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면 황금빛으로 단장하는 은행나무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우리나라 대표 가로수다. 이 계절이 찾아오면, 은행나무는 거리를 노란빛으로 채색하는 화가가 된다. 바람에 잎이라도 떨어져 흩날리면 거리를 지나던 사람들은 노란 비를 맞으며 환상의 한때를 보낼 수 있다. 가을마다 이런 추억을 선물해 주는 은행나무는 고향에서도, 이사 온 낯선 도시에서도 늘 나를 반겨주는 고마운 존재다. 그런 고마운 은행나무가 가을마다 곁눈질받는다고 생각하면 괜스레 미안해진다. 특유의 진한 냄새를 풍기는 열매 탓이다.
노란 물결이 도심 구석구석 넘실거릴 즈음, 구청 게시판에는 은행 냄새를 호소하는 시민들의 목소리가 빼곡히 쌓이곤 한다. 가을마다 이 나무를 베네, 뽑네 하는 민원으로 은행나무의 운명이 위태위태해 보이기도 하다. 다행히 냄새가 나기 전 은행 열매를 미리 떨구어 채취하는 새로운 기계가 도입되면서, 이제는 눈총받을 일이 적어졌다. 마침내 은행나무가 ‘악취의 오명’을 벗을 것 같아, 조마조마했던 마음도 안도의 숨을 내쉰다.
한국에서 가로수로 산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가로수가 되기 위한 조건은 꽤 까다롭다. 우선 공해와 병충해에 강하고 적응력과 생장력이 뛰어나야 한다. 수형이 정형적이고 수간이 곧아야 함은 물론이다. 여름철에는 무성한 잎으로 짙은 녹음을 제공하고, 겨울철에는 아낌없이 잎을 떨구어 거리에 일조량을 확보해 주는 나무여야 한다.
겨울에도 잎을 고수하는 상록수와 달리, 은행나무는 제 손으로 잎을 모두 떨어뜨린다. 그렇게 만들어진 빈 가지 사이로 겨울 햇살이 막힘없이 쏟아져 내리면 나무가 비워둔 하늘 덕분에 도로와 인도의 눈은 한결 빨리 녹는다. 이러면 매일 길을 걷는 이들에게 따스함을 그대로 건네주어, 여민 코트 위로 온기가 스며든다. 볕이 깊숙이 들어온 덕분에 상가와 주택의 실내 난방비도 줄어든다. 이처럼 가로수들은 계절의 시계에 맞춰 옷을 갈아입으며 우리의 일상과 도시의 온도를 세심하게 조절해 주고 있다.
가로수는 소리 없이 헌신하지만, 결코 티를 내지 않는다. 물론 말 한마디를 하지 못하는 그들의 처지 때문이지만, 묵묵함이 본래의 성품인 것만 같아 측은한 마음이다. 은행나무의 수만 개의 부채꼴 잎은 도심의 매연과 대기오염을 조용히 걸러내고, 촘촘한 가지로는 자동차 불빛과 소음을 몸으로 막아선다. 때로는 찻길 옆에서 보행자의 든든한 방패가, 때로는 거센 바람을 막아주는 벽이 되어 주기도 한다. 더불어 두꺼운 코르크질의 껍질은 화재를 막는 방화수 역할까지 해내고 있다.
은행나무의 수명은 천 년이 넘는다. 그래서 도심에서도 노거수를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용문사 은행나무, 반계리 은행나무와 같은 대표적인 거목들은 눈앞에서 임진왜란, 6.25도 지켜보았다. 유구한 세월을 생각하면, 우리 역사를 지켜온 어른으로 대접해 드려야 할 것도 같다.
이렇게 오래 살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은행나무를 야생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들다. 야생의 자생 개체가 적은 이유는 수분을 해줄 생명체가 적어서인데, 새도 곤충도 선호하지 않는 은행 열매 과육을 대부분의 동물 역시 반기지 않는다. 묵묵히 제 종족을 퍼뜨리기 위해 결실을 맺어왔지만, 은행나무 열매의 진한 냄새는 대부분의 동물에게 선택받기 어려운 모양이다. 다행히 삵, 오소리, 너구리 같은 동물들이 드물게 먹는다지만 개체수가 많지 않다.
그런데 고약한 냄새가 너구리의 취향이라고 생각하니, 갑자기 너구리의 독특한 취향이 사랑스럽게 느껴진다. 인간 이외에는 자연번식이 힘들었을 텐데, 야생에서 독특한 취향을 가진 동물들 덕분에 조용한 멸종을 면할 수 있다니 그들의 취향이 새삼 반갑다.
도심에서는 인간만이 번식의 매개가 되어 주는데, 정작 인간의 곁에서 살아가는 가로수 은행나무의 현실은 그리 녹록지 않다. 겨울철 도로에 뿌려진 제설제로 인해 흙 속의 염화칼슘 농도가 높아지면, 토양의 염분 농도가 나무 세포 내부보다 높아지면서 뿌리의 수분이 흙으로 빠져나가는 '삼투 현상'이 일어난다. 겨울의 삶은 또 다른 시련이라 나무는 서서히 말라 죽는다. 사계절 내내 도심의 온갖 고충을 받아내다 결국 탈수와 영양 부족으로 메말라가는 모습을 보자니, 가로수로 선정된 타이틀이 가혹한 훈장처럼 다가온다.
산바카라길에 만난 노오란색 은행잎이 햇빛을 받아 반짝인다. 예쁜 노랑을 그러모아 겨울에도 푸르른 사철나무와 짝꿍을 맺어본다. 늘 푸르고 노오란 잎들과 항시 곁에 있어 주길, 자연을 주관하는 신에게 빌어본다. 부디, 도심의 나무들이 환경적 요인이 아닌, 노화로 자연사하기를. 이 가을에도 다음 가을에도, 노란색 자연 페인터로 은행나무가 남아주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