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꽤 잘 만들게 되었다

모두가 60점에 도달할 수 있는 세상

by엘리사
2025년도 중후반,
그 무렵부터 내가 흔해졌다.

조금 이상한 말이지만, 실제로 그런 기분이 들었다.


2023년도 극 초반, 내가 생성형 AI를 본격적으로 만지기 시작했을 때만 해도 분위기는 지금과 많이 달랐다. 이미지 생성 AI로 만든 그림을 보여주면 사람들이 신기해했다. 어떻게 만들었는지, 무슨 프로그램을 쓰는지, 프롬프트는 어떻게 입력하는지 물었다. 심지어 프롬프트 라는 개념조차 낯선 시기였다.


나도 처음부터 잘했던 건 아니다. 오히려 마음에 안 드는 결과가 훨씬 많았다. 머릿속에는 분명한 이미지가 있는데 AI는 자꾸 내 말귀를 못 알아듣고 엉뚱한 걸 만들어냈다. 손가락은 이상했고, 글자는 알아볼 수 없었고, 조금만 수정하려 해도 멀쩡한 부분까지 바뀌었다.


Generated by Midjourney / Elissa

그래도 오히려 재미있었다. 그 난관을 해결해가는 과정이.


남들이 아직 잘 모르는 도구를 가지고 이런저런 가능성을 시험해 보는 일이. 디자이너로 일하며 익힌 감각을 전혀 다른 방식으로 써먹을 수 있다는 사실도. 그 시절 AI는 프롬프트도 지금처럼 알잘딱깔센으로 알아듣지 못해서 더욱 정교화된 프롬프트 엔지니어링이 필요했고, (심지어 한국어로 소통하는 것도 힘들었고) 그 과정 또한 마치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 것처럼 AI국의 소통 언어를 익히는 것처럼 재미있었다.


그렇게 실험을 계속하다 보니 작품을 만들고 전시에도 참여하게 됐다. AI를 활용하는 방법을 가르치는 일도 생겼다. 돌이켜 보면 조금 일찍 시작한 덕을 본 셈이다. 물론 일찍 시작했다고 저절로 기회가 생긴 건 아니다. 그동안 쌓아온 미적 감각과 시행착오도 필요했다.


그래도 당시에는 AI를 능숙하게 다룬다는 사실 자체가 나를 설명하는 꽤 괜찮은 특징이었다.


Generated by Midjourney / Elissa

그런데 몇 년 사이 상황이 달라졌다.


이제는 수강생도, 비디자이너도, 처음 AI를 접하는 사람도 꽤 근사한 결과물을 만든다. 예전 같았으면 한참 설명해야 했을 기능을 자연스럽게 사용한다. 새로운 모델이 나오면 내가 강의에서 가르쳤던 방법이 순식간에 기본 기능이 되기도 한다. 내가 시행착오를 겪어가며 열심히 익힌 기술이 흔해진 것이다.


AI 콘텐츠 디자인과 브랜딩 강의를 하면서 이 속도를 제대로 실감했다. 처음에는 VOD 강의를 제작했다. 그런데 촬영할 때만 해도 유효했던 설명이 출시할 무렵에는 이미 낡아 있는 경우가 생겼다. 그래서 새로 촬영하고 강의 교안도 다시 업데이트하기도 했다. 불과 2주만에도 이런 일이 벌어졌다. 그래서 나중엔 차라리 실시간으로 업데이트할 수 있는 현장 강의가 낫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런데 현장 강의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지난주에 열심히 설명했던 문제 해결법이 다음 주에는 버튼 하나로 해결되기도 했다.(업데이트가 되어버렷..) 그동안 내가 고군분투하며 찾아낸 해결법 노하우가 어느 날 갑자기 기본 탑재 기능이 되는 것이다.


이쯤 되면 내가 기술을 익히는 건지, 기술의 업데이트 내역을 쫓아다니는 건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Generated by Midjourney / Elissa

새로운 무기인 AI조차 그러한데, 오랫동안 사용해온 무기(?)는 또 어떨까.


나는 꽤 오랫동안 어도비 포토샵과 일러스트레이터를 다뤘다. 군인에게 총이 무기라면, 디자이너에게 어도비 툴은 그런 것이다. 단축키를 외우고, 레이어를 정리하고, 원하는 이미지를 구현하기 위해 온갖 방법을 찾아다녔다. 디자이너로 일하면서 그 기술들은 내 밥벌이가 됐다.


그런데 요즘은 디자인을 배운 적 없는 사람도 AI로 제법 근사한 포스터를 만든다. 글을 써본 적 없는 사람도 매끄러운 글을 쓰고, 코딩을 모르는 사람도 작동하는 웹사이트를 만든다. 물론 자세히 들여다보면 부족한 부분이 많다. 하지만 처음 결과물을 마주했을 때의 감상은 대체로 비슷하다.


'어? 뭐지 생각보다 잘하는데?'


나는 이 현상을 혼자 이렇게 부르곤 한다.

Generated by Midjourney / Elissa


모두가 60점에 도달할 수 있는 세상.

여기서 60점은 실제 점수가 아니다. 그냥 '어디 내놓아도 아주 민망하지는 않은 수준' 정도의 비유다. 예전에는 그 60점에 도달하는 것부터가 일이었다. 도구를 배우고, 시행착오를 겪고, 기본기를 쌓아야 했다.


이제 AI가 그 과정의 일부를 놀라울 만큼 빠르게 압축한다.


실제로 2023년 <사이언스>에 발표된 연구에서는 온라인 게임인 453명이 글쓰기 과제를 수행했다. ChatGPT를 사용한 참가자들은 작업 시간이 평균 40% 줄었고, 결과물의 평가 품질은 18% 높아졌다. 특히 원래 수행 능력이 낮았던 참가자들이 더 큰 도움을 받았다.


물론 글쓰기 실험 하나로 모든 분야의 실력이 평준화됐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내가 현장에서 느낀 변화와 닮아 있다.


예전에는 '이걸 만들 수 있어요'라는 말이 경쟁력이었다. 이제는 AI를 이용해 꽤 많은 사람이 비슷한 출발선에 설 수 있게 됐다. 하지만 모두가 60점에 도달할 수 있다면, 60점이라는 사실만으로는 더 이상 특별해지기 어렵다.


그렇다고 모두가 100점을 받아야 한다는 뜻일까?


그것 보다는 다른 문제가 생겼다고 생각한다.


Generated by Midjourney / Elissa


왜 다 비슷해 보일까?

AI로 만든 이미지들을 보다 보면 가끔 그런 순간이 있다.


예쁘다. 구도도 안정적이고 색감도 근사하다. 그런데 어디서 많이 본 것 같다. 다른 사람이 만든 이미지도 예쁘다. 그런데 그 이미지 역시 어디서 많이 본 것 같다. 서로 다른 사람이 만들었는데 비슷한 취향이 느껴지는 것이다. 이런 생각이 단순히 내 직업병만은 아닐지도 모르겠다.


Generated by Midjourney / Elissa
2024년 <사이언스 어드밴시스>에 발표된 연구에서는 사람들이 AI의 도움을 받아 단편소설을 썼다. AI를 활용한 작품은 창의성이나 재미 등에서 더 좋은 평가를 받았다. 그런데 반전이 있었다. 개별 작품의 평가는 좋아졌는데, 작품들을 모아놓고 보니 서로 더 비슷해진 것이다.


각자 더 잘 쓰게 됐는데, 전체적으로는 비슷한 이야기가 늘어났다니. 물론 단편소설을 대상으로 한 실험이고, 모든 AI 창작물이 획일화된다는 뜻은 아니다. 사람도 유행을 따라 하고 서로를 모방하니까.


그래도 이 결과는 꽤 흥미롭다. AI가 우리의 능력을 끌어올리는 동시에, 우리가 비슷한 답에 만족하도록 만들 수도 있다는 가능성이니까.



Generated by Midjourney / Elissa


그럼 이제 안목만 있으면 될까?

여기서 흔히 나오는 말이 있다. '앞으로는 만드는 기술보다 안목이 중요하다.'


나도 어느 정도 동의한다. 하지만 이 말에는 조금 불편할 구석이 있다. 안목이라는 게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지는 능력은 아니니까.


디자인을 오래 해본 사람은 이미지가 어색한 이유를 더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 글을 오래 써본 사람은 매끄럽지만 어딘가 텅 빈 문장을 알아차리기도 한다.


즉, 그동안 쌓아온 기술과 경험이 판단의 재료가 되는 것이다.


그러니 이제 기술보다 취향만 있으면 된다는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다. 오히려 기술을 원래 가진 사람이 그 기술을 사용하는 방식이 달라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Generated by Midjourney / Elissa


나는 미친듯한 속도로 발젼해나가는 AI가 점점 더 쉬워지고있는 덕분에 더 많은 사람이 무언가를 만들 수 있게 된 변화가 반갑다. 예전에는 기술을 익히는 데 드는 시간과 비용 때문에 시작조차 못 했던 사람들이 자기 아이디어를 세상에 꺼내고 돈까지 벌 수 있게 됐으니까. (나 포함)


앞으로 AI를 잘 다룬다는 사실은 점점 덜 특별해질 것이다. 다만, AI가 누구에게나 60점짜리 결과물을 만들어주는 시대라면, 언젠가 60점짜리 결과물조차 당연해지는 날이 올지 모른다. 그다음엔 70점, 80점이 새로운 기본값이 될지도 모른다.


AI가 모두를 능숙하게 만들어준 건 맞다. 문제는 우리가 올라간 만큼, 세상의 눈높이도 같이 올라간다는 것이다. 이에 관한 자세한 이야기는 아래 글에서 이어진다.




[참고자료]

Noy, S. & Zhang, W. (2023). Experimental Evidence on the Productivity Effects of Generative Artificial Intelligence. Science.

Doshi, A. R. & Hauser, O. P. (2024). Generative AI Enhances Individual Creativity but Reduces the Collective Diversity of Novel Content. Science Adva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