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아껴주는 기술의 역설
아침에 피드를 열면 수많은 크리에이터들의 새 작품이 줄줄이 올라와 있다. 영상, 일러스트, 카드뉴스 등등. 엄지로 스크롤을 내릴 때마다 누군가는 또 하나를 완성해 놓았다.
그걸 보고 있으면 이상하게 마음이 급해진다.
나는 빠르게 쳐내는 사람이 아니다. 작품 하나를 오래 붙잡고, 깊게 생각하고, 마음에 들 때까지 고치는 쪽이다. 전시에 낼 영상을 만들 때도 그랬다. AI로 컷을 뽑는 건 금방이었다. 그런데 뽑은 컷들을 고르고, 마음에 안 드는 장면을 다시 돌리고, 이어 붙였다가 또 갈아엎다 보니 어느새 8시간이 지나 있었다. 기획, 서사, 스토리텔링, 퀄리티랑 타협이 잘 안 되는 성격이라 어쩔 수 없다.
돌이켜보면 그 8시간의 대부분은 일명 '딸깍 생성' 시간이 아니라 고르고 뒤집어 엎고, 수정하는 시간이었다.
그러니 피드를 볼 때마다 진심으로 궁금하다. 대체 사람들은 어떻게 이런 걸 이렇게 자주 올리는 걸까. 진짜 대단하다.
그렇다고 손 놓고 구경만 할 수는 없었다. 어쩌겠어, 해야지. 에이전트를 만들어 돌리고, 기획도 리서치도 예전보다 훨씬 많이 한다. 스케줄도 일부러 빡빡하게 잡는다. 예전엔 콘텐츠 하나에 호흡을 길게 가져갔다면, 지금은 그 호흡이 짧아진 느낌이다. 그래서인지 요즘은 늘 조금 불안하기도 하고 숨이 찬 기분이다. 처음엔 내가 요령이 없어서 그런 줄 알았다.
만드는 게 쉬워지니까,
더 많이 만들게 된 거다.
예전엔 시안 하나 만드는 데 반나절은 걸렸다. 그러니 하나를 정성껏 만들었다. 지금은 몇 분이면 뚝딱 나온다. 그러니 열 개쯤 뽑아놓고 고른다. 리서치도 마찬가지다. 예전엔 자료 다섯 개 읽고 끝냈다면, 지금은 쉰 개가 쌓여 있다. 시간이 남으면 쉴 줄 알았는데, 남은 시간에 또 뭔가를 만들고 있더라.
알고 보니 이런 현상에 이름까지 있었다. '제번스의 역설'. 1865년에 영국의 경제학자 제번스가 발견한 건데, 석탄을 아껴 쓰는 증기기관이 나왔더니 석탄을 덜 쓰기는커녕 오히려 더 많이 쓰게 됐단다. 싸고 편해지면 아끼는 게 아니라 더 쓰게 된다는 거다.
이 160년 된 얘기를 작년 초에 마이크로소프트 CEO 사티아 나델라가 다시 꺼냈다. 중국의 딥시크가 훨씬 싼 비용으로 성능 좋은 AI를 내놓자, SNS에 "제번스의 역설이 또 일어났다!"라고 썼다.
얼마 전 내가 참여하는 브랜딩 스터디 모임에서도 이런 얘기가 나왔다. 요즘 어딜 가나 AI는 빠지지 않는 주제라, 그날도 자연스럽게 그쪽으로 흘러갔다. 그래서 내가 물어봤다.
"다들 AI 덕분에 요즘 좀 편해지셨어요?"
돌아온 대답은 거의 비슷했다.
"아니요, 바쁜 건 여전해요."
그때 한 분이 세탁기 얘기를 꺼냈다. 세탁기가 처음 나왔을 때도 다들 "가사노동에서의 해방"이라며 이제 집안일이 확 줄어들 줄 알았는데, 막상 빨래는 더 자주 하게 됐다는 거다. 듣는 순간 고개가 끄덕여졌다.
궁금해서 찾아보니 실제로 이걸 연구한 사람이 있었다. 기술사학자 루스 슈워츠 코완은 <More Work for Mother>라는 바카라에서, 세탁기나 진공청소기 같은 가전이 집안일을 덜어줄 것 같았지만 실제로는 '깨끗함의 기준'이 같이 올라가 버렸다고 말한다. 빨래가 쉬워지니 옷을 더 자주 빨게 됐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다들 그렇게 하니까 그게 당연한 게 된 거다.
AI도 비슷한 길을 가고 있는 것 같다. 다들 빨리, 많이 만들 수 있게 되니까 "이 정도는 기본이지" 하는 선이 올라간다.
올해 초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에서 딱 이 얘기를 다룬 연구를 봤다. UC 버클리 연구진이 직원 200명쯤 되는 미국의 한 IT 회사에 8개월 동안 드나들면서, AI가 사람들이 일하는 방식을 어떻게 바꾸는지 지켜봤다고 한다.
결과는 이랬다. 다들 더 빨리 일하고, 더 많은 일을 맡고, 더 오래 일하게 됐다. 근데 회사가 시킨 게 아니었다. AI 쓰라고 강요한 적도 없었단다. 그냥 AI가 있으니까 더 할 수 있을 것 같았고, 해보니 재밌기도 해서 다들 알아서 더 한 거다.
제일 와닿은 건 그다음이었다. 그렇게 다들 빨라지다 보니, 빠른 게 어느새 기본이 됐다는 거다. 누가 "더 빨리 해"라고 한 적도 없는데, 옆 사람이 빨라지는 게 눈에 보이니까 그게 당연한 속도가 돼버렸다. AI 덕분에 빨라지고, 빨라진 만큼 기대가 올라가고, 그 기대에 맞추려고 AI를 더 쓰고. 그렇게 계속 돌고 도는 거다.
연구에 참여한 한 엔지니어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AI 덕분에 생산성이 오르면 시간이 남아서 좀 덜 일할 줄 알았는데, 막상 해보니 덜 일하지 않는다고. 똑같이, 아니 오히려 더 일하게 된다고.
AI가 시간을 아껴준다는 말은 맞다. 근데 그 아낀 시간을 어디에 쓸지는 아무도 안 알려준다. 그냥 두면 그 시간은 자연스럽게 더 많이 만들고, 남들 속도 따라가는 데 쓰이더라.
그 연구진도 비슷한 말을 했다. AI는 더 하는 건 쉽게 만들지만, 멈추는 건 어렵게 만든다고. 그래서 일부러 멈추는 시간을 정해두라고.
한번쯤 생각해 볼 문제다. AI가 아껴준 나의 시간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느냐고.
[참고자료]
William Stanley Jevons (1865). The Coal Question.
NPR Planet Money (2025. 2. 4.). Why the AI world is suddenly obsessed with a 160-year-old economics paradox.
Ruth Schwartz Cowan (1983). More Work for Mother: The Ironies of Household Technology from the Open Hearth to the Microwave. Basic Books.
Aruna Ranganathan & Xingqi Maggie Ye (2026. 2. 9.). AI Doesn't Reduce Work—It Intensifies It. Harvard Business Review. https://hbr.org/2026/02/ai-doesnt-reduce-work-it-intensifies-i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