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 인간을 다시 읽다 18
한여름에 논에서 일을 하다가 그늘로 들어가면 몸의 느낌이 달라진다. 햇빛 아래에서는 땀이 나고 얼굴이 달아오르다가 나무 그늘에 서면 피부에 닿는 공기가 다르게 느껴진다. 물을 마시면 목의 갈증이 가라앉고 잠시 쉬면서 숨을 고르면 몸도 조금씩 편안해진다. 같은 몸인데도 햇빛과 그늘, 더위와 바람, 물과 공기에 따라 상태가 달라진다. 몸의 변화가 몸 안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런 순간에는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더운 날 일을 계속하면 몸은 체온을 일정한 범위에서 유지하려고 한다. 피부의 혈관이 넓어지고 땀이 나면서 몸의 열을 내보내는 반응이 일어난다. 추워지면 열이 빠져나가는 것을 줄이려는 반응이 나타난다. 우리는 이런 과정을 하나씩 생각하면서 움직이지 않는다. 주변의 온도가 달라지면 몸이 그 변화에 반응한다. 자연의 조건은 몸 바깥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몸의 작동 방식에 영향을 준다.
이런 일을 너무 익숙하게 겪어서 우리는 몸이 자연과 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을 잘 의식하지 않는다. 더우면 땀이 나고 추우면 몸을 움츠린다. 목이 마르면 물을 마시고 배가 고프면 음식을 먹는다. 숨을 쉬려면 공기가 필요하고 잠을 잘 때도 주변의 온도와 습도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다. 몸은 피부 안에 들어 있는 하나의 물체처럼 보이지만 살아 있는 동안 바깥의 조건과 계속 만나고 있다.
숨을 한 번 들이마시면, 공기가 코와 기관지를 지나 폐에 들어오면 산소가 혈액으로 이동하고, 혈액은 그것을 몸 곳곳으로 운반한다. 세포가 활동하면서 만들어낸 이산화탄소는 다시 혈액을 통해 폐로 이동하고 숨을 내쉴 때 몸 밖으로 나간다. 들이마시고 내쉬는 동안 몸과 공기는 계속 물질을 주고받는다. 몸 안과 몸 밖을 나누는 선이 있다고 해서 생명의 과정까지 그 선에서 끊어지는 것은 아니다.
호흡을 잠시 멈추어 보면 이 관계가 얼마나 직접적인지도 알 수 있다. 처음에는 참을 수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 숨을 쉬고 싶은 요구가 점점 커진다. 마음으로는 조금 더 참으려고 해도 몸은 계속 호흡을 요구한다. 몸은 내가 생각한 것보다 먼저 자기에게 필요한 것을 요구한다.
공기가 언제나 몸에 좋은 것도 아니다. 대기오염 물질은 호흡기를 통해 몸에 들어오며 폐뿐 아니라 심혈관계와 신경계 등 여러 기관에 영향을 줄 수 있다. 특히 작은 입자는 폐 깊숙한 곳까지 들어갈 수 있고, 일부 입자나 그에 따른 생물학적 반응은 몸의 다른 부분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공기는 몸 주변에 놓인 배경이 아니라 몸의 상태와 건강에 관계하는 조건이다.
먹는 일에서도 몸과 바깥의 관계가 드러난다. 밭에서 자란 채소와 논에서 나온 쌀은 처음부터 사람의 몸 안에 있던 것이 아니다. 음식을 먹으면 씹고 삼키는 과정을 거쳐 위와 장으로 들어가고, 소화와 흡수를 거쳐 몸이 사용할 수 있는 물질이 된다. 음식에 들어 있던 영양소는 혈액을 통해 이동하고 여러 세포의 활동에 사용된다. 몸 밖에 있던 것이 몸의 생명을 유지하는 과정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다.
우리가 먹는 음식의 출발점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관계는 더 넓어진다. 쌀 한 톨은 논의 흙과 물, 햇빛과 기온을 떠나 생각하기 어렵다. 채소 한 포기도 토양의 상태와 물의 공급, 계절의 온도와 햇빛에 영향을 받으며 자란다. 사람은 음식을 먹지만 그 음식은 사람의 몸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다. 몸은 다른 생명과 자연의 여러 조건을 거쳐 온 것을 받아들여 자기 생명을 이어간다.
몸 안에는 눈으로 볼 수 없는 생명들도 있다. 피부와 입, 장을 비롯한 여러 곳에는 다양한 미생물이 살아가며, 이들은 소화와 면역계의 발달과 기능 등에 관여한다. 사람마다 미생물의 구성도 다르고 식사와 약물, 환경 노출 등에 따라 그 구성과 기능이 달라질 수 있다. 과학에서는 몸에 사는 미생물과 그 유전자를 마이크로바이옴이라는 개념으로 살펴본다.
이런 사실을 알고 나면 몸의 경계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피부가 몸과 바깥을 나누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 경계가 단절을 뜻하지는 않는다. 공기는 들어왔다가 나가고, 음식은 몸속에서 분해되고 흡수되며, 몸에 사는 미생물은 여러 생리적 과정에 관여한다. 몸은 모든 것을 막아놓은 닫힌 공간이라기보다 바깥과 물질을 주고받으면서 자기 상태를 유지하는 생명이다.
그렇다고 몸과 자연의 구별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사람과 나무는 다르고 사람과 흙도 다르다. 사람의 몸에는 사람만의 조직과 기관이 있고, 사람은 다른 생명과 구별되는 방식으로 생각하고 행동한다. 자연과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경계가 없어진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몸은 경계가 있기 때문에 관계를 맺는다. 피부는 모든 것을 통과시키지 않으면서도 외부의 온도와 접촉한다. 폐는 공기를 받아들이면서 그 안의 산소를 혈액으로 옮긴다. 장은 음식물을 받아들이면서 필요한 영양소를 흡수한다. 몸의 경계는 세상과 자신을 완전히 끊어놓는 벽이 아니라, 바깥과 안쪽 사이에서 끊임없이 교환이 일어나는 자리다.
우리는 자연을 흔히 ‘환경’이라고 부른다. 환경이라는 말에는 내가 중심에 있고 그 주변을 자연이 둘러싸고 있다는 느낌이 있다. 하지만 몸의 입장에서 보면 공기와 물과 음식은 단순히 나를 둘러싼 배경이 아니다. 그것들이 몸 안으로 들어오고 몸의 상태를 바꾸며 생명을 유지하게 한다. 몸에게 자연은 바라보는 대상이기 전에 살아가는 조건이다.
그런데 인간은 이 조건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만 하지 않았다. 추우면 몸을 움츠리는 데서 그치지 않고 옷을 만들었다. 비가 오면 나무 아래에서 기다리는 데서 그치지 않고 집을 지었다. 물이 부족하면 우물을 파고 물길을 만들었으며, 농사를 짓기 위해 땅의 모양을 바꾸었다. 인간은 자연의 조건에 반응하면서 동시에 자신이 살아갈 조건을 바꾸어왔다.
기술은 이 능력을 크게 넓혔다. 에어컨은 더운 날 몸이 견뎌야 할 온도를 낮추고, 난방은 추운 날 몸을 보호한다. 냉장고는 음식이 상하는 속도를 늦추고, 옷과 신발은 피부와 외부 환경 사이에 새로운 층을 만든다. 안경이나 보청기 같은 도구는 몸이 세상을 받아들이는 방식을 보완한다. 인간은 몸의 조건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여러 도구를 만들어 그 조건을 바꾸어왔다.
그러나 기술이 몸을 자연에서 떼어놓는 것은 아니다. 에어컨을 사용하려면 에너지가 필요하고 냉장고를 사용하려면 전기가 필요하다. 집을 짓는 데에는 나무와 돌과 금속 같은 물질이 필요하고, 옷을 만드는 데에도 자연에서 얻은 재료가 사용된다. 기술은 자연과의 관계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관계의 방식을 바꾼다.
농사를 생각하면 이 관계가 더 분명해진다. 사람은 씨앗을 심고 흙을 고르고 물을 대면서 자연의 조건을 바꾼다. 논의 물길을 내고 밭의 모양을 고치며 작물이 자랄 수 있도록 땅을 관리한다. 하지만 언제 비가 올지, 한여름의 기온이 얼마나 오를지, 병충해가 언제 생길지를 마음대로 정할 수는 없다. 사람이 자연을 이용한다고 해서 자연의 바깥에 서는 것은 아니다.
농부가 아무리 밭을 잘 준비해도 씨앗이 싹트는 과정 전체를 명령할 수는 없다. 물을 주고 거름을 주고 풀을 매어도 식물의 생장 자체를 직접 만들어낼 수는 없다. 사람은 생명이 자랄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할 수 있지만 생명 그 자체를 자기 손으로 조립하지는 못한다. 농사는 자연을 이용하는 일이면서 동시에 자연의 힘에 기대는 일이기도 하다.
이 관계를 생각하면 인간을 자연의 주인이라고 부르는 말도 조심스러워진다. 인간에게 자연을 변화시킬 힘이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변화시킬 힘이 있다는 것과 그 변화의 결과를 모두 통제할 수 있다는 것은 다른 문제다. 사람이 만든 농업과 도시와 산업은 다시 사람이 살아가는 조건을 바꾸었다. 인간은 자연을 변화시키면서 자신이 살아갈 세계도 함께 변화시킨다.
여기에서 몸의 자유도 다르게 보인다. 우리는 원하는 곳으로 움직이고 원하는 일을 할 수 있을 때 자유롭다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몸은 공기와 물과 음식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고, 일정한 온도와 휴식도 필요하다. 아무것에도 의존하지 않는 자유는 살아 있는 몸에게 가능하지 않다. 살아 있는 몸의 자유는 필요한 것들과 관계를 맺으면서 그 안에서 움직이는 자유에 더 가깝다.
몸을 돌볼 수 있다는 것과 몸의 생명 전체를 내가 만들어내고 통제한다는 것도 다른 일이다. 나는 운동하고 치료받고 생활습관을 바꿀 수 있다. 하지만 숨을 쉴 때마다 폐의 움직임을 하나씩 지시하거나 음식이 소화되는 과정을 직접 명령할 수는 없다. 몸에는 내가 선택하고 돌볼 수 있는 부분과 내가 결정하지 않은 채 이루어지는 부분이 함께 있다.
그래서 몸을 자연과의 관계에서 바라보면 영성에 관한 질문도 달라진다. 영성을 몸에서 벗어나는 일로 생각하면 자연과 몸의 관계는 영성과 멀어 보인다. 하지만 내가 생명을 만들어낸 사람이 아니라 이미 시작된 생명 안에서 살아가는 존재라고 생각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내가 선택하지 않은 몸으로 태어나고, 선택하지 않은 공기를 마시며, 선택하지 않은 계절 속에서 살아간다는 사실은 인간의 삶에 내가 결정하지 않은 조건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렇다고 그 조건을 받아들이기만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농부는 비가 오기를 기다리기만 하지 않고 밭을 준비한다. 아픈 사람은 자신의 몸을 돌보고 치료를 선택한다. 사람은 추위를 견디기만 하지 않고 옷을 입고 집을 짓는다. 살아 있다는 것은 주어진 조건에 순순히 머무는 것도 아니고 모든 조건을 자기 뜻대로 바꾸는 것도 아니다. 주어진 조건 안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찾아가는 것이다.
이런 생각은 다른 사람의 몸을 바라보는 방식에도 닿는다. 나 역시 공기와 물과 음식에 의지하고 몸의 변화와 한계를 겪으며 살아간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에게만 완전한 자립과 통제를 요구하기는 어렵다. 누군가는 계단을 쉽게 오르고 누군가는 도움을 필요로 할 수 있으며, 같은 환경에서도 몸을 사용하는 방식은 다를 수 있다. 몸의 차이는 삶의 가치 차이가 아니라 살아가는 조건의 차이이기도 하다.
자연은 그래서 멀리 있는 산이나 숲에만 있지 않다. 숨을 쉴 때 들어오는 공기에도 있고, 마시는 물에도 있으며, 먹는 음식에도 있다. 피부에 닿는 온도와 몸이 견디는 계절의 변화에도 자연이 들어 있다. 자연을 만나기 위해 특별한 곳으로 떠나야 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몸으로 하루를 보내는 동안 이미 자연과 만나고 있다.
그러면 ‘내 몸’이라는 말도 조금 달라진다. 몸은 분명 하나의 몸이지만 혼자 닫혀 있는 몸은 아니다. 몸은 자기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바깥의 것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사용하며 다시 내보낸다. 그러면서도 다른 무엇으로 흩어지지 않고 하나의 생명으로 살아간다. 몸은 바깥과 관계를 맺으면서도 자기 몸으로 존재한다.
몸을 오래 바라보면 인간을 자연의 주인이라고만 부르기도 어렵고 자연의 한 부분이라고만 부르기도 어렵다. 사람은 자연에 의존하면서 자연을 변화시키고, 변화시킨 자연의 영향을 다시 몸으로 받는다. 논의 물길을 바꾸면 농사의 조건이 달라지고, 도시의 공기를 바꾸면 사람의 호흡 환경도 달라진다. 사람이 자연을 바꾸는 일과 자연이 사람의 몸에 영향을 미치는 일은 서로 떨어져 있지 않다.
어쩌면 몸은 인간과 자연을 나누는 벽이라기보다 서로 다른 존재가 만나 살아가는 자리인지도 모른다. 숨을 들이마실 때 공기가 몸으로 들어오고, 음식을 먹을 때 다른 생명의 물질이 내 몸을 유지하는 데 사용된다. 몸은 바깥을 안으로 받아들이면서도 자기 자신을 잃지 않는다. 살아간다는 것은 완전히 닫히는 일도, 다른 것과 섞여 사라지는 일도 아니다.
그렇다면 자연은 정말 몸의 바깥에 있는 것일까. 몸이 자연과 구별되는 존재라면 그 구별은 어디에서 시작되고, 자연에 의존하는 존재라면 우리는 어디까지 자연과 함께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몸을 바라보는 일은 결국 인간이 세계 안에서 어떤 존재로 살아가는지를 묻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