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몸을 가지고 있는가, 몸으로 존재하는가

몸, 인간을 다시 묻다 12

by호시우행

손가락에 작은 상처가 생기면 평소 아무렇지 않게 하던 일이 달라진다. 컵을 잡을 때 손가락을 덜 쓰게 되고, 단추를 채울 때 힘을 주는 위치가 달라지며, 주머니에서 동전을 꺼내는 일도 전과 같지 않다. 상처는 손가락 한 곳에 생겼는데 불편함은 손가락에만 머물지 않는다. 손을 쓰는 방식이 달라지고, 손을 쓰는 방식이 달라지면서 하루의 여러 동작이 달라진다. 몸의 작은 변화 하나가 내가 살아가는 방식에 들어온다.


평소에는 손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손은 무엇인가를 잡기 위해 있고, 발은 걸어가기 위해 있으며, 눈은 읽기 위해 있다고 생각한다. 필요할 때 몸을 움직여 일을 하고, 일을 마치면 몸에 대해 특별히 생각하지 않는다. ‘내 손’, ‘내 발’, ‘내 몸’이라고 말하면서도 그 말 속에 몸과 나 사이에 어떤 거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몸을 가지고 있고, 필요할 때 그 몸을 사용하는 것처럼 느낀다.


몸을 물건처럼 생각하면 이런 말은 자연스럽다. 내가 사용하는 물건은 나와 떨어져 있을 수 있다. 신발을 벗어 현관에 놓고도 나는 그대로 살아가고, 의자에서 일어나면 의자는 그 자리에 남는다. 옷을 벗어 걸어두어도 몸은 사라지지 않는다. 물건은 내가 사용하지 않는 순간 나에게서 떨어져 있을 수 있다. 소유한다는 말에는 어느 정도 이런 거리가 들어 있다.


몸은 다르다. 몸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순간에도 그 몸에서 떨어져 있는 나는 없다. 몸을 쉬게 할 수는 있어

도 몸을 내려놓을 수는 없다. 잠을 자는 동안에도 몸은 쉬고 숨 쉬며, 피곤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순간에도 몸은 나를 그 상태로 있게 한다. 몸은 내가 사용하는 대상이면서 동시에 내가 존재하는 조건이다.


손가락 하나가 아파도 그 차이가 드러난다. ‘내 손가락이 아프다’고 말하지만 실제로 달라지는 것은 손가락 하나의 상태만이 아니다. 아픈 손가락을 피해서 컵을 잡고, 글씨를 쓰고, 옷을 입는다. 손가락의 상태가 달라지면서 내가 할 수 있는 동작이 달라진다. 몸의 한 부분이 달라진 것이 나의 행동을 바꾸고, 행동이 달라지면서 하루의 모양까지 달라진다. 몸의 변화가 나에게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나의 삶 자체에 일어난 변화처럼 느껴지는 이유다.


이것은 몸이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는 뜻이기도 하다. 도구는 내가 사용하는 동안 나의 행동을 도울 수 있지만, 나와 완전히 같은 자리에 있지는 않다. 망치로 못을 박다가 망치를 내려놓으면 나는 망치 없이도 존재한다. 숟가락을 내려놓아도 나는 그대로이고, 신발을 벗어도 발은 남아 있다. 그러나 몸을 내려놓는 순간을 우리는 상상할 수 있을 뿐 실제로 경험할 수는 없다. 몸을 사용한다는 말과 몸으로 존재한다는 말 사이에는 생각보다 큰 차이가 있다.


특히 몸의 움직임이 내가 생각한 것과 다르게 이루어지는 경험에서는 그 차이가 선명해진다. 머릿속에서는 손을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 알고 있어도 실제 손의 움직임은 생각만큼 단순하지 않을 수 있다. 어떤 동작은 여러 번 조절해야 하고, 몸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힘의 크기와 방향을 바꾸어야 한다.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같은 일을 하는 것처럼 보여도 그 일을 해내는 데 필요한 몸의 과정은 전혀 다를 수 있다.


그때 몸은 내가 지시하는 대상이 아니라 내가 살아가는 조건이 된다. 어디까지 걸어갈 수 있는지, 어떤 자세로 오래 앉아 있을 수 있는지, 손으로 어떤 일을 할 수 있는지, 말을 얼마나 편하게 이어갈 수 있는지는 몸의 상태와 떼어놓을 수 없다. 머릿속의 나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실제의 나는 언제나 특정한 몸을 통해서만 움직인다. 하고 싶은 것이 있다는 사실과 그것을 실제로 할 수 있다는 사실 사이에는 몸이 놓여 있다.


이 차이는 몸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어느 정도 경험한다. 아침에 일어나 허리가 뻣뻣하면 평소와 같은 자세로 앉기 어렵고, 발목을 삐면 계단이 전혀 다른 것이 된다. 눈이 피곤하면 같은 글자도 오래 읽기 어렵고, 목이 아프면 말하는 일 자체가 부담이 된다. 나이가 들면서 예전처럼 움직이지 못하는 순간도 찾아온다. 우리는 이런 변화를 몸의 변화라고 말하지만, 그 변화가 실제로 바꾸는 것은 몸의 모양만이 아니다. 내가 갈 수 있는 곳, 할 수 있는 일, 만날 수 있는 사람, 하루를 보내는 방식까지 함께 달라진다.


그래서 몸을 관리한다는 말도 조금 다르게 들린다. 운동을 하고 식사를 조절하고 병원에 가고 몸을 치료한다. 화장을 하고 옷을 입고 머리 모양을 바꾸면서 몸의 모습을 바꾸기도 한다. 기술이 발전하면서 신체의 기능을 보완하고 회복시키는 여러 방법도 생겨났다. 인간은 자신의 몸에 상당한 영향을 미칠 수 있게 되었다. 그만큼 몸을 내가 관리할 수 있는 대상으로 생각하기도 쉬워졌다.


하지만 관리할 수 있다고 해서 소유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몸은 내가 돌보고 훈련하고 치료할 수 있지만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언제나 움직여주는 것은 아니다. 피곤하면 쉬어야 하고 아프면 멈춰야 하며 나이가 들면 예전과 같은 움직임을 포기해야 하는 순간이 온다. 몸은 내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이면서 동시에 내가 원하는 삶의 범위를 정한다. 몸을 바꾸는 일도 결국 몸이라는 조건 안에서 이루어진다.


몸이 나의 조건이라는 말은 몸이 나를 제한한다는 뜻으로만 이해할 필요도 없다. 내가 세상을 만나는 것도 몸을 통해 이루어진다. 손으로 만지고,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발로 이동하며, 피부로 온도를 느낀다. 누군가의 얼굴을 보고 표정을 읽고, 목소리의 높낮이를 듣고, 손을 내밀어 악수를 한다. 몸이 없다면 이런 경험도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 없다. 몸은 세계와 나 사이에 끼어 있는 장벽이 아니라 내가 세계와 만나는 자리다.


그런데 우리는 몸을 자주 잊는다. 바카라을 읽을 때 바카라의 내용에 집중하고, 사람과 이야기를 나눌 때 말의 의미를 생각하며, 길을 걸을 때 목적지를 생각한다. 걷고 있다는 사실을 계속 의식하지 않는다. 잘 걷고 있을 때 발은 생각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손이 자연스럽게 움직이고 눈이 글자를 따라갈 때도 마찬가지다. 몸은 너무 가까이 있기 때문에 오히려 보이지 않는다.


몸에 문제가 생길 때 우리는 그 몸을 다시 의식한다. 통증이 생기면 아픈 부위가 하루 종일 존재감을 드러내고, 움직임이 불편하면 평소에는 생각하지 않았던 동작 하나하나를 의식하게 된다. 몸이 아무 문제 없이 움직일 때에는 몸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다가, 몸이 뜻대로 움직이지 않을 때에는 몸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몸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몸이 너무 가까워서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이때 ‘나’라는 말도 달라진다. 나는 생각하고 기억하고 판단하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을 싫어하는지, 무엇을 기억하는지 말하면서 나를 설명한다. 그런데 그 생각과 기억도 몸을 가진 내가 경험한다. 기뻐하면 얼굴이 달라지고, 부끄러우면 몸을 숨기고 싶어지며, 무서우면 심장이 빨라진다. 기억은 머릿속에만 머물지 않고 어떤 냄새와 소리와 촉감에 의해 되살아나기도 한다. 내가 나를 설명하는 언어 뒤에는 몸으로 살아온 시간이 놓여 있다.


그렇다면 몸은 나의 일부일까. 그렇다고 말하면 몸과 나를 다시 나누게 된다. 팔은 나의 일부이고 다리도 나의

일부이며 머리도 나의 일부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팔과 다리와 머리를 모두 합친 뒤에 그 바깥에 ‘진짜 나’가 따로 있는 것처럼 생각하면 이상해진다. 몸의 어느 부분을 떼어내도 내가 그대로 남는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몸을 모두 제외하고 남는 나를 우리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몸을 바깥에서 바라볼 수 있다는 사실 때문에 우리는 몸과 나를 쉽게 나눈다. 거울을 보면 내 얼굴이 보이고 사진을 보면 내 모습이 보인다. 병원에서는 몸을 검사하고 수치로 나타낼 수 있다. 몸은 하나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그 대상을 바라보는 나 역시 몸이다. 몸을 측정하는 기계가 내 몸을 보여주더라도 그 결과를 읽고 의미를 붙이는 일은 몸을 가진 나에게서 일어난다. 몸은 바라보는 대상이면서 동시에 바라봄이 이루어지는 자리이기도 하다.

그래서 ‘내 몸’이라는 말은 맞으면서도 이상하다. 다른 사람의 몸이 아니라 내가 살아가는 몸이라는 뜻에서는 분명 내 몸이다. 하지만 내 몸이라고 말한다고 해서 그 몸이 나에게서 떨어져 나오는 것은 아니다. 몸의 통증을 다른 사람의 일처럼 바라볼 수 없고, 몸의 피로를 남의 피로처럼 미룰 수도 없다. 몸의 상태가 달라지면 내가 살아가는 세계의 모양도 달라진다.


몸은 내가 가진 것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결정하는 조건이기도 하다. 몸이 움직일 수 있기 때문에 어떤 장소에 갈 수 있고, 손을 사용할 수 있기 때문에 어떤 일을 할 수 있으며, 눈과 귀를 사용할 수 있기 때문에 어떤 방식으로 세상을 받아들일 수 있다. 몸이 바뀌면 가능성의 모양도 바뀐다. 몸은 삶의 바깥에 놓인 도구가 아니라 삶이 열리고 닫히는 자리다.


그렇다고 몸이 곧 나의 전부라고 말할 수도 없다. 나는 내 몸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알지 못한다. 심장이 뛰고 소화가 이루어지고 면역체계가 작동하는 동안 나는 그것을 일일이 의식하지 않는다. 나는 기억하고 상상하고 약속하고 후회한다. 아직 오지 않은 일을 생각하고 지나간 일을 다시 해석한다. 몸만으로 인간의 모든 경험을 설명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도 또 다른 단순화일 것이다.


문제는 어느 한쪽을 선택하는 데 있지 않은 것 같다. 몸이 나의 전부인가, 정신이 나의 본질인가를 결정하는 순간 우리는 다시 둘을 갈라놓는다. 어쩌면 더 먼저 물어야 할 것은 내가 몸과 떨어져서 존재하는 ‘나’를 실제로 경험해본 적이 있는가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몸을 바라볼 수 있지만 몸 밖에서 살아본 적은 없다. 몸을 생각할 수 있지만 몸 없는 생각을 경험해본 적도 없다.


몸을 가지고 있다는 말에는 몸과 나 사이에 거리가 들어 있다. 하지만 살아가는 동안 그 거리는 완전히 만들어지지 않는다. 몸이 아프면 내가 아프고, 몸이 피곤하면 내가 피곤하며, 몸이 움직이는 방식이 달라지면 내가 할 수 있는 일과 만날 수 있는 세계도 달라진다. 몸은 나에게 주어진 하나의 물건이라기보다 내가 나로 살아갈 수 있게 하는 조건에 가깝다.


그래서 나는 몸을 사용하는 사람이라고만 말하기 어렵다. 몸을 통해 무엇인가를 하고 몸을 통해 사람을 만나고 몸을 통해 세계를 경험한다. 몸을 벗어난 뒤에 남는 ‘진짜 나’를 상상하는 것보다, 지금 이 몸으로 살아가는 내가 어떤 존재인지 묻는 편이 더 가까운 질문인지도 모른다.


나는 몸을 가지고 있는가.

아니면 몸으로 존재하는가.


두 문장은 비슷해 보이지만 서로 다른 세계를 연다. 몸을 가지고 있다면 나는 몸과 어느 정도 떨어져 있는 사람이 된다. 몸으로 존재한다면 나라는 존재는 처음부터 특정한 몸을 떠날 수 없다. 내가 누구인지 묻는 일도 결국 어떤 몸으로 살아가고 있는지를 묻는 일과 완전히 분리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몸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몸은 나와 세계 사이에 있는 것일까.

아니면 내가 세계와 만나는 바로 그 자리일까.

월, 목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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