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앗은 길을 따라왔다>

토종씨앗, 문명을 묻다. 06

by호시우행

장터에 나온 사람들의 보따리에는 먹을거리만 들어 있지 않았다. 곡식 자루 한쪽에 몇 줌의 씨앗이 따로 들어 있었고, 팔려고 가져온 콩 가운데에는 다음 농사를 위해 남겨둔 것도 있었을 것이다. 누군가는 다른 마을에서 얻은 씨앗을 가져왔고, 누군가는 친척에게 받은 씨앗을 품에 넣고 돌아갔다.


사람은 장을 보고 돌아가지만 씨앗은 다른 밭으로 갈 수 있었다.한 지역에서 자란 씨앗이 언제까지나 그곳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사람이 다른 마을로 옮겨가면 씨앗도 따라갔다. 혼인을 하면서 가져가기도 했고, 친척에게 건네기도 했다. 장터에서 곡식과 함께 움직였고, 이웃 마을의 농부에게 넘어가기도 했다.


농업의 역사는 정착의 역사인 동시에 이동의 역사였다. 사람은 한곳에 머물며 농사를 지었지만 그곳에만 머물지는 않았다. 새로운 땅으로 옮겨가기도 했고, 물건을 사고팔며 다른 지역의 사람들과 만났다. 가족이 다른 곳으로 옮겨가기도 했고, 전쟁이나 기근처럼 삶의 터전을 흔드는 일 앞에서 길을 나서기도 했다.


그때 사람이 가져간 짐 가운데 씨앗이 들어 있었다. 씨앗은 작았다. 많은 짐을 가져갈 수 없는 상황에서도 몇 줌은 챙길 수 있었다. 한 해 농사를 지을 씨앗을 모두 가져갈 필요도 없었다. 일부를 가져가 심으면 그곳에서 다시 씨앗을 얻을 수 있었다.


그래서 씨앗의 이동은 사람의 이동만큼 눈에 띄지 않았다. 누가 어느 날 어떤 씨앗을 들고 어느 길을 갔는지 기록되지 않은 경우가 많다. 그러나 농사를 짓는 사람이 움직일 때 씨앗이 함께 움직일 가능성은 늘 있었다.

한 마을에서 다른 마을로 간 씨앗은 새로운 밭에 들어갔다.


처음에는 낯선 씨앗이었을 것이다. 그 씨앗을 가져온 사람은 어디에서 얻었는지 알고 있었을 것이다.

“친정에서 가져왔어요.”

“북쪽 마을에서 받은 거예요.”

“장에 갔다가 구했어요.”

씨앗의 출처를 설명하는 말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사람들의 관심은 출처에서 농사로 옮겨간다. 어느 밭에서 잘 자라는지, 언제 심어야 하는지, 수확한 뒤 어떻게 보관하는지, 어떤 음식에 쓰는지를 알게 된다. 해마다 같은 씨앗을 심고 거두면 그 씨앗은 더 이상 낯선 곳에서 온 씨앗으로만 남지 않는다.


그 밭에서 이어온 씨앗이 된다. 사람도 다른 곳에서 태어나 한 마을에서 오래 살아가면 그 마을 사람으로 불리곤 한다. 태어난 곳과 살아온 곳이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씨앗도 그렇다. 어디에서 왔는지와 어디에서 오래 살아왔는지는 같은 질문이 아니다. 한 지역에서 들어온 씨앗이 여러 해 동안 심어지고, 그 지역의 농사와 음식 속에서 쓰이고, 다음 농사를 위해 다시 남겨진다면 사람들은 그 씨앗을 자기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게 된다.


출신보다 함께 살아온 시간이 길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토종이라는 말도 출생지 하나만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농가에서 오래 이어진 씨앗 가운데에는 한 지역에서 재배되고 선발되면서 그 지역의 농업환경에 적응한 것들이 있다. 처음부터 그곳에서 생겨난 씨앗일 수도 있고, 다른 곳에서 들어와 여러 세대 동안 그곳에서 이어진 씨앗일 수도 있다.


씨앗의 출발점과 씨앗의 삶은 다를 수 있다. 하지만 이동했다고 해서 모두 그곳의 씨앗이 되는 것은 아니다. 새로 들어온 씨앗 가운데에는 잘 자라지 못하는 것도 있다. 농사 방식과 맞지 않을 수도 있고, 사람들이 원하는 맛이나 수확 시기와 다를 수도 있다. 어떤 씨앗은 한두 해 심어진 뒤 더 이상 이어지지 않는다. 어떤 씨앗은 남는다. 사람들이 다시 심고, 수확하고, 그 가운데 일부를 다음 농사에 남긴다. 그 일이 여러 세대 이어지면 그 씨앗은 그 지역의 농사 속에 자리를 잡는다.


여기에는 사람의 선택이 있다. 동시에 땅과 기후의 영향도 있다. 그러나 그 변화는 한 해의 농사만으로 설명할 수 없다. 여러 세대 동안 어떤 씨앗이 계속 심어지고 어떤 씨앗이 사라지는 과정이 쌓이면서 농가에서 유지되는 씨앗의 성격이 달라질 수 있다.


이동은 씨앗의 삶에서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었다. 씨앗은 여러 길을 따라 움직였다. 강을 따라 사람들이 오갔고, 산길을 넘어 마을과 마을이 이어졌다. 해안을 따라 물자가 이동했고, 사람들이 모이는 장터에서는 곡식도 함께 움직였다. 하지만 씨앗이 돈을 따라 이동한 것만은 아니다. 친척이 건네주기도 했다. 이웃이 나누어주기도 했다. 농사를 시작하는 사람에게 씨앗을 빌려주고 수확한 뒤 돌려받기도 했다. 좋은 씨앗을 가진 농부가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주기도 했다.


씨앗은 물건의 교환을 따라 움직이기도 했지만 사람 사이의 관계를 따라 움직이기도 했다. 혼인도 그 가운데 하나였을 수 있다. 한 여성이 자신이 자라온 집에서 이어오던 씨앗을 가지고 다른 마을의 집으로 들어간다고 생각해보자. 씨앗 몇 줌은 혼인 짐에서 아주 작은 부분이었을 것이다. 그 씨앗이 새 집의 밭에 들어가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친정에서 먹던 음식의 재료가 새로운 밭에서 자란다. 새로 들어온 씨앗은 그 집에서 필요한 작물이 되고, 다음해에는 그 집에서 거둔 씨앗이 된다.


사람이 이동하면서 씨앗도 이동한다. 역사바카라에는 한 여성이 어느 마을에서 어느 마을로 시집갔다는 기록조차 남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그 여성이 가져간 씨앗이 여러 해 이어졌다면 씨앗은 그 이동의 흔적을 남길 수 있다.

“친정에서 가져온 씨앗.”

“외할머니에게 받은 씨앗.”


이런 말은 공식적인 기록은 아니지만 씨앗의 길을 기억하는 생활의 언어가 된다. 씨앗은 혈통처럼 한 줄로만 이어지지 않는다. 한 사람에게 받은 씨앗을 밭에 심고, 그 밭에서 나온 씨앗을 다시 다른 사람에게 건넨다. 한 집의 씨앗이 여러 집으로 나뉘기도 하고, 서로 다른 곳에서 온 씨앗이 한 마을에서 함께 자라기도 한다.


그래서 씨앗 하나의 역사는 한 줄의 계보보다 여러 갈래의 길에 가깝다. 오래된 씨앗을 만났을 때 “어디에서 왔는가?”만 묻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누가 가져왔는가? 누구에게 건넸는가? 어디에 심었는가? 얼마나 오래 이어졌는가? 어떤 농사와 음식 속에서 살아왔는가? 이 질문들이 함께 따라온다.


씨앗의 이동은 장소만 바꾸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씨앗이 다른 곳으로 이동하면 그 씨앗을 둘러싼 경험도 새로운 사람에게 넘어간다. 언제 심는지, 어떻게 거두는지, 어떤 음식에 쓰는지에 관한 지식이 함께 이동한다. 새로운 사람이 그 씨앗을 심으면 그 지식도 새로운 밭에서 다시 경험된다.


씨앗은 사람을 따라가면서 새로운 농사와 만난다. 그곳에서 다시 선택을 받는다. 어떤 지역에서는 수확 시기가 중요하고, 어떤 곳에서는 저장성이 중요하다. 맛과 조리법이 다르면 사람들이 찾는 씨앗도 달라진다. 농사에 필요한 노동이 다르면 농부가 좋은 씨앗이라고 생각하는 기준도 달라질 수 있다.


같은 씨앗이 다른 곳에서 다른 선택을 받는 이유다. 그 선택이 여러 세대 이어지면 같은 작물 안에서도 지역마다 다른 농가종이 형성될 수 있다. 농민의 선택과 환경의 영향, 씨앗의 교환과 유전자 흐름이 함께 작용하면서 농가에서 유지되는 집단의 성격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씨앗이 이동했다고 해서 그 지역의 씨앗이 곧바로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들어온 씨앗이 심어지고, 살아남고, 다시 심어지고, 사람들에게 필요한 씨앗으로 선택되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래서 씨앗의 지역성은 출생지 하나로 설명하기 어렵다. 어디에서 왔는가를 묻는 것과 어디에서 살아왔는가를 묻는 것은 다른 일이다.


씨앗은 움직였고, 사람은 그 씨앗을 받아들였다. 농민은 그 씨앗을 심었고, 다음 농사를 위해 다시 골랐다. 어떤 씨앗은 사라졌고 어떤 씨앗은 남았다. 남은 씨앗은 그 지역의 농사 속에서 자리를 얻었다. 이렇게 보면 농업의 지역성은 고립에서만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서로 다른 곳에서 온 씨앗과 사람과 지식이 만나고, 그 가운데 일부가 새로운 장소에 남으면서 지역의 농업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그렇다고 모든 지역의 씨앗이 외부에서 들어온 것이라는 뜻은 아니다. 어떤 씨앗은 오랜 시간 한 지역에서 이어졌고, 어떤 씨앗은 다른 지역과의 교류를 통해 들어왔다. 한 지역 안에서도 여러 경로를 거친 씨앗들이 함께 살아갔을 수 있다. 씨앗의 역사는 정착과 이동 가운데 하나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움직이고, 머물고, 다시 움직인다. 사람이 씨앗을 데려오고, 농민이 그것을 심는다. 어떤 씨앗은 다음 농사로 이어지고, 어떤 씨앗은 사라진다. 남은 씨앗은 그 지역의 농사와 관계를 맺는다.


사람이 이동한 길이 씨앗의 길이 되고, 장터가 열린 길이 씨앗의 길이 된다. 친족 관계가 씨앗을 옮기고, 혼인이 새로운 밭을 만든다. 이웃 사이의 나눔도 씨앗의 이동을 가능하게 한다. 씨앗은 그렇게 사람의 생활을 따라 움직였다. 그러나 길을 따라온 씨앗에게는 아직 다른 시간이 남아 있었다. 새로운 땅에 들어가는 것과 그 땅에서 살아가는 것은 다른 일이었다. 씨앗이 흙에 들어가면 그곳의 계절을 만나고, 물을 만나고, 농민의 손을 만난다. 그 씨앗 가운데 무엇이 다음 농사로 이어질지도 달라진다. 이때부터 씨앗의 역사는 이동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사람이 데려온 씨앗을 그 땅은 어떻게 바꾸어 놓았을까. 그 질문 앞에서 씨앗의 길은 잠시 멈춘다.

그리고 땅의 시간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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