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백의 거리

byAnima

여자에게는 의리가 없다고 한다.

의리는 남자의 전유물인가?

따지고 싶지는 않다.

그냥 남녀불문 의리 없는 사람은 싫다.


지난가을 의리가 없다고 생각해서 내 길에 나오지 말라고 문자로 통고한 사람이 있다.

같이 걷기로 하다가 내가 운영진과 마찰을 빚자 이런 상황에서 같이 걸을 수 없다고 한 사람이다.

위로는 바라지도 않지만 계속 장난으로 받아들이고, 길잡이로서 찔퉁부리지 말라는 말에 화가 나서 '공백님, 오물 튈까 봐 그러시나 본데 얘기할수록 화를 돋우시네요. 다시는 보고 싶지 않으니 그만 봅시다'라고 했던 사람이다.

그랬던 사람이 2주일 전부터 나오기 시작했다.

안 본 지 8개월이 된 시점이라 참가하겠다는 댓글에 살짝 동요했다.

이런저런 일로 안 나오는 몇 사람이 있는데 이렇게 오랜 침묵을 깨고 나온 것은 처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온다는 것을 어쩌겠나?


서로 지난 얘기는 할 필요 없어 언제 그랬냐는 듯 인사하고 같이 걸으니 달라진 것은 하나 없다.

좌측통행하며 앞서 가는 것, 말할 때마다 '아니'를 붙이는 건 여전하다.


그동안 얼마나 오고 싶었을까, 오랜만에 대양을 만난 물고기처럼 팔딱거린다.

손을 들어 흰구름을 움켜쥐려 하고 푸른 나무를 받드는 시늉을 한다.


오늘은 그늘이 많은 송정벚꽃길을 걷기 전에 자주 가는 뷔페식당을 갔다.

저마다 접시에 음식을 가져와서 먹는데 공백은 두 그릇째 풀때기만 먹고 있다.

아침을 많이 먹어 배가 불러서 그렇단다.

그러다 세 번째 접시에 고등어구이 두 조각과 몇 가지 더 가져오더니 고등어를 남겼다.


남기시게요?


아니, 도저히 못 먹겠어요.


먹을 만큼 가져오시지, 여기 사장님 무서워요.

남기나 안 남기나 눈에 불을 켜고 보고 있어요.


아니, 아까는 먹을 것 같아서......


하나도 아니고 두 개씩이나, 어떻게 하지.


아니, 싸가지고 가야겠어요.

비닐 하나 달랠까 봐요.


가서 버리려고요?.


아니, 안 버려요. 냄새나니까 비닐에 꽁꽁 묶어가야지.

그럼 이거로 해요.


물병 싸 온 비닐을 주니 냅킨에 여러 겹 싸고 자기가 가져온 비닐이 있어 두 겹을 쌌다.

그리고 말없이 넣고 가면 되는데 나올 때 한창 조리에 바쁜 사장에게 비닐봉지 없냐고 묻는다.

눈치 빠른 사장이 왜 그러냐고 묻자 이제 상황 파악에 나선 공백이 아무것도 아니라 하고 사장은 짐작 가는 바가 있어 꼬치꼬치 캐묻는다

이제 빼도 박도 못해 '사실은 남았는데 온전한 것을 버릴 수도 없어 가져가려고 한다' 했더니 사장이 정색을 한다.


그러면 안 돼요, 싸가면 안 돼요.

벌금이 몇 배예요!


아니, 그러면 버려요?

아까워서 가져가려 했는데.

그럼 버려야겠네요.


하고 잔반통에 버리니 사장이 노려보고 꼴아보고 난리도 아니다.

일부러 가져가서 먹으려는 도둑심보로 보는 것이 분명하다.

내 이럴 줄 알았어, 비닐 두 개로 쌌으면 됐지 주인에게 또 비닐을 왜 달래?

그러면 '아유, 그러셨어요? 음식을 함부로 버리지 않는 알뜰한 분이시군요, 정말 양심적인 분이시군요'하고 칭찬이라도 할 줄 알았나?

정말 눈치코치도 없는 사람이다.

같이 다니는 길잡이로서 창피해서 대신 죄송하다고 하니, 내가 왜 그래야 하나......


걷다가 쉼터에서 한 길벗이 비혼주의자 아들을 걱정하는데 대꾸하고 잘 듣는 것 같더니 공백이 갑자기 저쪽을 가리킨다.


저기 장미꽃 크기 좀 봐요.

한 사발은 되겠네!


좀 전에도 대화하다가 갑자기 다른 데로 시선을 돌려 맥을 끊어놓더니 또 그런다.

다른 사람 같았으면 말해 무엇해, 그냥 넘어갔을 일을 직설적으로 하고 말았다.


공백님, 대화법에 문제 있어요.

아까도 그러더니 또 그러시네요.

대화하다가 갑자기 다른 데로 시선을 끄니 따라가기 힘들어요.


이제 이틀에 한 번 꼴로 나오는데 참가댓글을 볼 때마다 신경이 쓰인다.

그 이름이 보일 때마다 반갑지 않다, 편하지 않다.

한 번 어긋난 사람과의 거리는 좁혀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