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지 설명하기 어렵다
요즘 무슨 일 하세요?
생각보다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다.
요즘은 그냥 AI 강사로 소개한다. 제일 설명하기 편한 직함이라서. 그런데 상대가 한 번만 더 물어보면 얘기가 길어진다. 강의도 하고, AI로 작품도 만들고, 콘텐츠도 만들고, 사업도 준비하고 있다고.
말하면서도 속으로 생각한다. 이게 다 무슨 일이람.
15년 동안 디자이너로 일할 땐 이런 고민이 없었을까. 그렇지도 않았다. 그때도 나는 '디자이너'라는 이름 하나로 정리되는 게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내가 좋아했던 건 디자인이라는 직업 자체보다, 뭔가를 창작하는 그 자체였다. 머릿속 아이디어를 눈에 보이게 꺼내는 게 좋았고, 그중에서도 브랜딩에 마음이 갔다. 그래서 브랜드 디자이너가 된 거다.
누가 무슨 일 하냐고 물으면 브랜드 디자이너보다는 "브랜딩하는 사람이요"라고 말하곤 했었다.
AI를 처음 만났을 땐 그냥 신기했다. 내가 상상한 걸 이미지로 뽑아준다니. 디자이너로서 그냥 지나칠 수가 없는 물건이었다.
그렇게 파고들다 보니 강의도 하고, 해외에서 전시도 하고, 생각지도 못한 데서 일이 들어왔다. 어느 날 부터는 "작가님"이라고 불렸다. 평생 디자이너로 살아온 사람한테는 꽤 낯선 호칭이었다.
그런데 AI를 가르치는 일이 늘수록 고민이 하나 생겼다. 오늘 열심히 가르친 기능이 몇 달 뒤면 쓸모없어질 수도 있다는 것. 새 모델이 나올 때마다 강의 자료를 고칠 이유는 끝도 없이 생겼다.
물론 새 기술을 익히고 알려주는 일도 중요하다. 다만 그걸 계속 쫓아가는 것만으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오래 할 수 있을까. 그건 잘 모르겠더라.
그래서 다시 생각했다. 기술이 이렇게 빨리 바뀌는 시대에, 나는 뭘 붙잡아야 하는 걸까.
답은 아주 오래전에 내가 좋아하던 것에 있었다.
창의적 발상.
석사과정 때 나는 아이디어 발상에 덕질 수준으로 집착했다. 아이디어를 내는게 너무 재미있어서 국내외 공모전에 닥치는 대로 냈다. 한 학기에 15개 넘는 국내 및 해외 공모전에서 상을 받고, 상금 총합도 2천만 원 가까이 되기도 했다.
지금도 집에는 창의성 관련 바카라이 100권 넘게 꽂혀 있다. 절판된 바카라까지 기어이 찾아서 사 모았다. 누가 취미를 물으면 "아이디어 구상이요"라고 대답할 수 있을 정도랄까. 지금도 매일 새로운 사업 아이템, 앱 아이디어 등을 구상하느라 AI 토큰이 남아나질 않고 있다.
SNS를 둘러보다 요즘 AI 쓰는 사람들의 고민이 눈에 들어왔다.
남들은 다 AI로 돈 벌고 있다는데, 나는 뭐부터 해야할지를 모르겠다는 사람,
AI로 앱을 만들 수 있다는데, 막상 무슨 앱을 만들지 모르겠다는 사람.
아이디어를 물어보면 AI가 뻔한 답만 늘어놔서 답답하다는 사람.
기술은 배웠는데 남들과 다른 걸 만들기가 어렵다는 사람.
나는 그런 얘기에 자꾸 눈이 갔다. 어쩌면 내가 오래 좋아하고, 나름 잘해 온 일이 이 사람들한테 쓸모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싶었다.
그래서 요즘은 AI로 사람의 창의적 발상을 넓히는 방법을 연구한다. 뻔한 답을 벗어나는 질문법, 아이디어를 다른 각도에서 보는 법, AI 이미지 특유의 어색한 미감을 덜어내는 법 같은 것들.
이건 완전히 새로운 일은 아니다. 디자인할 때 붙잡고 있던 고민을, 이제 AI라는 도구로 다시 실험하고 있는 것이다.
최근에 한 분야에서 오래 일해 온 전문가와 대화할 기회가 있었다. 조심스럽게 내가 앞으로 해보고 싶은 연구랑 가치관 이야기를 꺼냈다.
AI 기능을 알려주는 사람보다는, 창의적으로 쓰는 법을 연구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근데 이런 얘기에 관심 가질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고.
그는 굉장히 흥미롭다며, 그런 바카라이 나오면 자기도 사서 읽고 싶다고 했다. 그 말에 꽤 힘이 났다.
그러고는 스레드를 해보라고 권했다. 짧은 글로 생각을 꺼내놓고 사람들 반응을 바로 볼 수 있는 곳이라면서.
사실 그게 내가 제일 못하는 일이었다. 자료 모으고, 고민하고, 연구하는 건 잘한다. 그런데 그걸 마무리해서 남한테 보여주는 게 어렵다. 조금만 더 다듬고 싶고, 조금만 더 알아보고 싶고. 그러다 결국 내 컴퓨터 폴더 안에서만 잠든 것들이 수두룩하다.
사업을 하려면 오히려 내가 가장 하기 싫고 불편한 일을 해야 한다고 어느 성공한 사업가가 그러더라. 그래서 스레드를 시작했다.
그런데 생각보다 반응이 빨리 왔다. 계정을 운영한 지 4일 만에 누적 조회수 5만 회를 넘겼다. 그러더니 글 하나가 제대로 터지면서 10만 회까지 조회수가 올라갔다. 그동안 혼자 모아두고 고민하던 것들을 하나씩 꺼내놓았을 뿐인데,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보인다는 것에 용기가 났고 신이 났다.
물론 조회수가 높다고 곧바로 내 사업이 성공하는 건 아니다. 그래도 적어도 내가 연구하고 있는 주제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 있다는 건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가장 인상 깊은 건 소통이었다. 내가 당연하게 생각했던 부분에 사람들이 질문을 하고, 내가 몰랐던 것에 대해 질문하면 자기 경험을 들려줬다. 그리고 공들여 쓴 글보다 가볍게 던진 이야기에 더 큰 반응이 오기도 했다.
혼자 연구할 때는 알 수 없었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시작하지 않았다면 몰랐을 일이다. 그런 반응을 보다 보니 내가 더 공부해야 할 것과 사람들이 궁금해하는 게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생각해보면 내가 이렇게 두번째 명함을 갖게 된 것은 내 것을 밖에 꺼내놨을 때부터 생긴 일이다. 온라인카지노에 남긴 글이 강의 제안으로 이어졌고, 인스타그램에 올린 작품을 보고 해외에서 연락이 오기도 했듯이.
밖에 꺼내놔야 누군가 발견해 준다는 걸 이미 몇 번이나 겪어 놓고도, 나는 여전히 그게 어려웠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완벽해질 때까지 쌓아두지 않고, 일단 꺼내놓으려고 한다. 쓰지 않던 근육을 열심히 써보려고 한다. 처음엔 당연히 근육통이 오겠지 아프고 어색하고. 그래도 다 꺼내보려 한다. 연구한 것도, 실험하다 망한 것도, 아직 정리 안 된 생각도 전부.
그리고 그 과정에서 다른 사람들 이야기도 들어보려고 한다.
얼마 전 그 전문가가 물었다.
"그럼 지금 사업을 하고 계신 거예요?"
“음, 그런 셈이죠?”
대답해 놓고 나도 웃었다.
처음부터 사업을 하겠다고 계획한 건 아니었다고. 이것저것 해보다 보니 어느새 사업을 고민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을 뿐이라고.
그랬더니 그가 말했다.
"원래 사업은 그렇게 시작하는 거예요."
나는 아직 내 사업으로 안정적인 수익을 만들지도 못했고, 앞으로 뭐가 잘될지도 모른다. 해보고 싶은 건 잔뜩인데 하루는 여전히 24시간이다.
15년 동안 해온 디자인도, 브랜딩도, 남들보다 조금 집요하게 파고들었던 창의적 발상도. 버릴 게 하나도 없었다. 지금 하고 있는 일에 덧붙여서, 나만의 해자로 만들어 쓰면 된다.
그래서, AI는 내 직업을 없앴을까?
하나는 가져갔을 수 있다. '디자이너' 라는 직업명 하나.
대신 강사, 작가, 연구자, 그리고 어쩌다 대표님(?)까지. 생각지도 못한 이름을 한 아름 갖다줬다. 물론 내 일은 또 바뀔 거다. 일 년 뒤엔 지금과 다른 직함을 달고 있을지도 모른다.
분명한 건 나는 여전히 뭔가를 궁리하고 만드는 일이 좋다는 것. 그걸 더 잘하고 싶어서 계속 배우고, 실험한다. 그리고 AI는 그런 나를 몇 배로 키워주는 도구다.
그래서 당분간은 '그래서 직업이 뭐예요?' 라는 물음에 답을 정하는 대신, 내가 하는 일을 하나씩 세상에 꺼내놓으려고 한다.
1년 후의 나는 지금보다 훨씬 재밌는 일을 하고 있을 거다. 장담한다. 이번엔 근거 있는 자신감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