만 걷고 들어가려고 한다.

꽤 넓은 단지인데 두 바퀴 돌아도 5천 보도 안 된다.

남들처럼 핸드폰 들고 흔들기도 싫어 한 바퀴 더 돌고 인근 슈퍼마켓도 돌며 8,000보를 채웠다.

매일 나가서 10,000보 이상씩을 걷는 것이 아무것도 아니었는데 일부러 채우려니 힘들다.

걷고 들어와서 오랜만에 집밥을 먹었다.

배춧국을 먹기 위해서다.

일주일에 전에 알배추를 사놓고 먹지 않아 상하기 일보 직전에 배춧국을 끓였다.

된장, 마늘, 파, 국간장만 넣고 푹 끓여 건더기만 먹었다.

아침 겸 점심 먹은 시간을 보니 11시 30분이다.

평소에 길벗들과 모이는 시간이다.

점심을 먹고 설거지를 끝내고 방으로 와서 늘 제 자리에 있는 시집을 집어 들었다.

초현실주의 시를 쓴다는 제임스 테이트의 산문시집 ‘흰 당나귀들의 도시로 돌아가다’.

엉뚱한 상상력으로 재미와 웃음을 자아내는 독특한 시들이다.

손으로 쫘악 펼치니 ‘침입자’라는 시가 나왔다.

‘자정 무렵이었는데 나는 무언가 마당에 있다는 것을 직감하였다.’로 시작한 한 페이지 분량이 ‘그 총 내놔’라는 말로 끝나는 시다.


번역자 최정례 씨가 눈에 익는다.

여담이지만, 전 동료교사 남편의 사촌누나다.

조카를 내게 소개하려다 미수에 그치고 그 동료를 소개해서 결혼에 이르게 했다.

창작활동을 활발히 하다가 몇 년 전에 지병으로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매일 이런 식의 독서가 시작된다.

독서라 할 것도 없는 두세 장을 읽는 정도다.

산문시 세 편만 읽었는데 잠이 쏟아져서 자다 일어난 것이 4시 44분이었다.

낮에 집에 있는 시간이 거의 없어 드문 일이다.

어제 잠자리에 든 시간이 새벽 1시 35분이었다.

걷기를 쉰다고 여유 부렸다.

오후에 먹은 다크초콜릿의 카페인 때문이기도 하다.


여기까지 쓰고 시계를 보았다.

밤 10시 04분, 10:04 천사의 시간이다.

이 무슨 어감 좋은 시간이냐!


4시 44분에도, 10시 04분에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온라인카지노에 올릴 글을 썼을 뿐이다.

하루가 평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