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사람들의 시대가 온다

이제 각자 자기 몫을 찾아 나설 때

by엘리사
내가 석사 딸 땐
AI도 없이 쌩으로 논문 썼어

가끔 동문회에서 현역 대학원 후배들을 만나면 농담으로 이런 말을 한다. 말하면서 괜히 오버하며 어깨도 한번 으쓱한다. 쓰고 보니 영락없는 '라떼는 말이야'다.


그때를 떠올리면 아직도 좀 아득하다. 도서관 서가를 뒤지고, RISS랑 DBpia에 키워드를 넣어가며 논문을 하나하나 찾고, PDF로 받아지면 다행이고 안 되면 유료로 결제해서 읽었다. 그렇게 모은 논문 수십 편을 한 편씩 붙잡고 읽느라 몇 달을 보냈다.


쓰는 건 또 어땠나. 논문 문장은 왜 그렇게 어려운지. 평소엔 그냥 "이게 중요하다"고 말하면 될 걸, 논문에선 "본 연구는 이러한 측면에서 유의미한 시사점을 제공한다고 할 수 있다" 같은 그럴싸한 문장으로 바꿔야 했다. 그럴싸한 한 문장을 만들려고 쓰고, 지우고, 다시 쓰고, 피드백 받고 또 고치고.


지금 이 AI 시대에 석사를 다시 한다면, 정말 훨씬 편하게 쓰지 않았을까 싶다.


논문 얘기로 시작했지만, 사실 요즘 이런 생각을 자주 한다. 예전엔 엄두도 못 내던 일들이, 요즘은 마음만 먹으면 해볼 수 있는 일이 되어가고 있다는 것.





부끄럽지만 고백하자면, 어릴 적 내 꿈은 스타였다.


거울 앞에서 춤추고, 포즈 잡고, 혼자 시상식 소감까지 연습하던 아이. 내향적인 아이였지만 내면에 잠재된 끼라면 없지 않았다. 문제는 그 끼를 꺼내 보일 방법이 딱히 없었다는 거다.


그 시절 스타가 되는 길은 대충 이랬다.


1. 오디션장에 가서, 팔짱 끼고 앉은 무표정한 어른들 앞에 선다.

2. 그리고 그분들 표정이 조금이라도 풀릴 때까지 끼를 대방출한다.

3. 그걸 통과해야 겨우 기회 비슷한 게 주어졌다.


어린 마음에 그 심사위원석이 어찌나 높아 보이던지. 상상만 해도 머리카락이 쭈뼛 서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엄두조차 내지 않았고, 내 무대는 끝까지 우리 집 거울 앞이었다.


요즘 가끔 이런 상상을 한다. 나의 10대 시절이 지금과 같은 시대라면 어땠을까. 아마 거울 대신 휴대폰 카메라를 켰겠지. 심사위원 대신 틱톡 창과 인스타그램 릴스로 끼를 부리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럼 지금쯤 뭐가 돼 있었을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그 꿈을 그렇게 조용히 접진 않았을 것 같다. (물론 지금은 그 끼가 많이 잠잠해졌다. 글로 떠드는 지금이 나한텐 딱 맞다.)





예전 슬롯를 떠올려보면, 나는 좀 '과거급제 슬롯' 같았다고 생각한다.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려면 정해진 시험(관문)을 통과해야 했다. 개그맨이 되고 싶으면 방송국 공채에 붙어야 했고, 가수가 되고 싶으면 기획사 오디션을, 작가가 되고 싶으면 신춘문예나 출판사 투고를 통과해야 했다. 아이돌도 마찬가지였다. 사실상 3대 기획사에 들어가는 게 성공 공식처럼 여겨졌고, 거기서 몇 년씩 연습생 생활을 버텨야 겨우 데뷔 기회가 왔다.


등용문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거센 물살을 거슬러 용문을 넘은 잉어만 용이 된다는 이야기처럼, 그 문을 넘은 소수만 무대에 설 수 있었다.


그 문은 너무 좁았다. 시험을 볼 기회조차 없는 사람이 훨씬 많았다. 서울에 살아야 유리했고, 아는 사람이 있어야 했고, 정보도 있어야 했고, 운도 따라야 했다. 그러니 문 안에 들어간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우러러보는 대상이 됐다. TV 속 사람들은 나와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들 같았다. 그야말로 그사세. 그 사이의 거리는, 감히 엄두도 못 낼 만큼 멀었다.




지금은 어떨까. 시험장이 거의 사라졌다.


AI가 정보의 문을 열고, 블로그와 SNS가 발언권을 나눠주고, 유튜브가 방송국을 개인 손에 쥐여줬다. 공채 개그맨이 아니어도 웃긴 사람은 쇼츠 하나로 알려진다. 아이돌도 이제는 대형 기획사 간판이 전부가 아니다. 작은 기획사에서 시작한 그룹이 SNS와 팬들의 입소문만으로 차트를 역주행하거나 세계 무대에 서기도 한다.


올여름 멜론 1위에 오른 리센느가 딱 그렇다. 작은 기획사에서 데뷔해 한동안 조용히 묻혀 있던 그룹인데, 리더가 개인 유튜브 채널에서 찍은 "거제 야호" 한마디가 밈이 되면서 2년 전 노래가 차트 1위까지 역주행했다. 방송국도 기획사도 아니고, 멤버 한 명의 유튜브 채널에서 시작된 일이다.


그리고 지금은 AI가 전문가들만 갖고 있던 '만드는 능력'까지 나눠주는 중이다. 영어를 못해도 해외 논문을 읽고, 디자인을 배운 적 없어도 그럴듯한 포스터를 만들고, 코딩을 몰라도 작은 서비스를 띄워볼 수 있다.


물론 완전히 공평해졌다고 말하긴 어렵다. 돈도, 시간도, 어디서 태어났는지도 여전히 중요하다. 그래도 적어도 문은 열렸다. 예전엔 문 앞에서 돌아서야 했던 사람들이, 이제는 일단 들어가볼 수는 있게 됐으니까.



요즘 세계적으로 잘나간다는 K뷰티도 비슷하다.


예전엔 화장품도 이름 있는 대기업 브랜드가 강했다. 화장품 하나를 만들어 팔려면 연구개발부터 생산, 유통, 광고까지 돈 들어갈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백화점에 입점하거나 TV 광고를 내보낼 자본이 있는 기업이 유리할 수밖에 없었다. 소비자 입장에서도 익숙한 브랜드를 고르는 게 가장 무난한 선택이었다.


그런데 요즘은 처음 들어보는 이름의 화장품이 세계적인 히트 상품이 되기도 한다. 한국에는 코스맥스나 한국콜마처럼 화장품 개발과 생산을 전문으로 하는 기업들이 있다. 덕분에 작은 브랜드도 공장을 직접 짓지 않고 제품을 만들 수 있다. 여기에 올리브영 같은 유통 채널과 SNS, 뷰티 크리에이터들의 리뷰가 더해지면서 소비자에게 닿는 길도 다양해졌다.


이제는 꼭 유명한 메이커여야만 잘 팔리는 게 아니다. 오히려 이름도 낯선 신생 브랜드가 제품 하나로 입소문을 타고, 해외 소비자들의 화장대까지 차지한다. 예전 같으면 광고비로 수십억을 써야 얻었을 관심을, 누군가는 틱톡 영상 하나로 얻기도 한다. 물론 그 관심을 실제 매출로 연결하고 오래 살아남는 건 또 다른 문제지만.


스타를 만드는 방식도, 브랜드를 만드는 방식도 달라지고 있다. 한때는 거대한 자본과 조직을 가진 쪽이 기회를 독점했다면, 이제는 작은 존재도 자기만의 무언가로 승부를 걸어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요즘은 연예인보다 일반인 스타가 더 눈에 띈다. 아예 대놓고 방송인인 사람보다, 회사 다니면서 퇴근 후에 영상 올리는 사람이나 팔로워 천명 남짓인데 꾸준히 자기 일을 하는 사람 이야기가 더 궁금하다. 솔직히 나도 그렇다. 모르는 연예인이 10억을 벌었다는 기사보다, 내가 아는 누군가가 부업으로 500만 원을 벌었다는 얘기가 훨씬 와닿는다. (그리고 괜히 특별한 비결이 있을 것만 같고 궁금해진다.)


옛말에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고 했는데, 심리학에서도 비슷한 얘기를 한다. 1954년에 심리학자 페스팅거가 내놓은 '슬롯비교 이론'에 따르면, 사람은 자기를 평가할 때 주로 나와 비슷한 사람을 비교 대상으로 삼는다고 한다. 너무 먼 사람은 애초에 비교가 안 되니까. 그래서 멀리 있는 스타의 성공보다 가까운 사람의 성공이 더 크게 느껴지는 거다.



신뢰도 그쪽으로 옮겨가고 있다. 세계적인 PR 회사 에델만이 매년 사람들의 신뢰도를 조사하는데, 2017년 조사에서 '나와 비슷한 사람'의 말을 믿는다는 응답이 60%로, 전문가와 똑같은 수준이었다. 기업 CEO(37%)보다 훨씬 높았고. 이듬해 조사에서는 소셜미디어에서 유명인이 동료나 전문가보다 훨씬 덜 믿을 만한 정보원으로 꼽혔다.


우러러볼 사람보다, 나도 될 수 있을 것 같은 사람. 거인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다만 이제 거인을 추구할 필요는 없어졌다.



그래서 나는 이 시대가 작은 사람들의 시대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예전엔 등용문을 넘은 몇 명만 무대에 섰다면, 지금은 수많은 작은 사람이 각자 자기 자리에서 자기 몫을 가질 수 있는 판이 열렸다. 거창한 스타가 되자는 게 아니다. 내 이야기를 궁금해할 사람 몇백 명, 몇천 명을 만나는 것. 예전 같으면 꿈도 못 꿨을 일이, 지금은 해볼 만한 일이 됐다.


그러니 이제는 각자 자기 몫을 찾아 나서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누가 문을 열어주길 기다릴 필요가 없으니까.



다만, 하나 마음에 걸리는 게 있다. 문이 열린 건 맞는데, 들어와 보니 안이 생각보다 너무 넓다. 그 얘기는 다음 글에서 해보려고 한다.




[참고자료]

Festinger, L. (1954). A Theory of Social Comparison Processes. Human Relations, 7(2), 117–140.

Edelman (2017). 2017 Edelman Trust Barometer. https://www.edelman.com/news-awards/2017-edelman-trust-barometer-reveals-global-implosion

Edelman (2018). 2018 Edelman Trust Barometer: Brands and Social Med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