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종 씨앗, 문명을 묻다 08
어느 오래된 시골집 장독대 옆이나 그늘진 곡간 윗목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때 묻은 양파망이나 노끈으로 조심스럽게 묶인 작은 종이 봉지 하나가 놓여 있는 것을 보게 된다. 봉지 안에는 다가오는 봄날 밭으로 나갈 정갈한 콩 알갱이들이 들어 있고, 봉지 겉면에는 상업적 종자 회사들이 찍어낸 세련된 품종명이나 알 수 없는 숫자 조합의 품종 번호 따위는 적혀 있지 않다. 대신 서툰 글씨로 ‘우리 밭 콩’, ‘건너편 할머니 팥’, 혹은 ‘집 뒤 비탈밭에서 잘 되던 것’ 같은 정겨운 장소와 사람의 이름이 정성스레 적혀 있을 뿐이다.
외지에서 온 거친 낯선 이가 본다면 그저 시장에서 흔하게 파는 콩 한 됫박과 별반 다를 바 없는 보잘것없는 곡식 알갱이로 보일지도 모른다. 알맹이의 크기나 빛깔을 아주 정밀하게 관찰하지 않는다면, 마트의 깔끔한 비닐 포장지 속에 담긴 외지산 콩과 쉽게 구분해 내기도 어렵다.
그러나 그 씨앗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은 농부에게 그것은 단순한 식물의 종자 알갱이가 아니다. 그 낟알 속에는 수년 전 어느 밭에서 가장 풍성한 결실을 거두었는지, 유난히 장마가 길고 비가 많이 내렸던 해에도 어떻게 썩지 않고 끝까지 버텨내었는지, 그리고 그것으로 밥을 짓거나 장을 담갔을 때 가족들이 얼마나 고소하게 그 음식을 비워냈는지에 대한 깊은 삶의 기억이 줄줄이 따라붙는다. 그것을 처음 마당에 심었던 이웃의 이름과 수확한 알곡 가운데 가장 단단한 것만을 골라내던 손길까지 또렷하게 기억하는 농부들이 여전히 존재한다
씨앗 하나가 매끈한 상업적 품종명이 아니라 자자손손 살아온 땅과 사람의 언어로 불리는 순간, 그 씨앗은 단순한 농산물의 단계를 넘어 한 지역의 깊은 농사와 생활의 서사 속으로 깊숙이 걸어 들어가는 것이다.
‘우리 동네의 씨앗’이라는 말은 곱씹어 볼수록 참으로 묘하고 그윽한 울림을 가진다. 사람에게 저마다 나고 자란 고향이 있듯 씨앗에도 저만의 고향이 존재할 것 같지만, 식물의 고향을 사람의 주민등록상 출생지처럼 어느 하나의 고정된 장소로 단정 짓기는 불가능에 가깝다. 씨앗은 끊임없이 사람의 발길을 타고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며, 먼 타관에서 새로운 바람을 타고 흘러 들어오기도 한다. 낯선 곳에서 건너온 씨앗이 그 지역의 생경한 흙과 물에 적응하여 수년 동안 죽지 않고 살아남는 일이 허다하다.
그리고 그 씨앗이 해마다 반복해서 심어지고, 농부의 정성 어린 손길에 의해 선택받으며, 그 지역 사람들의 식탁과 생활 속에 단단하게 자리를 잡게 되면, 처음 그 씨앗이 어디서 건너왔는가 하는 출신의 문제는 점차 그 중요성을 잃어가기 마련이다.
씨앗이 어느 한 지역의 고유한 유산이 되는 데에는 거창한 학술적 선언이나 행정적인 등록 절차가 필요한 것이 결코 아니다.
봄이 찾아오면 약속처럼 동일한 밭에 씨앗을 뿌리고, 여름날의 폭우와 가뭄을 함께 견뎌내며, 가을철 거두어들인 결실 가운데 가장 건강하고 속이 찬 알곡만을 엄격하게 골라 남긴다. 서늘한 겨울 동안 곰팡이가 피지 않도록 정성껏 말려 보관해 두었다가, 이듬해 봄날 다시 정직한 밭으로 들고 나간다. 토양과 기후에 맞지 않아 자람세가 약한 개체는 자연스럽게 줄어들고, 땅의 시련을 견뎌낸 개체는 끝까지 살아남아 개체수를 늘려간다.
알갱이의 고소한 맛과 수확량, 겨울을 견디는 저장성, 부엌에서 음식을 만들기 좋은 실용적인 성질들이 모두 농부의 가혹하고도 다정한 선발 기준이 된다. 그렇게 한 해의 씨앗이 다가오는 해의 씨앗이 되고, 그다음 해의 씨앗이 또다시 사람과 땅의 선택을 받는다. 한 지역의 씨앗은 이 정직하고도 무서운 반복의 시간 속에서 비로소 자기만의 독특한 생명적 성격을 완성해 가는 것이다.
이 위대한 형성의 과정에는 자연의 생태적 환경만이 단독으로 작용하지 않는다. 그 땅을 일구며 살아가는 농민들이 도대체 무엇을 ‘좋은 씨앗’이라고 판단했는가 하는 인간의 가치관과 문화적 지향이 무엇보다 중요하게 작용했다. 어떤 골짜기에서는 지독한 가뭄을 이겨내는 강인함이 최고의 가치였고, 어떤 들판에서는 물이 많은 습논에서도 뿌리가 썩지 않는 특성이 절대적인 기준이었다.
식구들의 일상적인 밥상에 올릴 콩이라면 씹히는 식감과 감칠맛이 가장 귀했을 것이고, 대대로 내려오는 가문의 장을 담글 콩이라면 발효 과정에서 풍부한 단백질을 내뿜는 성질이 선발의 핵심이었다. 장터에 내다 팔아 식구들의 생계를 지탱할 곡식이라면, 알갱이가 고르고 먼 길을 수송해도 쉽게 부서지지 않는 단단함이 또 다른 기준으로 부상했다. 단순히 밭에서 잘 자라난다는 생물학적 이유 하나만으로 모든 씨앗이 살아남아 다음 세대로 건너갈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 씨앗이 그 지역 사람들의 구체적인 일상과 부엌의 요구에 얼마나 부합하는가가 다가올 세대 씨앗의 운명을 결정지었다. 씨앗은 분명 흙 속에서 잎을 피우고 열매를 맺었지만, 그 씨앗의 다가올 운명은 오직 밭에서만 단독으로 결정되지 않았다. 부엌에서 솥에 넣어 맛을 보고, 장독대에서 정성껏 발효시키며, 시끄러운 장날에 내다 팔아 소비자들의 반응을 살피는 과정 속에서 사람들은 비로소 그 씨앗의 참된 가치를 입체적으로 평가했다.
결국 밭과 부엌 사이의 서늘하고도 따스한 공간에서 씨앗의 고유한 역사가 만들어진 것이다. 어떤 콩은 밥에 얹었을 때 밤처럼 달콤해서 끊임없이 심어졌고, 어떤 조나 수수는 잔칫날 떡을 만들었을 때 독특한 찰기를 내뿜어 보존되었다. 어떤 씨앗은 낫으로 거두기 편해서 선택받았고, 어떤 씨앗은 추운 겨울을 지나 봄까지 썩지 않아 기근을 막아주었기에 살아남았다. 농민이 가을 마당에서 씨앗을 가려내는 일은 단순히 식물의 겉모습만을 고르는 일에 그치지 않았다. 그것은 자신의 가족이 먹을 음식과 다가올 해의 농사에 가장 절박하게 필요한 생명의 형태를 스스로 결정하는 숭고한 행위였다.
시간이 흐르다 보면, 한 지역의 토종씨앗은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의 양식과 완벽하게 닮아가게 된다. 사람들이 매일 먹는 음식의 종류가 달라지면 밭에서 필요로 하는 씨앗의 종류 역시 필연적으로 달라진다. 농사를 짓는 기계화 방식이 변하고 시장이 요구하는 가치가 변하면, 과거에 그토록 귀하게 대접받던 특성들이 하루아침에 쓸모없는 것으로 치부될 수도 있다. 농촌에서 농사를 짓는 사람이 급격히 줄어들고 밭에 심는 작목이 상업적 단일 작물로 바뀌면, 오랫동안 대를 이어온 씨앗을 밭에 뿌릴 사람의 손길 또한 눈에 띄게 줄어들게 된다.
한때 마을 곳곳의 밭두렁에서 흔하게 흔들리던 정겨운 씨앗들이, 어느 날 어느 한 집의 어두운 장독대 구석에만 외롭게 남아있게 되는 비극은 바로 이러한 이유로 발생한다. 씨앗이 갑자기 자가 번식의 생명력을 잃어버렸기 때문이 아니다. 그 씨앗을 해마다 심고, 가꾸고, 가려내어 다가오는 사람에게 기꺼이 건넬 '인간의 일상적 삶의 자리'가 급격히 좁아졌기 때문이다.
씨앗의 지역성은 지리적 지도 위에 동그란 점 하나를 찍는 것만으로 결코 완벽히 설명할 수 없다. 어느 험준한 산자락 아래서 자랐는지, 어느 깨끗한 강물을 마시고 자랐는지라는 생태적 조건뿐만 아니라, 누가 그 씨앗을 심었고, 누가 가려내었으며, 그것으로 어떤 음식을 만들어 나누어 먹었는가 하는 사람 사이의 관계망이 촘촘히 얽혀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유기적인 관계망 속에서 농민은 씨앗의 일방적인 소비자가 아니라, 스스로의 농사를 주체적으로 결정하는 위대한 '결정권자'였다.
자신의 밭에 무엇을 심을지 스스로 결정하고, 어떠한 특성을 가진 씨앗을 남길지 판단하며, 그 씨앗을 이웃 가운데 누구에게 나누어줄지를 주체적으로 선택했다. 자신의 밭에서 대대로 쓸 씨앗을 스스로 보관하여 지켜낼 수 있었고, 이웃 마을의 뛰어난 종자와 기꺼이 바꾸어 심기도 했다. 타관에서 한 줌 얻어온 씨앗을 자기 밭에 심어 수확하고, 그중 일부를 다시 이웃의 손에 쥐여주는 생명의 연쇄 반응을 주도했다.
이러한 선택들은 한 가족의 소소하고 작은 일상처럼 보인다. 그러나 지상 위 씨앗의 미래와 다양성을 결정짓는 위대한 역사는 본래 이처럼 농부들의 작고 정직한 선택들로부터 시작되었다. 어떤 씨앗을 남겨 다가오는 계절로 보낼 것인가. 어떠한 작물을 내 밭의 흙에 내던질 것인가. 어떤 씨앗을 고마운 이웃에게 나눌 것인가. 어떤 씨앗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내 삶의 터전에서 이어갈 것인가. 이 중차대한 질문들에 대한 정직한 답을, 농민들은 수천 년 동안 자신의 삶이 뿌리내린 밭둑 위에서 스스로 결정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현대 슬롯에서 씨앗을 구하고 선택하는 방식은 과거와 완벽히 달라졌다. 비닐 포장지 겉면에는 인쇄된 품종명이 선명하게 적혀 있고, 평균 수확량과 표준화된 재배 특성, 권장 비료 투여량이 친절하게 제시된다. 농부는 필요한 정보를 서로 비교하여 시장에서 돈을 주고 씨앗을 간편하게 구매한다. 넓은 평야 지대에서 일정한 품질과 규격의 농산물을 대량으로 생산해야 하는 현대 상업 농업의 체제 속에서, 이러한 종자의 표준화는 농가에 비할 바 없이 큰 편리함을 가져다주었다.
과학적으로 개량된 새로운 고수율 품종들은 기아를 극복하고 안정적인 생산을 가능하게 했으며, 무서운 병해충에 강하거나 농기계 수확이 용이하도록 개량된 씨앗들은 농부의 혹독한 육체노동을 크게 줄여주었다. 전국의 농민들이 시장의 새로운 씨앗을 다투어 받아들인 것은 고유한 전통의 가치를 몰랐기 때문이 아니었다. 어떻게든 가난을 벗어나 더 나은 농사를 짓고 식구들을 부양하기 위한 삶의 절박한 선택이었다. 그러나 보급형 씨앗이 가져다준 엄청난 편리함과 생산성의 그늘 뒤편에서, 문명사적으로 매우 심각한 생태적·슬롯적 변화가 찾아왔다.
농민이 자기 밭에서 스스로 씨앗을 가려내고 겨울 동안 보관하는 정성 어린 행위가 급격히 사라져 버린 것이다. 어떠한 씨앗을 어디서 구할 것인지, 내년에 무슨 품종을 심을 것인지에 대한 중차대한 결정권이, 농가의 밭두렁을 벗어나 바깥의 거대한 종자 기업, 연구 기관, 그리고 상업적 종자 공급 체계로 완전히 이동해 버렸다.
이러한 거대한 구조적 변화는 단순히 밭에 심기는 작물의 종류 몇 가지가 바뀌었다는 뜻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씨앗의 운명과 농업의 미래를 '과연 누가 주체적으로 선택하고 결정하는가'라는 근본적인 문명론적 질문을 우리에게 던진다.
농민이 자자손손 내려온 자기 씨앗을 스스로 저장하고 다시 밭에 심을 수 있는가. 소중한 종자를 이웃과 아무런 제약 없이 나눌 수 있는가. 타 지역의 농민과 주체적으로 교환할 수 있는가. 거대한 자본의 논리에 휘둘리지 않고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작물을 선택하여 심을 수 있는가. 그리고 씨앗과 관련된 조상들의 농업적 전통 지식과 축적된 경험을 다음 세대에게 정당하게 전할 수 있는가.
오늘날 국제슬롯가 농민의 ‘종자에 대한 권리(Farmers' Rights)’를 거세게 주장하고 나선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2018년 유엔 총회에서 채택된 '유엔 농민권리선언(UNDROP)'은, 농민과 농촌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 자신의 종자를 보존하고, 사용하며, 나아가 자유롭게 교환하고 판매할 수 있는 정당한 권리를 명시했다. 나아가 씨앗에 얽힌 고유한 전통지식을 법적으로 보호받을 권리와, 식물유전자원의 보전 및 지속 가능한 이용에 관한 국가적 결정 과정에 주체적으로 참여할 권리를 명확히 선언했다. 농민이 자신의 종자를 유지하고 통제하며 발전시킬 권리, 그리고 자신이 일구는 밭에 재배할 작물과 종자를 스스로 선택할 권리를 인류 공통의 보편적 권리로 공식 인정한 것이다.
그러나 이 유엔 선언이 이 세상에 없던 완벽히 새로운 행위를 창조해 낸 것은 결코 아니다. 지상 위의 농민들은 수천 년의 농경 역사 동안 이미 그렇게 자연스럽게 살아왔다. 가을 마당에서 씨앗을 정성껏 저장하고, 봄날 다시 흙에 심었으며, 이웃과 따스하게 나누고, 다른 마을의 씨앗과 바꾸며, 자기 밭에 가장 잘 들어맞는 특성을 스스로 가려내어 남겨왔다. 유엔이라는 국제기구가 그것을 '권리'라는 엄정한 법적 언어로 비로소 표현하기 시작한 것은, 종자를 다루는 농민의 그 정직한 행위가 단순한 농사 기술의 차원을 넘어, 인간으로서의 존엄한 삶과 농업의 자율성에 관한 본질적인 문제임을 뒤늦게 깨달았기 때문이다.
'토종씨앗을 지킨다'는 명제의 참된 의미 역시 바로 이 지점에서 완벽하게 새로워진다. 단순히 오래된 옛날 씨앗을 영하의 차가운 유전자 저장고나 박물관의 전시관 속에 수집해 놓는 것만으로는, 그 씨앗이 살아있는 생태 농업의 일부로 남았다고 말할 수 없다. 그 씨앗을 봄마다 정성껏 흙에 심고, 가을에 거두어들이며, 다시 가장 좋은 알곡을 가려내어 이웃과 나누는 ‘사람’이 밭 위에 존재해야만 한다. 씨앗을 바라보는 정교한 경험적 지식과 자율적인 선택권이 오롯이 농민의 손끝에 남아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토종씨앗이 지닌 참된 지역성은, 차가운 저장고에 보존된 씨앗의 숫자로만 측정될 수 없다. 그 씨앗을 오늘날 과연 누가 주체적으로 선택하는가. 누가 다가오는 봄날 그 씨앗을 밭에 뿌릴 것인가. 누가 다가오는 세대를 위한 건강한 씨앗을 남길 것인가. 그리고 누가 그 씨앗에 감추어진 농사법과 문화적 지식을 온몸으로 기억하고 있는가.
이 절박한 질문들이 농촌 현장에 생생하게 살아 숨 쉬고 있어야만, 씨앗 역시 인간과의 정직한 관계망 속에서 비로소 살아있는 생명으로 머물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씨앗이 지역의 역사 속에서 살아남아 온 이 기나긴 오솔길을 따라가다 보면, 그 길 끝에서 또 하나의 숨겨진 주역들이 우리의 눈에 들어온다.
가을 마당에서 수확한 곡식을 받아 정성껏 가려내고, 가장 건강하고 굵은 알곡만을 골라 그늘에 말렸으며, 빛바랜 솜주머니나 항아리 속에 넣어 이듬해 봄까지 완벽하게 보관하고, 이웃집 아낙이 찾아왔을 때 필요한 만큼 기꺼이 나누어주던 사람들. 역사바카라이나 공식적인 기록 문서에는 단 한 줄의 이름조차 적힐 필요가 없다고 여겨졌던 수많은 무명의 농부들이 거기에 있었다.
씨앗을 고르고 지켜내는 일은 농사의 핵심적인 과정이었지만, 그 고단하고 세심한 노동을 진두지휘했던 사람들의 이름이 역사에 정식으로 기록되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그러나 그 땀 젖은 손길을 조용히 따라가다 보면, 씨앗이 한 지역에 뿌리내리고 생명을 이어온 또 하나의 위대한 인문학적 길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그 길의 중심에는, 대대로 집안의 부엌과 장독대를 지키며 씨앗의 생명을 모성으로 보듬어온 수많은 여성들의 손길이 묵직하게 자리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