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 인간을 다시 읽다 16
손을 움직일 때 우리는 손가락 하나하나의 움직임을 생각하지 않는다. 컵을 잡을 때 어느 손가락을 먼저 구부릴지 정하지 않고, 계단을 내려갈 때 발목과 무릎의 각도를 계산하지도 않는다. 걷다가 길에 작은 돌이 놓여 있으면 발은 그것을 피한다. 뜨거운 것을 만지면 손을 떼고, 갑자기 균형이 흔들리면 몸은 넘어지지 않으려고 자세를 바꾼다. 이런 일들은 대부분 우리가 생각하기 전에 일어난다. 신경계는 감각을 받아들이고 움직임을 조절하며, 호흡과 심장박동, 소화와 체온 조절 같은 여러 몸의 기능에도 관여한다.
렇다면 나는 내 몸을 얼마나 알고 있을까. 아픈 곳은 대체로 알 수 있고, 배가 고픈지 피곤한지도 느낄 수 있다. 거울을 보면 얼굴과 몸의 모습을 볼 수 있고 체중계에 올라가면 몸무게를 확인할 수 있다. 병원에 가면 혈압이나 혈액검사 결과를 받고, 필요하면 몸속을 살펴보는 검사도 한다. 몸에 관한 정보는 아주 많아졌다. 그런데 정보가 많아졌다고 해서 내가 내 몸을 더 잘 알게 되었다고 바로 말할 수 있을까.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몸을 알아내려고 했다. 눈에 보이는 상처를 살피고, 열이 나는지 만져보고, 걸음걸이가 달라졌는지 관찰했다. 무엇을 먹었을 때 몸이 편해지는지, 어떤 일을 하고 나면 어디가 아픈지도 경험으로 배웠다. 몸에 관한 지식은 처음부터 바카라이나 기계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 자기 몸을 움직이고 다른 사람의 몸을 살피는 가운데 조금씩 쌓였다.
오래 일을 한 사람에게는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몸의 지식이 있다. 농사일을 오래 한 사람은 흙을 손으로 만져보며 밭의 상태를 짐작하기도 하고, 같은 일을 하면서도 평소와 몸의 느낌이 다른 날을 알아차리기도 한다. 어떤 동작은 처음 배울 때 어렵지만 여러 번 반복하면 생각하지 않아도 몸이 움직인다. 칼을 잡을 때 힘을 얼마나 줘야 하는지, 무거운 것을 들 때 몸을 어떻게 세워야 하는지, 미끄러운 곳에서 발을 어떻게 디뎌야 하는지는 몸을 사용한 시간이 가르쳐 준다.
이런 앎은 머릿속에 문장으로 저장되어 있지 않을 때가 많다. 누군가 그 방법을 물으면 “그냥 해보면 안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렇다고 그 사람이 아무것도 모르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몸으로 여러 번 겪었기 때문에 말보다 먼저 아는 경우가 있다. 몸에는 생각으로 정리하기 전에 이미 익혀 놓은 것이 있다.
과학은 이 몸을 다른 방법으로 살피기 시작했다. 현미경은 눈으로 볼 수 없는 작은 세계를 보여주었고, 여러 검사 장비는 몸속의 상태를 숫자와 영상으로 나타내 주었다. 신경계의 작동을 연구하면서 우리가 움직이고 감각을 느끼는 과정에도 수많은 신호가 오간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몸을 겉으로만 보던 데서 벗어나 눈에 보이지 않는 과정까지 살필 수 있게 된 것이다.
그 작은 세계를 더 들여다보면 세포가 있다. 우리 몸은 수많은 세포로 이루어져 있고, 세포마다 맡은 일이 다르다. 같은 몸 안에 있는 세포라도 하는 일은 서로 다르다. DNA에는 유전 정보가 들어 있으며, 유전자는 그 정보의 한 부분을 이루는 단위다. 그런데 모든 세포에서 같은 유전자가 똑같이 작동하는 것은 아니다. 세포의 종류와 상태에 따라 어떤 유전자가 사용되는지가 달라질 수 있다.
유전자를 알게 된 것은 몸을 이해하는 데 큰 변화였다. 아주 작은 차이가 몸의 어떤 특징이나 질병과 관련되는지 살펴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에서도 몸은 단순하지 않다. 많은 특징은 유전자만으로 결정되지 않고 환경의 영향을 함께 받는다. 음식과 생활환경, 활동량 같은 조건도 몸의 성장과 여러 특성에 영향을 준다. 같은 유전적 특징을 가지고 있어도 살아가는 조건에 따라 몸의 모습이나 상태가 달라질 수 있다.
이것을 생각하면 몸을 아는 일이 조금 이상해진다. 몸을 이루는 세포를 알면 몸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고, DNA를 알면 유전적인 특징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혈액검사로 몸속의 변화를 확인할 수도 있다. 그런데 세포 하나를 안다고 해서 그 세포들이 함께 살아가는 한 사람의 몸을 모두 아는 것은 아니다. DNA를 읽는다고 해서 그 사람이 오늘 어떤 몸의 상태로 하루를 보내는지까지 알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작은 것을 많이 아는 것과 하나의 몸을 아는 것은 서로 연결되어 있지만 똑같은 일은 아니다.
몸은 기계와도 다르다. 고장 난 기계는 부품을 찾아 바꾸면 다시 움직일 수 있지만, 살아 있는 몸에서는 부분들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 세포는 주변의 상태에 반응하고, 신경은 계속 신호를 주고받으며, 면역계는 몸 안으로 들어온 낯선 물질에 대응한다. 몸은 같은 상태에 오래 머물러 있는 물건이 아니라 계속 변하면서 자기 상태를 조절하는 생명이다.
이 문제를 두고 철학자들도 다른 방식으로 생각했다. 데카르트는 몸과 마음을 서로 다른 것으로 보았다. 몸은 공간을 차지하는 물질이고 마음은 생각하는 존재라고 구분했다. 이런 구분은 몸을 하나의 물질적 대상으로 자세히 살펴보는 데 중요한 생각을 제공했다. 하지만 사람의 실제 삶에서는 몸과 생각이 그렇게 쉽게 떨어지지 않는다. 몸이 아프면 생각이 달라지고, 걱정이 많으면 몸이 굳기도 한다. 생각한 대로 몸이 움직이지 않는 순간도 있다.
스피노자는 몸과 마음을 완전히 떨어진 두 존재로 보지 않았다. 그는 하나의 존재를 서로 다른 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마음을 이해하려면 그 마음이 살아가는 몸도 함께 보아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두 철학자의 차이를 외우는 것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이들의 생각을 따라가다 보면 오히려 더 단순한 질문이 하나 남는다. 내가 내 몸을 안다고 할 때, 나는 정말 내 몸에서 떨어져 몸을 바라보고 있는 것일까.
병원에서 내 몸을 검사할 때 나는 몸을 바라보는 사람이면서 검사받는 몸이기도 하다. 거울 속 얼굴을 볼 때는 내가 얼굴을 바라보는 것 같지만, 그 얼굴을 보는 눈도 내 몸에 있다. 몸의 상태를 생각하는 뇌 역시 몸 안에 있다. 몸을 만지는 손도 몸이고, 몸의 통증을 느끼는 감각도 몸에서 온다. 몸을 아는 사람도 몸 밖에 서 있을 수 없다.
이 사실을 생각하면 ‘내 몸을 안다’는 말의 뜻도 달라진다. 우리는 몸을 관찰할 수 있지만 몸과 완전히 떨어질 수는 없다. 몸을 측정하는 기계도 몸을 가진 사람이 사용하고, 몸에 관한 지식을 읽는 사람도 자신의 몸을 통해 그 지식을 이해한다. 몸은 우리가 바라보는 대상인 동시에 우리가 바라볼 수 있게 해주는 조건이기도 하다.
게다가 몸은 자기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우리에게 알려주지 않는다. 면역계는 몸에 들어온 세균이나 바이러스 같은 낯선 물질에 대응하고, 여러 세포와 물질이 서로 신호를 주고받으며 몸을 지킨다. 우리는 그 과정에 명령을 내리지 않는다. 몸은 자기 일을 하면서 살아가고, 우리는 그 결과 가운데 일부만 알아차린다.
신경계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난다. 우리는 걸을 때 발이 어디로 향하는지 어느 정도 알고 있지만, 한 걸음마다 근육과 신경이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의식하지 않는다. 눈을 감고 한 발로 서 보면 평소에는 관심을 두지 않던 몸의 균형이 갑자기 느껴진다. 평소에는 당연하게 여기던 자세와 움직임에도 수많은 조절이 숨어 있었음을 그때 조금 알게 된다. 우리가 몸을 안다고 할 때도 몸 전체를 알고 있는 것은 아니다. 몸이 우리에게 드러내는 일부를 알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몸에 대한 앎에는 여러 층이 있다. 혈압처럼 숫자로 확인하는 지식이 있고, 현미경으로 세포를 살펴 얻는 지식이 있다. DNA를 분석해서 알아내는 정보도 있고, 오랫동안 일을 하면서 몸에 익힌 움직임도 있다. 아침에 일어났을 때 평소와 다른 피곤함을 느끼거나, 몸의 어느 부분이 불편한지 알아차리는 것도 자기 몸에 대한 앎이다. 서로 다른 방법이지만 모두 하나의 몸을 향하고 있다.
어느 하나만으로 몸 전체를 설명하기는 어렵다. 숫자는 몸의 한 상태를 보여주고, 현미경은 몸을 이루는 작은 세계를 보여주며, 경험은 몸이 실제 생활에서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보여준다. 이 셋 가운데 어느 하나가 다른 것을 없애는 것은 아니다. 몸을 더 잘 알려면 서로 다른 앎이 만나는 곳을 살펴야 한다.
그런데 몸은 그 자리에 그대로 머물러 있지도 않는다. 어린 시절의 몸은 자라면서 달라지고, 다치면 흔적이 남는다. 같은 일을 반복하면 움직임이 달라질 수 있고, 나이가 들면서 예전과 다른 힘과 감각을 갖게 된다. 오늘의 몸은 어제의 몸과 조금 다르지만, 우리는 두 몸을 모두 ‘내 몸’이라고 부른다.
여기에서 몸을 안다는 질문은 다른 곳으로 이어진다. 몸의 현재 모습을 정확하게 측정하는 것만으로 충분한가. 세포와 DNA를 자세히 알아내는 것으로 충분한가. 아니면 계속 변하면서 살아가는 몸의 흐름까지 함께 보아야 하는가. 몸을 안다는 것은 몸에 관한 모든 정보를 갖는 일이 아니라, 변하고 반응하고 느끼면서 살아가는 몸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알아가는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면 몸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많이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 위험한 것을 피하고, 균형을 잡고, 상처가 생기면 회복을 시작하고, 낯선 물질이 들어오면 대응한다. 우리는 그 모든 과정을 알지 못한 채 그 몸으로 하루를 살아간다. 내가 몸을 알아가는 동안에도 몸은 나보다 먼저 움직이고, 나보다 많은 일을 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몸을 알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몸이 이미 하고 있는 수많은 일 가운데 우리가 알아차린 일부를 ‘내가 내 몸을 안다’고 부르고 있는 것일까. 이 질문을 따라가다 보면 몸에 관한 지식보다 더 어려운 문제가 남는다. 계속 달라지는 몸을 우리는 왜 여전히 같은 ‘내 몸’이라고 부르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